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160화.
수업이 끝나고 막 교무실에 와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가 한 건 와 있었다.
이한일이었다.
이런 부재중 통화 문자를 보고 가슴이 철렁하거나 불안에 떠는 일은 없다.
아마 김승주 회장이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시간표를 확인해 수업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학교와 관계된 일이 아닌지라 안에서 통화를 할 필요도 없고, 눈치도 많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잘 설명을 해 둔 상태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며칠 전 축제 날 있었던 일도 있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그래도 이것만 해결되면 이쪽과는 연락할 일이 당분간 없겠지.
-유 대표님, 바쁘신데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를 골프채로 내려친 사람이 말은 참 배운 사람처럼 한다.
어쨌든 그가 이렇게 제도권 내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지 않을까.
존경스럽다기보다는 조금 무서운 부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람이 지금의 이한일이 되기 전에는 엄청 격한 환경에서 생존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완전히 자기 자신을 바꿨다는 점은…….
“아닙니다. 얼른 끝내야죠. 협의는 되셨습니까?”
-협의도 됐고 준비도 다 된 상황입니다. 전에 80% 정도라고 언급을 하셨죠?
그랬었다.
대주주끼리 지분을 넘기는 과정에서 시장가 그대로 받고 넘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어차피 대주주 중 누군가가 주식시장에 자신의 지분을 내다 팔고 있으면 주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걸 덮는 엄청난 호재가 있지 않는 한은.
그러니까 이 말은 곧 이미도 원장의 지분을 주식시장에 내다 팔 경우 현 시장가를 온전히 받지 못한다는 의미.
그리고 이건 곧 ‘보유 주식 수x시장가’가 당장 얻을 수 있는 현금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이한일에게 현 시장가의 80% 정도로 블록딜을 받는 조건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네. 동의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는 걸로 하시죠.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이쪽 조건을 그대로 받아 준다면 단서를 달겠지.
“어떤 조건 말씀이시죠.”
-현 맥스스쿨 이미도 원장이 S 아카데미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이죠.
아…….
“그건…….”
-S 아카데미라면 맥스스쿨의 잠재적 경쟁사인데 그쪽으로 들어가는 건 말이 되지 않죠. 거기에 맥스스쿨에서 얻은 자본까지 더해지면 서로 피곤할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건 논의를 조금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애초 계획이 그거였다.
주현필이 맡고 있는 신성 학원은 아직 그대로 있었기에 거기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미도 원장이 맥스스쿨을 넘겨주게 되면 그건 내가 벌인 일이기에 S 아카데미 쪽으로 보상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이미도 원장에게 이런 내 생각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사실 그렇게 하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그녀의 성격상 그냥 주는 걸 받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지만 이때 나는 내가 두 개의 실수를 한 번에 저질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역시 그렇게 하려고 하셨군요.
이한일은 그저 나를 떠본 것이었다.
조건을 단다 할지라도 S 아카데미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내 소관이다.
물론 지금 사실 지원재 실장이 모든 일을 다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떠 본 말에 내가 논의를 해 봐야 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계속 끌려 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냥 딜 문제만 확실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어차피 저희 쪽 일입니다. 저 때문에 제 것도 아닌 회사가 넘어가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뭔가를 해 드리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허허. 그렇게 속이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쨌든, 그 조건만 맞춰 주신다면 저희도 바로 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S 아카데미의 지원재 실장과 세부적인 안은 진행해도 되겠죠?
“그렇게 해 주시죠.”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저쪽은 이미도 원장이 사교육계에서 발을 떼지 않으리라 판단할 것이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나를 떠본 것이고.
뭔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사실 S 아카데미 외에도 이미도 원장이 자리를 맡아 줄 곳은 많았다.
신성 학원만 하더라도 S 아카데미의 노하우를 넘겨받고 현재 온라인 시장에 진출한 상황.
그리고 기존 맥스스쿨 본사 주변의 거대 학원들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경쟁에 뛰어든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무리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결국 긴 통화였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내 조건을 받아들인다’와 ‘S 아카데미는 이미도 원장을 채용하지 않는다’, 두 가지.
바람이 쌀쌀했다.
은성 고등학교.
어쩌면 치열한 사교육 시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난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즐긴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좋은 일도 많이 있었지만 좋지 않은 일도 계속 벌어졌다.
이한일이라…….
그는 과연 이번 일을 그의 말처럼 이쪽에서 제시한 대로 진행해 줄 것인가.
“유현덕 선생님!”
학교 일에 사업 일.
원래 두 가지 일을 다 잡으려면 안 된다고 했었나.
머리가 복잡한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무슨 생각을 그리 또 해? 가만 보면 혼자 모든 걱정 다 안고 사는 사람 같다니깐?”
모든 걱정 다 안고 사는 사람 맞지.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정말 왜 그렇게 사는 걸까.
“아니에요. 여기까진 무슨 일이셔요?”
“왜? 여기 오면 안 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기숙사에 애들 들어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아직 오전이었다.
기숙사장 밑에 사감 둘이 있었기에 사실 그녀가 여기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아이들 숙소 관련한 일은 학교 업무 시간에 처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 두었기에 오광필 할아버지를 볼 일도 없었고.
근데 그러다 보니 그녀의 처지가 조금 외로워 보이기는 했다.
내가 부탁해서 맡아 준 자리.
하지만 그녀가 이 일을 잘 해낼 거라 생각하거나, 또는 적합하다 생각해서 부탁했던 것은 아니었다.
멀리 두면 불안해서, 걱정이 돼서 주변에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맥스스쿨 때문에 그러지? 심각한 표정 보니깐 딱 그쪽 일이네.”
“에? 아니에요. 애들 대할 때 심각하죠, 저는.”
“아냐. 애들이랑 있을 때 표정은 편안해, 너무. 그런데 일 생각할 때면 딱 예전 유현덕 느낌이야.”
“예전 느낌이요?”
“응.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학교 들어오기 전까지 말이야.”
내 표정이 그리 달랐을까.
확실히 은성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마음이 한결 편했다.
물론 계속해서 일이 터지고 막고 할 때야 긴장되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교사로써의 일이 그렇게 위험하거나 긴장감의 연속인 일은 아니다.
“맥스스쿨 일 때문에 그렇지?”
곰곰이 과거를 되짚느라 대답하지 못한 나에게 김윤지가 계속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맥스스쿨 자체에는 큰 정은 없을 거고. 아무래도 이미도 원장이나 주현필 부원장님 때문이고?”
이 사람은 무슨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나.
어쨌든 정확히 짚었기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지 않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녀가 운동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너무 남 생각을 많이 해.”
남 생각?
나만큼이나 나 자신만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전생에서는 남 생각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지만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자의든 타의든 남 생각을 하면서, 조금 더 정확히는 남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만 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은데.
그런가?
“이미도 원장도 그렇고 주현필 원장님도 그렇고,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사람들일지도 몰라. 나도 마찬가지지. 외삼촌 아래에서 계속 불편한 일이나 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랬을까.
하긴, 그들의 삶에서 내가 없었으면 있었을 미래를 나는 알고 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미도 원장이 맥스스쿨을 운영하는 일은 없었겠지.
강재훈 원장은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어디까지 바뀔지 모른다.
그들의 삶이,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이 나의 달라진 선택들로 크게 바뀌었다.
앞으로도 바뀔 것이고.
“그러면…….”
“혼자 모든 짐 떠안고 살지 말라고. 다들 각자의 생각이 있고, 각자의 삶을 사는 거니깐.”
그녀의 말이 옳으리라.
다시 한 번 살고 있다는 것만 가지고 내 주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내가 다 신경 쓰고 캐어할 필요는 없다.
이건 무관심이 아니라 오만이다.
내가 더 나을 거라는, 나의 선택이 그들의 선택보다 우월할 거라는 오만.
“네가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돼. 어차피 위험해지리라 판단해서 이렇게 결정한 거라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면 다들 이해해 줄 테니까.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말이야. 그리고 너의 결정이 그들의 생각과 다르면 그렇다고 말을 할 거니깐,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너무 고민하지 마.”
“그래도…….”
“그리고 그냥 신경 꺼. 지원재 실장님이 잘해 주고 있잖아. 학교 일이나 집중해.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어차피 시작한 일이잖아. 오브라이언 대통령도 지금 네 모습 보면 괜히 이름 빌려줬다고 생각할 걸?”
아, 오브라이언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래도 명색이 이사장님이신데 말이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부탁을 해서 받아들인…….
물론 아주 심혈을 기울여 부탁한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는 나를 자신의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있으니.
그리고 생각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고.
“알면 혼나겠네요. 흐흐.”
“맞을지도 몰라. 어쨌든 학교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어. 애들 일도 있다며?”
“아, 그렇네요.”
아이들 일도 있었다.
담임이라고 맡은 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자신의 삶을 모두 쏟아부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교사도 사람이니.
하지만 분명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학교와는 너무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어. 그냥 지나가다 얼굴 보이기에 한 소리니깐 너무 마음에 두진 말고.”
고마웠다.
“알겠어요, 누나. 누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나저나?”
왜 이런 질문을 그녀에게 뜬금없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의식의 흐름이랄까.
만약 내가 살던 삶이 남을 의식하는 삶이었다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지금 그녀는 행복할까.
“나? 나야 내가 원해서 여기 들어와 있는 걸. 웃긴 거는 그걸 제안한 건 또 너란 거지. 너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해. 주변 사람들, 아니면 주변 상황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삶.
남이 보기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과, 나 스스로 원하는 삶은 다른 걸까.
“알겠습니다. 나이 차이도 엄청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꽤나 나이든 분처럼…… 헉.”
오랜만에 맞아 본 등짝 스매싱.
그녀의 손은 예전처럼 매서웠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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