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169화.
S 아카데미 본사.
보는 눈들이 있기에 고른 장소.
학교에서는 눈이 많다.
사실 이런 일에 교사가 나설 자리는 없겠지만, 어쨌건 이 일 또한 나로 인해 생긴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학교에는 수많은 전염병이 자주 발생한다.
대표적인 것이 아폴로 눈병, 그리고 독감 같은 것들.
간혹 결핵이나 다른 것들도 돌긴 하지만, 그래도 위의 두 가지는 거의 매년 국내 어느 학교에선가는 발생하는 질병들이다.
식중독은 딱히 사람 대 사람으로 전염되거나 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단체 생활을 하는 장소에서는 한 번 생기면 집단 전부가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김태원 사장은 정말 노인이었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고, 편한 자리는 아닌지라 서로 굳은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도 그의 첫인상은 지원재 실장이나 오광필 할아버지가 기억했던 것처럼 남을 헤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내 감이 이번에는 틀린 것인가 싶었으나, 어차피 확인도 할 겸, 그리고 추후 처리 부분도 논의할 겸 만든 자리였다.
그에게 은성 고등학교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전달하고 난 뒤, 나는 혹시나 중앙 식품에서 최근 식자재 공급에 있어 문제될 부분이 없었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할 말이 없다’는 것.
“아니, 그럼 재료 잘못된 걸 인정하는 겁니까?”
오광필 할아버지가 먼저 반응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강하게 항의한 것도 아니었다.
내부 조사 결과 우리 쪽의 검수 착오도 문제가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재료 공급처에서 제대로 된 재료를 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말뿐.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미안하다’라거나, 또는 ‘확인해 보겠다’라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실 나쁜 선택은 아니리라.
불리한 장소에서 불리한 입장.
입을 열어 이런저런 말을 많이 꺼내 봤자 좋을 건 없겠지.
식약처나 이런 곳에서는 어쨌든 조사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뭔가 이상했다.
“허. 이분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애들 먹이는 건데…….”
오광필 할아버지가 오히려 점점 더 흥분하는 모습이었다.
“사장님, 저희는 지금 이번 일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려고 뵙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서야 하나 생각을 할 때, 지원재 실장이 먼저 나서 주었다.
이 자리에 내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사실 은성 고등학교와 지원재 실장은 별 관계는 없었다.
물론 이사회 구성부터 S 아카데미, 한성 그룹, 맥스스쿨까지 깊은 관계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교가 학원의 산하 조직이나 대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그가 나나 오광필 할아버지보다는 김태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고, 중앙 식품 관리도 조금은 직접적으로 해 왔기 때문에 나선 것이었다.
이 만남 전에 내가 부탁했던 것도 있었고.
“실장님이 역할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역할 말씀이십니까?”
“김태원 사장이 아무래도 오광필 할아버지보다는 실장님을 편하게 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같은 사업가고, 입찰 때도 학교에서는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S 아카데미는 그렇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은성 고등학교 정도면 그래도 일반 고등학교들보다는 훨씬 회사처럼 운영이 된다.
식자재 납품 업체도 그렇게 선정했고.
아마 S 아카데미가 했던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비슷하게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학교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사업들은 하나하나가 학생과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에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수업에 집중하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래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고.
어쨌든 그는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원 사장 입장에서야 그가 직접 나서는 이유가 의아하겠지만, 그건 중간에 내 소개를 하면 될 일이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식자재 공급이 잘못된 부분은 드러난 사실이니 드릴 말씀이 없고, 그 책임을 물으신다고 해도 저희가 잘못한 부분에 대한 책임이니 받겠습니다만, 특별히 이 자리에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처음으로 그가 길게 말했다.
그래도 역시나 우리보다는 지원재가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겠지.
지원재 실장은 나를 슬쩍 쳐다봤다.
이 정도면 되나 싶은 생각일 것이다.
내가 S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나도 그와 마찬가지 선에서 끊었을지도 모른다.
잘못에 대한 책임.
사업가에게는 돈이면 해결된다.
학원을 운영하는 입장이라면 수강료 면제나 보상비면 될 것이고.
정말 이 시대는 돈이면 다 되는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학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어찌 생각하면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면에 있어서는 학원과 다를 것이 없는데도 학교에는 그것 이상을 요구한다.
공교육이라 그런 것일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 일은 이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보상금을 받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사장님, 저는 유현덕이라고 합니다. 인사가 조금 늦었습니다.”
“네?”
뜬금없겠지.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와서 자신을 소개하니...
그런데 엄연히 따지면 지원재 실장도 나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지원재 실장이 앞에 있는 테이블에 몸을 숙이며 말했다.
“S 아카데미 대표이십니다. 현재는 은성 고등학교에 재직 중이시고요.”
“아, 이사님이시군요. 저, 면목이 없게 됐습니다.”
놀람이 섞인 낮은 탄식을 하고는 나에게는 사과의 말을 하는가 싶었다.
그리고 뭔가 이야기가 더 나올까 했으나…….
“하지만 누구이신들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하고 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답답했다.
뭐 이런 답답한 사람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그리고 어차피 입을 연다 하더라도 나올 수 있는 건 사과와 변명밖에는 없기 때문인가 싶었지만 뭔가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과할 정도로 입을 열기를 꺼려하는 그런 느낌?
“인정하신다는 말씀이시죠, 그러면? 저희는 그럼 그렇게 청에 보고 올리겠습니다. 학교도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렇게 하십쇼.”
단호해 보였다.
원래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거나, 또는 무엇인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전부 다 내 추측일 뿐.
하찮은 예감만으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이 사람과의 답보 상태에 이를 때 쯤,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유 대표님!”
“부회장님!”
내 주제에 어떻게 대기업 부회장을 오라 가라 하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쇼는 있어야 꽉 막힌 이 사람의 입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그녀는 재단 이사이기도 했고.
현 상황에 대해 보고받고 의사를 표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나와 오광필 할아버지가 S 아카데미 본사로 넘어오는 김에 겸사겸사 얼굴도 볼 겸, 그리고 김태원 사장이 입을 닫을 경우를 대비하여 약간의 압력으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녀에게도 연락을 해 두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나랑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었다.
김태원 사장은 예상대로 그녀 얼굴을 보고 잠시 어디서 봤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기억해 냈는지 놀라 했다.
뉴스에서 가끔 얼굴을 비칠 때와는 다르게 사뿐사뿐 자리로 걸어 온 그녀는 곧바로 김태원 사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김태원 사장님. 한성 그룹 김미연이라고 합니다. 문제가 조금 생겼다고 들었네요.”
이게 돈의 힘일까.
아니면 그게 가져온 권력?
김태원 사장은 방금 전까지 우리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물론 사람이 가볍게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우리는 대등한 입장으로 대했다면, 그녀에게는 분명 상하 관계를 보이는 모습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중앙 식품 김태원이라고 합니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젊은 그녀에게 거의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그런 모습을 보고 인사를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비슷한 수준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모습의 그녀의 매력…….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둘은 잠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곳의 호스트는 나나 지원재 실장이었다.
그 말은 곧 자리에 앉으시란 말을 나나 지원재가 했어야 했다는 의미다.
거기에 지원재 실장 혼자서 있었더라면 당연히 그가 그렇게 말했겠지만, 지금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있던 건 나였다.
“아!”
그녀가 먼저 씩 웃었다.
하지만 김태원 사장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어서 앉으시죠. 죄송합니다. 저도 여기 온 건 조금 돼서. 하하.”
어색한 분위기를 그래도 조금은 풀었으려나.
아니, 김태원 사장이 불편해하는 공기가 조금이나마 바뀌길 바랐다.
그런데 내가 걱정하던 일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가 김미연 부회장을 본다고 해서 곧바로 입을 열기 시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건 혹시라도 이번 사고가 실수라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확답을 받는 것.
그리고 아주 만약에라도 의도된 일이라면 우리 편의 구성원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겠냐마는, 왠지 이번 일 또한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걸 굳이 생각하기보다는 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김태원 사장의 태도는(나보다 어른에게 태도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부적절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전생과 현생에서 살아온 나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분명 투명하지 않았다.
“으음……. 으음……. 죄송합니다.”
정말 김미연 부회장과 김태원이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사람처럼 보였다.
뭔가가 있다면 그 뭔가의 근원은 어디일까.
뻔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을 해 주려나.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하네요. 사장님 같은 훌륭한 분의 뒷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뒷조사?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녀에게 연락을 한 것은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그 전까지 그녀는 은성 고등학교의 사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그런데 벌써 김태원 사장의 뒷조사를 했다고?
연락을 받자마자 이곳으로 출발했던 그녀다.
그럼 둘 중 하나겠지.
역시 한성 정보력! 아니면 블러핑(없는 패를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후자일 거라 생각했다.
뭔가를 알아보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녀 또한 일반적 범주의 사람은 아니었기에…….
“뒷조사라니요?”
김태원 사장은 뒷조사라는 단어에 약간은 흥분한 듯 보였다.
누구라도 그렇게 반응하겠지만, 뭔가 캥기는 것이 있으면 더 불안하리라.
그리고 그는 딱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인가 보네요. 저는 자세히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스스로 말씀하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오광필 교장 선생님과 유현덕 대표는 너그러운 분들이십니다. 개인적인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블러핑인가.
아님 정말로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인가.
나도 모르는데 김태원 이 사람이 어찌 판단하겠는가.
그의 얼굴에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막 극적이게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창백했던 얼굴이 이제는 붉게 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망설이다 힘겹게 꺼낸 말.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혹시 마음 바뀌실지 모르니 몇 가지만 먼저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내막을 전부 파악한 건 아니거든요.”
“무슨…….”
“최근 중앙 식품에 현금 흐름이 좋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 규모의 업체가 현금 흐름이 좋지 않으면 취할 수 있는 방안은 하나죠.”
대출…….
아귀가 맞아 간다.
그녀는 블러핑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와 이한일, 퓨처 금융투자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대략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어디서 대출을 받으셨는지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대출을 해 준 곳에서 이런 요구를 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조심스레 해 봅니다만, 뭐 단순한 금전적 문제로 예전처럼 좋은 질의 재료를 쓰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럴 수도, 이럴 수도 있는 문제.
하지만 대출을 어디에서 받았는지에 따라 충분히 전자의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여기까지 말씀드려도 모르겠다고 하실 건가요?”
“…….”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아니, 뭔가가 무너진 듯한 표정이었다.
얼굴에 맺히던 땀방울이 이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조금 돌려볼까.
“부회장님.”
“네?”
“그건 언제 다 알아보셨대요. 저도 몰랐는데.”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대고 ‘쉿’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바보 같은 분위기 전환이었나?
김태원 사장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디서 빌렸는지도 여기에서 말할까요?”
결정타가 되었을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정말 자신의 가슴팍으로 꺾여 들어가던 목이었다.
그의 표정, 60대가 넘은 듯 해 보이는, 그간 그가 겪은 고생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그의 얼굴에 좌절과 절망이 가득했다.
전생에 주변에서 많이 보아 왔던 얼굴.
어쩌면 내 얼굴도 남이 보기엔 저런 모습일 때가 있지 않았을까.
이건 더 심했다.
젊은이가 좌절에 빠지면 다시 일어설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참을 고민하고 난 뒤 그가 처음 입을 열고 꺼낸 건 이 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