[198] 198화.
“승계 작업은요? 아예 쓰러지신 거라면 그쪽 완전 정신없겠는걸요?”
“그게 문제야.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아직까지는.”
밖으로 드러나는 움직임이 없을 뿐, 내부적으로는 뭔가 돌아가는 중일 것이다.
삼전 물산 지분은 박승재 회장의 장남 박재용 사장이 가장 많이 쥐고 있다.
물산 자체만으로도 꽤나 큰 규모의 회사지만, 삼전 물산의 진정한 힘은 삼전 전자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규모면으로는 삼전 물산을 포함한 삼전 그룹 계열사 전부를 합해도 삼전 전자 하나의 크기가 되지 않지만, 복잡한 지배구조로 인해 작은 녀석이 큰 녀석을 지배할 수 있다.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 주식은 별 변동 없고요?”
“그건 자네가 알아봐야지. 나야 직접 빨대를 꽂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나를 제거하라는 박승재의 명을 거절한 이한일과 나는 따로 삼전 물산의 지분을 암암리에 수집해 왔다.
기업의 본래 가치보다는 작은 평가를 받고 있는 회사이기에 가격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만 삼전 전자를 지배하기 위한 지주회사로 탈바꿈하기 위해 대부분의 지분이 박승재의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어 시장에 나오는 물량 자체가 없었다.
간신히 모은 것이 5% 남짓.
이것만 해도 내가 가진 현금은 거의 다 쓴 상황이었다.
사실 이 정도 들고 있는 상황이라면 박재용이 원활하게 물산을 통해 전자를 지배하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훨씬 이득이다.
삼전을 지배할 힘은 나에게는 없으니 말이다.
떨어지는 떡고물 받아먹기랄까.
하지만 그건 내가 생각했던 좋은 그림이 아니다.
박승재 일가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빠져나오는 것.
3대까지 이어지는 재벌 그룹에 위협을 주는 것이 목적인 만큼 일이 진행되면 고춧가루를 마구 뿌려야 한다.
“그럼 저는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네요.”
“지금 나가 봐야 뭘 할 수 있는데?”
무표정하게 변했던 정현수 회장의 표정에 슬쩍 호기심이 비쳤다.
아마 삼전을 상대로 한낮 풋내기인 내가 도대체 무슨 계획으로 일을 시작한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물산 대주주 중 한 명으로 인사드리러 가야죠. 박재용 사장님께요.”
“허……. 직접 만나 본다고?”
“네. 같이 가시겠습니까? 동행자는 퓨처 금융투자 이한일 회장이라고…….”
“됐어! 거기에 발 담그는 건 자네만으로 족해. 집안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다. 그 집이 도둑에게 털리는 것도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고.”
도둑이라니.
그룹의 입장에서는 도둑 같을 수도 있다.
사실 5%의 지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합병이 진행되면 물산과 전자의 가치 차이를 산정하여 적당한 수준으로 주식을 재분배하게 된다.
전자가 물산보다 수십 배 비싸니 주식 수는 엄청 줄 것이고.
하지만 나 외에 이 일에 대해 막을 수 있는 의지를 가진 곳이 한 곳 더 있다.
그리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이 한 곳 있고.
그들을 만나 볼 생각이다.
⁂
“유명인을 만나 뵙는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유현덕이라고 합니다.”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도 2000년대 이후 설립된 스타트업 중 선두권에 있는 S 아카데미와 에듀코인에 대한 투자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투자하지 않았다. 충분히 투자 논의가 있었을 규모인데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그 시점이 아마 박승재와 날을 세우고 있을 때였나…….
“과찬이십니다. 저희는 아직 작은 회사입니다.”
“업종별 순위권의 회사들은 작은 회사라고 할 수 없죠. 온라인 사교육 시장에서는 독보적이 아닙니까. 하하.”
김학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강명자 대통령 체제에서 기획재정부 총리를 거쳐 이 자리에 와 있는 사람이다.
기획재정부 총리가 연금공단 이사장보다는 훨씬 높고 좋은 자리지만, 원래 행정부 인사는 수시로 바뀐다.
능력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정략적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연금공단은 수십 조 규모의 자금을 굴리는 거대 투자세력이고, 그곳의 장을 지금 만나는 것은 역시나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가 얽혀있는 승계 작업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외국 자본이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의 합병을 극렬히 반대했는데, 연금공단이 삼전 그룹 손을 들어 주어 결국 승계가 진행된다.
최종적으로 성공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사장님,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뵙자고 한 것은…….”
“삼전 그룹 때문이겠죠.”
“네?”
“허허. 정현수 회장님께 연락은 받았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해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저희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라서요.”
정현수 회장의 소개를 통해 만났는데 그가 대략 내 꿍꿍이를 알린 것 같다.
상관없다.
정현수 회장조차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삼전 그룹에 빅 엿을 먹일지 모르니 말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말은 저렇게 청렴한 것처럼 하지만 우리나라는 청렴 가지고 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다.
온갖 때를 다 묻히고서야 오를 수 있는 꼭대기 자리.
원래 권력이 그런 것일까? 규칙이란 것도 언제나 공정한 것이 아니다. 법도 그렇고.
“순리대로 결정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뭐, 박승재 회장님께서 일군 것이니 장남인 박재용 사장이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아, 하하. 이거 괜한 걱정을 했나요? 그쪽 사정이 조금 복잡하게 얽혀 있다기에 당연히 흔들기를 부탁하실 줄 알았는데요?”
“복잡하게 얽혀 있어 더 그렇습니다. 연금공단 지분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골치가 아프더군요. 외국계 자본도 들어와 있는 상황이고……. 뭐, 아무튼 잘 알았습니다. 일단 유 대표께서 박재용 사장과 싸울 일은 없겠군요.”
정말로 저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 또한 나를 떠보는 제스처인지 모르겠다.
“저도 나름대로 결정을 아직 못 내린 상황이라 이사장님의 의중을 한 번 여쭈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 구조상 연금공단이 어느 쪽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승부가 날 테니까요. 저는 겁이 많은 사람인지라 지는 쪽에는 서 있기 싫습니다.”
지는 쪽에 설 일은 없다.
박재용 사장의 손을 잡으면 일은 쉬워지겠지만, 일단 연금공단이 삼전 그룹의 손을 드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상 내 결정의 가치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이 자리가 의미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김학의 이사장도 서로를 믿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 말을 그는 그대로 믿지 않을 것이고, 그가 한 말을 나는 믿지 못한다.
강명자 대통령 정권의 성향상 삼전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확실하고, 그렇다면 김학의 이사장의 결정도 대통령의 결정을 따르게 될 것이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직접 만나 보니 이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겠군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뵈면서 많은 가르침 받고 싶습니다.”
“제가 이사장 임기를 끝낸 뒤에 가능할까요. 하하.”
분위기는 역시나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마음은 다르겠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도 아니고, 믿고 싶더라도 한 번 더 두들겨 볼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런 의심을 실망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 주주총회 당일.
국내 최대 기업의 총회장답게 인산인해였다.
지분을 가지고 있는 소액주주도 가끔 보이긴 했으나, 일정량 이상 가지고 있지 않으면 참석이 불가능하도록 한 박재용 사장.
연금공단은 공식적인 의견을 내지 않고 있으나 곧 뉴스가 뜰 것이다.
총회 시간에 맞춰 이번 승계를 위한 인수합병 건에 대해 반대할 명분이 없으므로 찬성하겠다는 표시를 하겠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준비한 뉴스도 터질 것이다.
[삼전 물산과 삼전 전자의 인수합병 건에 관한 지분가치 산정에 문제점 드러나.]
[삼전 그룹 박승재 회장의 장남 박재용 사장, 승계 성공 시 수천억 원의 탈세 가능.]
[국민의 돈으로 운영되는 국민연금공단의 재벌 봐주기 의혹.]
그리고 마지막 두 건.
[S 아카데미 유현덕 대표, 삼전 물산의 대주주로서 인수합병 반대 의사 표명.]
[삼전 그룹은 3대를 이어가는 왕조, 국민연금공단 빠져라.]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얼른 나가! 내보내!”
내가 먼저 총회 자리에 신분을 밝히며 들어가고, 뒤이어 나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삼전 물산 지분을 획득한 이한일 회장이 들어갔다.
둘의 지분은 총 7% 정도.
이 정도만 하더라도 수조 원 대의 거금이나, 박재용 사장의 15%대 지분과 비교하면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하지만 아주 부족한 것도 아닌 것이 바로 외국계 자본 멀라인 투자사의 지분이 대략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둘이 합치면 일단 박재용 사장 개인 지분과는 비슷해진다.
물론 국민연금이 나서서 찬성표 던지면 끝. 거기에 숨겨진 박재용 사장 지지표도 많고.
전생을 돌이켜 보면 국민연금공단이 찬성표를 던지며 상황은 종료됐다.
멀라인은 정말 이 인수합병을 막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에 들어왔던 것일까?
하여간 이놈의 경제계든 정치권이든 꿍꿍이가 잔뜩 있는 사람들만 움직이는 걸 보면, 참 답답한 세상이다.
“욕을 엄청 먹는구먼.”
“어쩌겠습니까. 여기 이곳에 와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재용 사장이 차기 박승재 회장처럼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을 텐데요.”
“우린 거기에 고춧가루를 뿌리려는 거고? 자네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죠. 흐흐.”
총회가 시작되고 우리 때문에 소란스러웠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연단에 박재용 사장이 나와 자신의 포부를 밝히면서 삼전 그룹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예정대로 총회가 시작됨과 동시에 자신들의 찬성 의사를 밝혔다.
모든 것이 기존 삼전 그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의견 있습니다!”
내가 소리치며 손을 들었다.
“안건과 관련 없는 의견인 것으로 알고 듣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어쨌든 주주의 의견을 들을 의무까지 져버리는 삼전 그룹이었다.
뭐, 의견 개진이 무산된 것은 관계없다. 오늘 이 자리에 들어와 있는 소액주주들, 삼전 그룹에서는 자신들의 편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그 사람들이 새로운 소식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유 대표, 아직 시간 안 됐어?”
“다 됐어요. 이제 시끌시끌해질 겁니다.”
“언젠데? 초조한데?”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차피 박승재 회장 쓰러진 이후로는 이 회장님 발목 잡을 사람 없잖습니까.”
“아내가 있어서 말이지…….”
아. 유미진이 아직 있었다.
박승재 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과 큰돈을 벌 수 있단 것으로 설득했겠지만, 나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타협 불가한 조건이었겠지.
잠시 뒤였다.
대충 ‘이제 안건에 대한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멘트가 막 끝났을 무렵이었을까?
윙~ 윙.
지잉~ 지잉.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교양을 갖추었는지 벨 소리가 직접 울리진 않았다. 대신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는 불길한 진동 울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렸다.
“뭐야, 이거?”
“봤어?”
“정말이야? 이 숫자라면 완전 손해인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연단 위에 마치 박승재 회장처럼 앉아있는 박재용 사장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 잠시 동안 그는 완전히 굳은 석상처럼 보였다.
“알지도 못하는 친군데 너무 세게 나간 것 아냐?”
“그래도 회장님과 저 정도 지분이면 사전에 연락해서 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예의 아니었겠습니까.”
“그럼 유 대표는 예의 없다고 이렇게 잔칫집에 재를 뿌리는 거고?”
“회장님도 같이 하시고서는요, 뭘.”
문자를 보고도 침착한 것은 나와 이한일 둘밖에 없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침착하진 않았지만 내심 속으로 환호성을 지를 곳이 또 있긴 하다.
멀라인 투자사.
그들이 어디 쪽에 앉아있는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누가 외국계 투자회사 아니랄까 봐 우리말로 진행되는 총회 자리에 외국인들만 다섯 명씩이나 모여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 휴대폰에 전에 봤던 번호가 떴다. 김학의 이사장이었다.
장내가 웅성거리긴 했으나 그렇다고 안에서 통화를 할 수도 없는 일. 한 번 거절당했던 내가 다시 일어나자, 아까보다 주목받는 데 약간 시간은 더 걸렸지만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는 있었다.
“저, 뭔가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총회 휴정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석상처럼 굳어있던 박재용 사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기존 삼전 그룹 임원들 또한 자리에서 기립했다.
나도 긴장이 살짝 됐다.
박승재 회장의 무서움은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지만, 장남인 박재용 사장은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아니 멀리서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TV에서나 가끔 봤을 뿐.
박승재 회장이었다면 당장 고함을 지르고 사람들을 불러 나를 끌어냈겠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려나?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침울해 있을 줄만 알았다. 아니면 머리가 텅 빈 상태가 되었을 줄 알았다.
석상처럼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단 것이 그걸 의미하는 것 아닌가. 내 스매싱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는 의미.
그런데 그게 막상 아니었던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마찬가지로 일어나 있는 나를 잠깐 그냥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웃었다.
“네. 얼른 다녀오시죠. 유현덕 대표님도 바쁘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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