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179화.
박승재의 꿍꿍이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자세할 것도 없습니다. 공식적인 것은 그룹에서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냥 단순히 분위기입니다. 그나저나 군대는 언제 가시는 거예요?
그게 문제지.
전쟁은 절대로 나서는 안 돼.
특히나 내가 군복무를 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대안이 전혀 없어진다.
사회에서는 그래도 두 번, 아니 세 번 살아 본 이상 어느 정도 스스로 융통성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다.
위기가 닥쳐와도 지금처럼 헤쳐 나가면 될 일이고.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완전히 다른 문제.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고, 이쪽 분야에서는 내가 남들보다 몇 번 더 살았다고 해서 더 나은 선택을 할 보장도 없다.
어찌 되었건 박승재가 꾸민 일 중 하나라고 생각은 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해 꾸민 일인지는 전혀 예상이 되질 않았다.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이익을 보는 것은 화공 분야에 강점을 가진 한성 그룹이 될 것이고, 박승재의 회사는 전자기기에 강점이 있는 구조다.
전자기기…….
“군대는 조만간……. 흐흐. 삼전 그룹 관련해서는 별 이야기는 없고요?”
-삼전이요? 글쎄요. 삼전은 자기네 정보 흘리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라 별것 없을 것 같은데요? 오브라이언과 연관된 소식 말씀이시죠?
“네.”
하긴.
김준현이 삼전 관련한 정보까지 알 것을 바라는 건 무리일 것이다.
그가 한성 정보 담당이라면 모르지만 한성 산하의 계열사 직원, 거기에 심지어 그 계열사는 기업 간의 정보전과는 무관한 교육 그룹 소속이잖은가.
그리고 나도 뭘 안다고 해서 그쪽 일까지 적절히 판단할 수는 없다.
이 싸움판은 내가 해 왔던 것보다 너무 큰 그림으로 움직인다.
물론 거기에 대항하려고 지금 이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준현은 잠시 무언가를 뒤적이는 듯했다.
그리고 예상대로였다.
-별건 없는 것 같습니다. 박승재 회장 방문 예정만 이쪽에서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룹 회장의 미국 방문은 잦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었다.
오브라이언의 대북 노선이 강경으로 돌아섰다는 정보와 그의 방미 일정은 별 관련은 없겠지.
하지만 이쯤에서 조금은 한성 그룹에서 확보하는 정보들을 전달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어쨌든 함께 일했던 사이니깐.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부장님. 일단 프린스 리뷰와의 계약건 계속 힘써 주시고, 삼전 그룹 관련한 정보 있으면 간간히 알려주셔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통화는 끝났다.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회의실의 사람들.
통화를 하면서 박승재란 이름이 언급되자 약간은 긴장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쟁이 어쩌고 하니 더욱 그랬겠지.
김윤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네? 아, 아니에요. 일은 잘된 것 같습니다.”
“일?”
방금 전까지 일 이야기를 하다가 한 통화가 아닌가.
이 사람들이…….
“다음 주 내로 프린스 리뷰 인수합니다. 기사에는 미리 나오긴 했지만요. 흐흐.”
“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전쟁은 무슨 소리야?”
주현필이 다급하게 끊고 들어왔다.
전쟁이란 단어가 언급된 시점에서 프린스 리뷰 인수합병 문제는 이들의 사고에서 이미 뒤로 넘어간 듯 보였다.
“전쟁이요? 에이, 설마 전쟁이 나겠어요?”
“오브라이언 이야기 아니에요? 자세히 좀 이야기 해 봐요.”
“저도 잘 몰라요. 그쪽 정부 분위기가 대북 노선에 있어서 강경하게 바뀌었다는 것 같아요. 그래도 분위기는 수시로 변하는 거니까…….”
“위험한 건 박승재 회장과의 연관성이죠. 유 선생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이미도 원장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도 아는 게 여기까지인걸.
전생과 비슷하게 흐르는 역사는 이미 내가 돌아온 시점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는 큰 흐름은 유사하게, 작은 지류만 조금씩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사람의 삶이 나비 효과가 되어 흐름 자체를 바꾼 것이 되었을까.
그나저나 나도 머리가 복잡했다.
전쟁이라.
아마 기우일 것이다.
어느 사업가가 미쳤다고 자국의 전쟁 위험을 높이는 짓을 할…….
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종종 있던 일이다.
미국의 경우만 해도 세계대전 참전에 있어서 기업들의 역할이 컸다.
인류는 항상 다수의 피를 양분으로 부를 쌓는 소수에 의해 움직였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사업 부분인 것 같아요.”
김윤지가 적당한 시점에 소모적인 논의를 끝냈다.
다들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금 전의 고조된 암울한 분위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네. 아무튼 일단 그것과 관련한 건 뉴스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니 우리 뉴스를 띄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시다. 이거 큰일이에요.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일본인에게 매각된 것과 비견되는…….”
“응? 유니버셜 스튜디오? 그 미국에 있는 영화 제작사 아니야?”
아, 주현필.
하긴, 이건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소식이었던가.
당사국이 미국과 일본보다는 반향이 적었지만, 에듀코인의 프린스 리뷰 전격 인수 소식은 당사국이 우리나라와 미국이 된다.
소스를 던져 주면 기사는 기자들이 알아서 잘 써낼 것이다.
“네. 일본에서 사들였죠. 언제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헐. 그랬군.”
“대한민국의 교육업체가 암호화폐 사업 진출에 이어서 미국 내 온라인 교육 업체 중 순위권에 드는 프린스 리뷰까지 인수합병 한다는 소식은 그만큼 크다고요.”
“알겠어, 알겠어.”
약간은 어수선한 분위기.
하지만 이런 모임도 오랜만이었다.
뜻하지 않은 전쟁 관련 이야기에 예전처럼 밝고 희망찬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다시 모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지 않을까.
각각의 역할은 이제까지처럼 알아서 맡아 잘 해낼 것이고.
맥스스쿨의 동향이 궁금하긴 했으나, 박승재가 개입된 이상 이 건은 맥스스쿨과 S 아카데미의 경쟁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사업 확장을 통해 덩치 불리기에 나서면 박승재가 어찌 반응할지 궁금했다.
아직 워낙 규모 차이가 큰지라 별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고.
오히려 우리 쪽에 신경을 쓰는 건 이한일 쪽이 아닐까.
박승재와 이한일의 관계.
명확한 상하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둘 사이에 드러난 미묘한 이질감.
애초에 박승재 같은 사람이 이한일 같은 사람과 손을 잡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이해되지가 않았다.
둘의 배경은 그만큼 다르다.
하지만 둘은 같은 편에 서 있고,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겉으로는…….
“그럼 그렇게 알고, 일단 윤지 누나가 언론 맡아 주세요. 최대한 크게 터질 수 있도록 말이죠.”
“시점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적으로 누나 판단에 맡길게요. 아마 조만간 미국 쪽에서든 우리 쪽에서든 기자들이 냄새 맡고 연락하기 시작할 거예요.”
“알겠어.”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준서는 예전처럼 S 아카데미를 맡아 줘. 프린스 리뷰와의 관계도 있으니깐 일은 조금 많아질 거야.”
조금이 아닐 것이다.
지금 S 아카데미는 내가 없었던 공백기 때문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조차도 어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준서라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런저런 다른 일들에 발을 담그는 동안 훌륭하게 운영해 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도 원장님과 주현필 선생님은 프린스 리뷰에 조금 다녀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 우리가요?”
“네. 어차피 지금 신성 학원은 알아서도 잘 굴러가는 상황이잖아요. 서로 얽혀 있으니 인수합병 계약만 성사되면 그쪽 가 주셔서 우리 쪽 노하우 전수도 해 주시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에듀코인 쪽에서도 별도로 암호화폐 상용화 관련하여 사람이 갈 겁니다.”
일단 각각의 역할 분담은 이것으로 끝이다.
나머지는 그들이 각자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길 기대하며, 동시에 나의 개인플레이가 효과를 발휘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거대 그룹을 상대하는 일.
말이야 어떤 말이든 못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시점이 좋진 않았다.
내 군대 문제가 있었고, 오브라이언의 변화한 스탠스가 변수가 될 수 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2년의 군복무 기간 동안 충분한 체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암호화폐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아예 재계 판도를 뒤흔들 태풍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앞으로 2년이다.
⁂
“오브라이언 대통령이 말을 잘 듣는구먼.”
“회장님 능력이시죠.”
“내 능력인가, 그게. 약 때문이지. 어쨌든 이건 기회야. 우리 삼전이 국내 1위를 넘어 세계 5위권 안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느냐 마느냐의 기회.”
사무실의 박승재와 이한일.
사실 이 둘은 사업 이야기를 이렇게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둘의 간극이 너무 컸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이한일의 역할이 상당했기에 박승재는 내심 그를 발탁하여 도와준 것에 대해 스스로 흐뭇해하고 있었다.
실패라고는 겪어본 일이 없는 박승재.
그에게 있어서 이한일은 다른 존재였다.
온갖 실패를 딛고 일어나 여기까지 성장한 모습을 보면 불모지에서 삼전 그룹의 토대를 닦은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으리라.
사람은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신뢰를 주는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유현덕 그 친구는 어쩌다가 알게 된 거야?”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사람이? 내 나이 돼 봐. 하루 이틀 지나면 다 잊어버려.”
“맥스스쿨 경영권을 넘겨받는 상황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같이 사는 사람과 원한 관계가 조금 있습니다.”
“아, 아! 그랬었지. 재미있는 인연이구먼. 집사람과 원한 관계라니. 새파랗게 젊은 친구던데.”
“젊지만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나도 알아봤어. 나이도 젊고 눈빛도 살아 있는데 그게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단 말이지.”
유현덕을 잡아온 그날.
그는 유현덕의 눈에서 굉장히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젊은 사람의 패기가 가득한 눈빛.
하지만 그 안에는 젊음의 패기가 흔히 놓칠 수 있는 신중함과 노련함이 깃들어 보였다.
굉장히 스트레스 가득한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그는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단순히 숙이기 싫어 굽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상당한 계산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과대평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친구가 그런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였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대단한 일이라 생각했다.
대단하지만 친구가 아니면 적이다.
그리고 이 판에 친구는 매우 드물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순식간에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참, 김승주, 그 친구는 만나 봤어?”
“김승주 회장 말씀이십니까. 말씀하신 대로 만나 보러 갔지만 거절당해서 입구에서 선물만 놓고 왔습니다.”
“그렇겠지. 그 친구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한데, 내가 직접 갈 수도 없고 말이야. 아니, 조만간 한 번 들러 볼까? 같이 갈래?”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겁니다. 시일이 조금 지나고 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 그러자고.”
둘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이한일은 다리가 저려 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 신체적 고통은 그의 삶에 있어서 별것 아닌 일이었다.
오히려 이 자리에 자신이 있음에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나 막상 또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로 말을 하는 박승재.
그리고 그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한일의 모습은 그들 간의 상하 관계를 뚜렷이 드러냈다.
상하 관계에서 오는 불만?
그런 건 당연히 아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굳이 자신이 이 사람의 심복으로 남아 있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떠난 뒤의 후폭풍?
그건 약간은 두려웠다.
아무리 자신의 주변에 과거 조직 폭력배 출신 어께들이 즐비하다 하더라도 결국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다.
그리고 박승재의 돈은 자신 같은 위치의 사람을 수백, 수천 명 씩 거느릴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주요 이유는 아니다.
그들 둘의 아픈 과거.
아니, 박승재는 정확히 그 사실에 대해 모른다.
이한일과 그가 이런 사이가 되기 이전에 따로 만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
모르니 자신을 이렇게 근거리에 두고 써먹는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자네는 유현덕 그 친구만 조금 주시하고 있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깐. 웬만하면 알아서 처리하고.”
“네, 알겠습니다.”
정적 뒤에 박승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한일이 먼저 말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위에 위치한 사람이 입을 열지 않으면 아래 위치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기다리는 법이다.
“알지? 알아서 ‘처리’하란 말.”
다시 한 번 박승재가 강조했다.
이한일에게 하는 ‘처리’라는 표현.
이건 건전한 일 ‘처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사람 자체를 ‘처리’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라는 의미였다.
오랜 시간 그의 곁에 있던 이한일은 바로 단어의 의미를 알아듣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대답했다.
“네. 문제 소지가 보이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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