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176화.
성장은 위기로부터
가진 것이 없었다.
가지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한 번의 기회가 더 생겨 원했던 모든 것을 가졌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졌을 때 나는 생각했다.
사람은 가진 것에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행복을 느낀다고…….
⁂
“회장님은 좀 어떠세요?”
이렇게 말은 하지만 왠지 김미연의 표정을 보면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만 좌우로 살짝 흔들 뿐이었다.
잠시 또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일주일째 매일 찾아오는 병원이었으나 김승주 회장은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서로 난처한 상황이리라.
그나마 김미연 부회장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일까.
정말 마음이 떠났다면 아예 경호원을 통해 나를 막았겠지.
내가 그의 병실을 찾아갈 수 있던 것은 상황이 다 끝나서였다.
나에게 오브라이언을 3월까지 불러오라고 한 사람은 박승재, 재계 1위 기업의 회장이었다.
나름 재계 순위권인 한성의 김승주 회장을 테러하다시피 했으니 뭔가 대기업간의 전쟁이 생기려나 싶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1위와 순위권의 수준 차이는 컸다.
나는 오브라이언이 일전에 준 개인 연락처로 연락을 했고, 명목상이나마 에듀파티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흔쾌히 나의 초대에 응했다.
사실 두어 달의 시간이 있었지만 문제는 내가 그 시간 동안 감금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오브라이언의 방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그건 아직 모른다.
그의 전격적인 방한 중, 박승재는 그를 두어 번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나에게 일언반구 없었다.
그저…….
“수고했네. 이렇게 쉽게 해 줄 일을 왜 그리 복잡하게 만드나.”
라고 말을 했을 뿐이었다.
뭘 수고했다는 건지.
그는 도대체 왜 그런 무리수를 둬 가면서까지 오브라이언을 불러들였을까.
재계를 흔들 만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김승주 회장을 공격하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이리라.
아직 모른다.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전생에 아예 없던 일이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병실 복도를 나오기 위해 돌아섰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내가 회귀하고, 일어난 일들을 바꿨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건 아니다.
차라리 김승주 회장의 문전박대는 굉장히 부드러운 제스처였다.
주현필을 찾아갔을 땐 몇 대 얻어맞았다.
물론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랬기에 그에게 맞은 뺨도 아프지 않았다.
어쨌든 모든 일이 엉켜 버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이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전생의 삶이 끔찍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을까.
내 뜻대로 거의 모든 것을 바꾼 지금.
나는 전생의 미래가 없었던 삶보다도 더욱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나를 깨워 준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 헤어 나오지 못했겠지.
-현덕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준서였다.
그는 두 달 전쯤, 그러니깐 내가 아직 박승재의 손아귀에 잡혀 있을 때 2년 남짓한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그 당시에도 곧바로 나에게 연락을 해 봤겠지만 알다시피 나는 꼼짝없이 연락 두절된 상태였고, 지원재는 실종, 김승주 회장은 자동차 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오광필 할아버지,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에게도 연락을 했겠지.
그때만 해도 내가 연락이 닿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쨌든 일주일 전 내가 자유를 다시 되찾고, 나는 차례로 그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중에는 준서도 있었고.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이유, 그의 군 생활을 잠깐 이야기하곤 조만간 보자는 말을 하고 끊었던 전화.
그리고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나고, 막 김승주 회장을 다시 한 번 보러 갔다가 나오면서 받은 연락이었다.
“어, 준서야.”
-지금 어디야? 잠깐 보자.
보자는 말.
이미도 원장과 오광필 할아버지, 그리고 주현필까지도 나에게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물론 그 신중한 이미도 원장이 나에게 뭐라고 막말을 했을 리는 없다.
오광필 할아버지도 그냥 일이 그렇게 된 거냐며 안타까워했고.
하지만 주현필은 역시나 불같은 성정대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또한 보자는 말을 하고는 내 뺨을 몇 대 후려치고 대화를 시작했으니…….
그게 맞을 일인가.
나도 잡혀 있던 것인데.
서운함이 들긴 했다.
나도 사람이니.
하지만 어쩌랴.
정황상 내가 사라진 그 시간 동안…….
아니, 내가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라고 표현해야 맞겠지.
어쨌든 그러자마자 김승주 회장과 지원재에게 사고가 생겼다.
자세한 내막은 말할 수가 없어 나만 알고 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나에게 실망을 할 수밖에 없겠지.
준서와 나는 맥스스쿨 주변 커피샵에서 만났다.
S 아카데미가 편하겠지만 본사가 지방이고, 김승주 회장 병문안을 왔다가 막 나온 김이었다.
준서 또한 잠시 볼일이 있어 이쪽에 와 있었고.
그는 2년의 기간 동안 많이 남자다워졌는데, 사실 이건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전생에도 이미 그와 난 군대를 다녀왔었다.
하지만 전생과 다른 건 아무래도 표정이겠지.
지금의 감정과…….
그가 미처 전역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가깝게 지내던 지원재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많이 울었다.
“오랜만이네?”
“전역 날 마중 나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마중은 무슨……. 김승주 회장님 뵙고 오는 거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내가 병원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은 그도 아는 사실이었다.
사고 후 흔들리는 S 아카데미를 뒷전으로 해 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상대가 박승재 회장임을 안 이상 나 혼자서 이 상황에 뛰고 날고 해 봤자라는 생각이었다.
김승주 회장의 도움이 절실했다.
물론 막상 그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준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겨워 잠시 내 앞에 놓여 있는 커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잠깐 기다리다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을 듣기 전에 나에게 이야기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글쎄.
“회사만 하더라도 너 한 명에 의존한 사람들이 수십 명이야. 그 사람들 인생이 걸린 일이라고. 사고는 사고고…….”
“지원재 실장은…….”
이 말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온 듯 단호했던 그의 표정에도 금이 살짝 갔다.
하지만 이내…….
“원재 형을 찾아보려고 했잖아. 그리고 못 찾았고. 아니, 사무실 전체가 다 타 버렸는데 뭘 기대해.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하염없이 이러고 지내면 너만 보고 같이 일한 사람들은 뭐가 돼.”
폭발 사고.
지원재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회사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고.
하루아침에 오너는 실종되었고, 경영 총책임자의 사무실은 폭발해 버렸다.
나는 박승재의 손에서 풀려나자마자 회사에 방문했다.
대략 두 달이 넘은 사고라 어느 정도 정리는 되었으나, 맨 꼭대기에 서 있던 둘이 사라진 회사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광필 할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공백기에 아예 회사가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으리라.
김승주 회장과 지원재의 사고 소식을 접한 그는 곧바로 이미도 원장, 주현필에게 연락하여 그들 둘이 임시로 S 아카데미 운영을 맡도록 했다.
이미도 원장이 맥스스쿨 원장 자리를 내려놓았던지라 온전히 힘을 이쪽에 쏟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오광필 할아버지는 언론을 통해 사건을 너무 키우지 않는 쪽에 주력했다.
아예 공론화해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적이 누군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키우기는 부담이 됐으리라.
나도 그 자리에 없었고…….
사무실은 사고 후 경찰 조사가 끝난 지 오래였고, 경찰 조사에서 찾은 것은 완전히 까맣게 전소된 빈 공간뿐이었다.
소방서 측에서는 이 정도 폭발과 화재라면 시신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두 달 전의 사고지만, 내가 그 일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고작 일주일 전.
영상으로 생생하게 본 장면이지만 실제로 확인하는 것과는 그 감정의 여파가 다르다.
“정신 차려, 유현덕. 너나 나나 이젠 힘들다고 어리광부릴 때가 아니야. 누구야? 너는 알고 있는 거지?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그건…….”
“알면 그것부터 털어놓고 시작해. 김승주 회장님 뵀어? 그분은 누군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말씀을 하질 않으셔. 그 부분은 덮고 넘어가라는 말씀만…….”
“그래야 할 것 같아. 뵙지도 못했지.”
“아니, 내 생각은 달라. 그분 본인도 공격을 당한 입장에서 가해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건 엄청 대단한 사람이란 거고, 그래서 두려워서 숨겠다는 거야, 너는?”
누군지 알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야기가 조금 진행되는 듯하자 침착해 보였던 준서도 흥분한 모습 같았다.
하지만 어쩌랴.
말을 한들 어떻게 그와 대적할까.
오히려 그나마 남아 있는 그의 에너지를 소모시켜 버리지는 않을까.
나는 다시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련의 사고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그가 알게 된들 뭘 할 수 있으리.
이런 것을 회의감이라고 하는 건가.
그때 준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손에는 물 컵이 들려 있었다.
촤악.
물이 얼굴로 쏟아졌다.
쏟아졌다기보다는 뿌려졌다고 해야 할까.
다행히 물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는데, 이걸 난 처음에는 다행이라 생각했다가 그 행동의 의미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원한 물.
화끈거리는 얼굴.
주변의 시선.
왠지 익숙한 기분이다.
“야, 준서야…….”
강하게 항변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계속 말했다.
사실 뭐라고 그에게 말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으니 어찌 보면 차라리 지금 상황이 다행일 수도 있겠지.
“정신 좀 차려라, 유현덕. 너 하나 죽는 걸로 끝나면 이렇게까지 안 해. 이미 사람들이 다쳤어. 너랑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러면 상대가 누군들 발악이라도 해 봐야 하는 것 아냐? 그런데 너는 지금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만 하려고 하고 있고. 이게 네가 지금까지 너를 믿어 줬던 사람들에게 보일 행동이냐? 원재 형은? 김승주 회장은 네가 이러고 있는 걸 원하는 것 같아?”
지원재 실장, 원재 형…….
아직도 병원에 있는 김승주 회장.
이미도 원장에 주현필과 오광필 할아버지.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무심코 시선이 가게 입구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 우리 쪽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아마 한동안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나의 눈이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그녀가 우리 테이블로 걸어왔다.
“누나…….”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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