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170화.
여태껏 완강하게 버텨 온 사람이 뭐 이리 쉽게 말을 꺼내나 싶겠지.
하지만 그 또한 답답했던 것이었다.
유현덕이란 사람, 지원재란 사람, 그리고 오광필이란 사람 앞에서는 그래도 그 완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앙 식품이나 S 아카데미나 은성 고등학교나, 전부 고만고만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테니.
하지만 재벌 그룹이 끼어든다면…….
나는 그쪽 업계는 어떤 구조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비슷하다면, 결국 중앙 식품도 재벌 앞에서는 구멍가게에 불과하고, 마음만 먹으면 해당 업계에 직접 진출함으로써 판도를 뒤흔들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식자재 사업이 돈이 된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업체들이 있건 없건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그제야 이 사람의 얼굴에서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그 나름대로 발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라도 식자재 공급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고, 그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것이었다면 결국 지금 상황에서 배후는 이한일이 유력했다.
무표정하거나 불편한 표정이라기보다는 침울한 것이었다.
김미연이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
거기에 이한일이 배후라는 것만 밝혀 줄 수 있으면 그자에게도 죗값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죗값이 얼마나 할까.
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이런 파렴치한 일을 저지른 자의 죗값이라.
“어떻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나도 판단이 서지 않을 땐 반문이 답이다.
김태원 사장은 고개를 잠깐 들었다 다시 숙였다.
한 번 들었다 숙일 때마다 몇 년은 더 나이가 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이 말씀밖에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군요.”
“왜 그런 일을 저지르셨어, 그럼! 애들 먹는 건데!”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오광필 할아버지였다.
사람이 성공을 향해 오르는 일은 정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건 앞에 앉아있는 김태원 사장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리라.
나나 김미연 부회장, 또는 김승주 회장까지도 한순간에 저 입장이 될 수 있는 일.
중앙 식품.
생긴 지 수십 년 된 식자재 납품업체.
이전의 이력을 살폈으나 다른 사업을 한 기록은 없었다.
외길 인생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소신을 지켰어야 하건만…….
이제껏 이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없었을까, 그에게는?
아니면…….
혹 이 정도로 큰 성과가 눈앞에 왔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마 후자이리라 생각했다.
돈은 저절로 들어오지 않는다.
“배후가 이한일 회장입니까, 그러면?”
“네?”
놀란 눈빛.
아직 그가 이한일이 관여되었다는 걸 말하진 않았다.
이제까지 언급된 것들은 단지 대출을 받았는데 그걸 갚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뿐.
이 일도 어찌 보면 나 때문에 벌어진 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중앙 식품이 이런 상황까지 올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회귀자의 책임일까.
내가 바꿔놓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하는 부수적인 변화들.
그리고 그 변화 때문에 누군가는 피해를 입는다.
“대출 받으신 곳이 퓨처 금융투자 아니신가요?”
그는 잠시 김미연 부회장을 살짝 째려보았다.
미리 서로 입 맞추고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눈빛.
하지만 이내 사라졌다.
자신이 뭔가를 항의할 입장이 아닌 것을 깨달았으리라.
“맞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증언해 주실 수 있나요?”
“그건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면…….”
기대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
그리고 그게 어렵다면 해결 방법은 별로 없다.
만약 이 일을 공식적으로 키운다면 앞에 있는 김태원 사장은 노년의 나이에 평생을 일군 것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정작 이한일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 테고.
짜증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걸 싸움이라 하긴 그렇지만, 싸움이었다면 내가 진 상황.
어떻게 해결하든 간에 내가 직접 이한일을 공격할 방법은 없고, 반면 이한일은 원거리에서 타격을 제대로 준 것이다.
오광필 할아버지, 김미연 부회장, 지원재 실장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깔끔하게 학교가 책임에서 벗어나려면 김태원 사장이 무너져야 하고, 김태원 사장을 살리려면 학교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할아버지, 학교에 전화 좀 해 주세요. 지금 학부모님들 연락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그리고 분위기가 어떤지 좀 알려 주세요.”
“응? 알겠어. 지금 바로 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장님.”
“네.”
“사장님께 중앙 식품은 뭔가요.”
“네?”
뜬금없는 질문.
이게 내 주특기 아닌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이런 일로 중앙 식품을 잃어도 괜찮으시냐는 말씀입니다.”
헐.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지원재 실장이 한 말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내 마음을 읽는 건가.
“이한일 회장이 위험한 사람인 건 알지만, 그래도 굳이 이렇게 해야 하셨는지요. 좋지 않은 일이란 걸 아시면서…….”
그리고 이렇게 길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 물론 나와 대화할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다.
대부분이 업무와 관련된 내용들이었지만…….
어쨌든 김태원 사장에게 있어서 나보다는 직접 계약을 했던 상대자니 훨씬 익숙하겠지.
“죄송합니다.”
“사장님, 죄송하단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회사를 지킬 수 있다면 저희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는지를 여쭤 보는 거예요.”
이젠 내가 나설 차례.
그의 답이 궁금했다.
무슨 답을 내놓을까.
“아……. 어떤 것을 바라시는지…….”
“퓨처 금융투자에 남은 빚이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이번 일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처음이자…….”
“그럼 절대 그쪽에서는 돈 빌리지 마십쇼. 빌릴 일도 없으시겠지만요. 그리고 저희는 이번 일이 터지기 전처럼 최상의 재료만 계속 납품해 주시면 됩니다. 아이들 먹이는 것이니 사장님 댁에서 드실 수 있는 재료들로만 말이죠.”
“…….”
면죄부랄까.
아니, 면죄부는 절대 아니다.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나건 그는 앞으로 스스로 짐을 안고 살 것이다.
그럴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내가 감히 내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김태원 사장은 이한일의 일회성 장기말에 불과하겠지.
그리고 그 말은 한 번 공격하고 죽든 말든 내버려 두는 것이고.
나는 지금 그 말을 내 말로 바꾸고자 한다.
“유 선생, 그럼 이 일은 어떻게 해?”
전화를 마치고 다시 들어온 오광필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우린 어떻게 한다냐.
“우린 우리가 알아서 하죠, 뭐. 학교 상황은 어때요? 애들은…….”
“뭐, 크게 위험한 건 전혀 없었나 봐. 전원 학교로 복귀했어. 그리고 학부모들은…….”
그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김태원 사장을 쳐다봤다.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서 알 필요는 없으리라.
사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별로 없다.
문제는 해결하기 위한 돈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것.
지금 우리에게 돈이 부족하진 않다.
“사장님, 이걸로 됐습니다. 가 보셔도 됩니다.”
그는 아직도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침울함과 놀람, 그리고 어리둥절함이 한 얼굴에 모두 들어가 있는 모습이란.
“다시 연락드릴게요. 오늘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먼저 일어나 악수를 청했고, 그는 어색하게 손을 붙잡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직 우리가 어떻게 할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있는 나머지 사람들, 김미연 부회장과 오광필 할아버지, 지원재 실장은 다들 대략 어떻게 일이 정리될지 눈치채고 있겠지만…….
지원재 실장이 재빠르게 김태원 사장을 밖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우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쩌려고?”
“학부모님들은요?”
“아! 연락은 이제 조금 뜸하대. 항의 전화는 간간히 계속 오고 있고. 애들 데려가겠다는 학부모도 두엇 있었나 보더라고.”
“청에서는 별말 없고요?”
“그쪽이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계속 보고하라고 하지. 별 건 없는 것 같아.”
재발 방지 대책이야 당연한 것이고, 다른 뭔가가 필요하려나.
사기업이라면야 보상비를 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학교는 그렇지도 않다.
재단 차원에서 학생들 한 달간의 급식비를 부담하기로 한다면 조금 진정이 되려나.
머리가 아파 왔다.
사실 어떻게 보면 가끔 있는 일이기는 하다.
일반 고등학교의 경우만 하더라도 신종 플루나 요즘은 거의 없긴 하지만 결핵 같은 전염성이 있는 질병이 돌 때가 있다.
학교 입장에서야 그런 일 터지는 것을 막고 싶어 소독제를 비치한다든지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단체생활을 하다 보면 취약해지기 마련.
식중독은 그런 일반적인 전염병보다 문제가 조금은 큰 것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은 터졌다.
그리고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도 파악했다.
다 터놓고 사건을 공유해야 하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럼 그만큼 이쪽에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어떻게든 되겠죠. 돈 좀 써야 하겠지만요.”
이제까지 내가 내린 결정들에 운이 너무 따라 줬기 때문일까.
다들 표정이 조금 애매했다.
이 일에는 전처럼 파격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않아서겠지.
어쩔 수 없다.
아픈 아이들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게다가 치유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일은 일단 일어나면 수습하기가 곤란하다.
“알겠어. 돈을 써도 잘 써야 해.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오광필 할아버지가 한마디 거들었다.
맞는 말이다.
애들 아프게 해 놓고 그냥 돈 좀 쥐어 준대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지.
잘 써야 한다.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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