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195화.
어떻게 일개 교사(이렇게 표현하는 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전생에도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했으니)가 이 정도까지 컸을까.
사람은 다시 태어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막상 세상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전에 탔던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는 시도를 할 수 있을 뿐이지.
“다시…… 다시 말씀해 주십쇼.”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부정선거 의혹이 터질 거라고요.”
전생에서는 TV에서나 보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선 직전 찾아간 야당 당사. 그곳은 이미 치열한 전쟁으로 비상 사태였다.
그런 그곳에 나는 기름을 부었다.
“그러니깐 증거가 있냐고요!”
“증거는 없습니다. 곧 잡으실 거니까요. 저도 주워들은 이야기 뿐입니다.”
“이걸 저희에게 알려 주는 이유가 뭡니까.”
당연히 삼전과 강명자 후보의 정경 유착 건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물론 이건 나중 이야기고.
강명자 후보가 아마 당선이 될 것이고, 나는 그때까지 현 야당과의 인맥을 충분히 쌓아 두어야 한다.
그래야 박승재가 쓰러졌을 때, 그리고 후계자로의 승계 작업이 진행될 때 충분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압력을 가한다고 될까? 글쎄, 나도 모르지, 그건.
“이미 가지고 계신 정보가 있지 않습니까. 일개 사업가인 저보다는 훨씬 많이 알고 계실 텐데요.”
“…….”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이 시점이면 이미 야당 주요 인사들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언제 터뜨릴지 시일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듣는 것처럼 행동하는 걸 보니 정치인은 역시 정치인이구나 싶었다.
“어쨌든 오늘 제가 온 것은 이 일이 야당에서 시작되든 밖에서 시작되든 터질 일이라는 걸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티비에서나 뵙던 분들이시라서 이 자리에 제가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몰랐네요, 하하.”
할 이야기는 다 끝났다.
별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터질 일에 대해 정치권 밖에서도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려고 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뿐이라고 해도 이들은 이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 관련 사업가도 아닌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 정치권 밖에서도 곧 소문이 돌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 야당이 움직이면 성공적인 공세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잠깐만요.”
내가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끝내고 문을 나가기 직전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네?”
“유 대표는 이걸로 혹시 뭘 원하시는…….”
“하하하하.”
조용히, 아니 심각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나는 완전 큰 소리로 웃었다.
웃는 척을 했다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저는 그냥 사업가입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사업을 하는 사업가요. 나라가 잘 굴러가야 제 사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나라가 잘 굴러가고 말고와는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관계가 없다니요. 민주주의의 근간인 표의 가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인데요.”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나섰다.
확인은 하지 못했지만 안쪽의 분위기는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몇몇은 심각하게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움직일지를 생각하거나 논의할 것이고, 몇몇은 ‘싸가지 없는 녀석’ 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야당에서 제 역할을 해 준다면, 이 일로 강명자 후보는 대통령이 되지 않을 수도, 또는 대통령이 되더라도 몇 시간 먼저 움직인 야당이 새로 확보하게 될 정보로 인해 임기 초반부터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둘 다 나쁘지 않다.
그녀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크나큰 혼란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
역사적인 제18대 대통령 선거.
그날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야당은 발 빠르게 움직였으나 거대한 흐름을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혹여 이것으로 대통령이 달라지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지만, 사실 바뀌지 않는 편이 박승재와의 싸움에서는 유리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그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번.
승계 작업이 한창일 때다.
“실망스럽네.”
“그러게요.”
우리 모임도 대선 결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김승주 회장이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느지막이 입장하며 말을 던졌고, 내가 받았다.
내가 알기로 한성이나 해신은 강명자 대통령 후보 측에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내 조언이 있긴 했지만, 그들 또한 이번처럼 박빙의 승부는 오랜만에 겪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박빙에서 대기업들은 양측에 선을 다 대 놓는 것이 정석.
크게 지원한 쪽이 지더라도 보험을 들어 놓는 것이지.
“왜 지원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던 건가? 이젠 말을 해도 되지 않나?”
김승주 회장은 새로운 대통령에게 줄을 대지 못한 것이 계속 아쉬운 듯했다.
“강명자 대통령을 좋아하셔요?”
“뭐?”
어이없는 질문이었을까.
사실 연령대가 좀 높고, 거기에 경제 성장의 시기에 군사 정권의 도움을 받았던 대기업 총수들은 대부분 그녀에게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큰 상관은 없어. 물론 트집잡히거나 하면 피곤하겠지만…….”
“오, 정말요?”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기업은 기업으로 남아 있어. 일반 국민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름 독립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고 기업을 꾸려 갈 수 있는 거고.”
어디선가 들어봤던 말 같다.
‘정권이 바뀌어도 검찰은 영원하다’라는 구호였나?
“그렇군요.”
“아직 한참 배워야 해, 유 대표는. 그리고 결혼도 하고 어른이 되어야지.”
“허…….”
“하하하. 옳은 말씀이십니다, 회장님.”
기회를 노리던 주현필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왜 결혼 이야기를 하면서 김미연 부회장을 슬쩍 쳐다봤는지…….
내가 한창 이쪽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건너편에 있던 김윤지의 매서운 눈초리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건 좋지 않다.
“아, 아무튼, 일 이야기나 하시죠.”
“일 이야기는 자네가 꺼내야지.”
“언제부터 그렇게 수동적이신 분이 되셨습니까.”
“아마 유 대표 알고 난 다음부터? 흐흐.”
그래도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진담이 주가 될 때도,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긍정적이었다. 아마 이들 눈에는 내가 마치 무슨 점쟁이라도 된 듯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모른다. 전에도 몰랐고 이번에도 모르고.
큰 흐름에서 나의 한 제스처가 어떤 파도를 일으킬 수 있을까.
나약해지면 안 된다.
“삼전 그룹은 장남인 박재용 사장에게 승계 작업을 곧 시작할 겁니다.”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소식이야?”
이미도 원장이나 주현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이들의 입장에서 대기업을 누가 누구에게 넘겨주든 별 상관은 없으리라.
그럼 왜 이 자리에 와 있냐고? 다 이유가 있다.
“여기저기죠. 박승재 회장님 나이도 있고 건강도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참, 나. 놀랍다고 해야 하나…….”
김승주 회장만이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놀랄 만할 것이다.
아마 그나 정현수 회장은 이 정도 정보는 이미 한참 전에 가지고 있었을 테니…….
대기업 내부 가족 문제, 그리고 대기업 간의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내가 알 도리가 없는 부분이었다.
이런저런 상상력을 동원하여 드러난 사실과 조합해 보는 수밖에.
중요한 것은 대기업 소유주의 각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이 가장 약해질 때가 바로 승계 과정이란 사실이다.
내가 전생에 이런저런 뉴스를 보며 놀랐던 것은 수조, 수십조의 시가총액을 가진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당장 돌릴 수 있는 현금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아니, 정확히는 모른다.
현금 싸움으로 하면 숨겨 둔 돈이 다 나올 테니 어느 정도나 비자금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현금 싸움을 하지 않고 세금조차 아끼려 한다면?
그러면 나한테 큰 것 한 방을 얻어맞을 것이고.
넉 다운이 될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국내 1위 재벌의 위용을 보여줄지는 모른다.
“약점을 파고들잔 거야?”
“네, 누나. 그때밖에 없어요. 그리고 약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맞아. 그때가 가장 취약한 시점이지. 작은 돈으로 큰 회사의 소유주를 바꿔야 하니까. 그것도 세금을 피하면서.”
김승주 회장도 내 생각을 읽긴 한 듯했다.
하지만 표정이 좋진 않았다.
“근데 어떻게 파고들겠다는 건데? 돈 많아?”
“많아요. 어느 정도가 많은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뭐야? 몇조라도 있어? 그거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 텐데?”
몇조까지는 아니더라도 1조 이상은 융통할 수 있다.
“조 단위라면 가능해요?”
“아니, 불가능해, 일단은…….”
그게 바로 문제다.
어딜 쑤셔야 하는지 경쟁사들이 아무리 정보력이 좋다 하더라도 알기는 어렵다.
승계 작업에 사용되는 회사가 어디인지 드러난다면 곧바로 해당 기업의 주가는 폭등할 것이 뻔하기 때문.
그나마 삼전은 주요 회사가 삼전 전자이기에 그 삼전 전자의 지분율을 잘 주시하면 발표 이전에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회사를 지주로 삼을지, 그 회사가 삼전 전자의 지분을 어느 정도로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거든. 게다가 지주회사로 사용될 회사는 기업공개조차 되지 않은 곳일 수 있어.”
“그게 안전할 테니까요.”
“그렇지. 이놈 저놈 숟가락 꽂아 놓으면 보기 안 좋으니까.”
“하나 그냥 딱 찍어서 조금씩 모아 두면 어떨까요?”
“뭐? 돈이 남아돌아?”
남아돈다.
물론 삼전 전자나 한성 화학, 해신 자동차라는 거대 회사들의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복잡한 지분 구조는 방법과 위치만 안다면 외부의 공격에 상당히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
쉽게 말해 자체 자산으로는 100억 정도밖에 되지 않는 회사가 수조 원 대의 거대 기업을 지배할 수도 있단 것이고, 그렇기에 약점이 드러난다.
어디를 통해 지배할 지만 정확히 안다면 먼저 깨고 들어갈 수도 있다.
문제는 어디를 통할지 모른다는 것이겠지만, 대충 봐 둔 회사가 있다.
박재용 사장이 대주주로 있으면서 외국 자본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삼전 물산이 바로 그것.
삼전 물산이 삼전 전자와 합병에 성공했었나?
그 부분이 관건인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쨌든 물산 자체만으로도 꽤나 큰 회사고, 삼전 그룹의 후계자로 유력한 박재용 사장 지분이 상당하다.
“어차피 박승재 회장님은 노쇠하시고, 이제 새로운 세대 간의 싸움이지 않습니까.”
“박승재, 그 사람은 노쇠했다고 해도 박승재야. 그리고 정말로 삼전을 잡으려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구석 쪽에 서 있는 지원재를 쳐다봤다.
박승재의 공격을 받았던 건 나 외에 그 둘이다.
그리고 지원재는 죽은 줄 알았으나 다행히 살아 돌아왔고.
아무래도 김승주 회장은 내가 너무 나가지 않길 바라는 모습이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다들 건강히 살아 있으니 이쯤에서 멈추자는 것이겠지.
나도 너무 나갈 생각은 없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박승재는 이제 곧 어떤 시점에 삼전 그룹의 전면에서 사라진다. 그게 언제가 될지.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삼전 물산의 지분이 요동치는 시점이 될 것이다.
삼전을 정말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냐고?
글쎄.
내 모든 돈과 힘으로라도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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