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159화.
“그래서, 유 선생 말은 재준이가 피해자일 수도 있다고?”
“신고 내용이 명확하지가 않아서 가해자라고 찍어 두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안에서 의외로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이 정작 피해자인 경우도 많고요.”
“많은지 적은지는 어떻게 알아?”
아차.
학원에서는 굳이 학생 간의 다툼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광필 할아버지나 현생에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학교생활은 이게 처음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아, 말씀 잘못 드렸습니다. 많을 것 같다고요.”
“아무튼 이거 사고 나기 전에 신고 들어간 건 다행인 것일지도 몰라. 신고 내용에는 극단적인 건 없었지만, 혹시 또 모르니깐 상담 선생님께 그 반 전원 상담 진행하라고 했어.”
“감사합니다.”
일반적인 절차.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될까.
애초에 익명으로 교육청 홈페이지에 곧바로 신고를 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원한다는 의미일 텐데.
물론 가끔 누가 썼는지 드러나는 경우가 있긴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보통 윽박지르고 어르고를 반복하며 누군지를 먼저 파악한다.
그냥 학교에서 일을 덮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신고자가 누군지 명확해야 사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일 터지기 전에 잘 파악해 봐. 이것저것 정신없겠지만……. 맥스스쿨은?”
“그건 이한일 회장이 연락 준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면 될 일이죠.”
“조건이 만약 만족스럽지 못하면 어떡해?”
“그럼 조건을 맞춰야죠.”
“우리가?”
“아뇨. 그쪽이요.”
오광필 할아버지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넣었다.
“어휴. 이 나이에 나는 무슨 고생이냐.”
“그래도 교장 선생님께서 이 자리에 딱 앉아 계시니 엄청 든든합니다.”
“살이 빠지고 있어.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이런 걸로 살 빠지고 스트레스 받을 사람은 아니다.
그냥 하는 말일 뿐이지.
나는 그냥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다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할아버지는 지원만 잘 주시면 됩니다!’ 하는 의미를 담아서.
“뭘 쳐 웃어? 이런 상황에…….”
“죄송합니다. 흐흐.”
사실 학교에서 일한다고 하면 수업이 전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언론이나 감사 때도 허구한 날 떠드는 소리가 수업 개선.
심지어 사교육과 공교육을 비교하는 언론 기사는 매년 수십 개 이상씩 뜬다.
그래, 수업이 중요하지.
하지만 수업이 전부일까?
그럼 그 수업 잘한다는, 연봉 수십억씩 받는 강사들이 학교에 오면 외부에서 기대하는 것처럼 학생들의 학업 능력이 엄청 올라갈까?
수업을 전적으로 사교육에 맡기면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 일의 모든 것이 수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미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면서, 꼭 수업만 집어 공격하는 건 조금 치사한 것이 아닐까.
“학부모님들 연락은 따로 없으셨죠?”
“연락? 자네한테도 그런 거 없었잖아?”
“네.”
아무튼 일이 금방 파악되고 처리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건 천천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리면 언젠가 필요한 사건이 터지게 된다.
그게 심각한 수준이라면 큰일인 것이고, 별일 아니듯 나온다면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 동안은 일단 재준이의 현재 학교생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반 분위기를 세심히 살피는 수밖에 없고.
“일단 기다려 보죠. 재준이 상담은 제가 따로 진행하겠습니다. 물론 티 나면 안 되니깐 상담 선생님 상담은 같이 하고요.”
“그래. 뭐, 알아서 잘하겠지.”
“잘해 보겠습니다.”
교실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여느 학교나 마찬가지로 몇몇 아이들은 또래를 이루며 몰려다니고, 몇몇 소수의 아이들은 혼자서 할 일을 한다.
혼자 하는 일이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관계는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세상이 따로 있는 거니까.
재준이는 따로 노는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뭐 하고 있어?”
책상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에게 한 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이번 사건이 터지기 한참 전 일.
“네? 아, 그냥 밖에 보고 있었어요.”
“밖?”
창밖에 보이는 거라고는 경치 좋은 산뿐.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릴 테고, 그러면 경치가 조금 환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푸릇푸릇.
싱그러운 초록색을 두 눈으로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가서 한바탕 뛰어 놀다 오고 싶은 것이 심리 아닐까.
물론 심리는 사람마다 전부 다르다.
“책이라도 좀 보지?”
“공부 많이 합니다, 선생님.”
실제로 그의 성적은 상당히 상위권이었다.
은성 고등학교 같은 대안 학교는 입학생 전원이 입학 신청을 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성적도 의외로 괜찮은 학생들이 많았다.
일반 고등학교보다 학비는 약간 비싼 것이 일반적이지만, 재단이 튼튼하면 더 싼 경우도 많다.
여기가 바로 그런 경우.
남 말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 자랑이지.
약간 돈이 돌고 돌긴 했지만, 결국 내가 S 아카데미와 맥스스쿨로 번 돈을 가지고 만든 학교 아닌가.
“공부가 다가 아니잖아. 졸업하면 이런 학교 다녔었구나 하고 추억 같은 것도 생기고…….”
“추억이 뭐 중요한가요. 대학 잘 가서 취업 잘하는 것까지가 중요하죠.”
어른스러웠던 아이였다.
그렇기에 교육청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 더욱 의아했고.
지금도 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내가 복도 측 창문을 통해 교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냥 지나가다 슬쩍 본 건 아니었다.
내 수업이 있는 시간이라 조금 일찍 왔던 것뿐.
드르륵.
교실 문 여는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내가 겪었던 미래나 다 똑같았다.
“오늘 분위기는 평소보다 조금 조용한데?”
아마 모든 학생들이 차례로 상담실에 호출되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일단 수업부터 끝내고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요?”
“할 이야기?”
수업은 여느 일반 고등학교나 다를 바 없이 진행된다.
특색 있는 수업을 구성하는 건 어느 학교나 원하는 바지만, 의외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괜히 전국 대부분의 학교에서 문법 위주의 수업을 진행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하나 자신할 만한 부분은, 은성 고등학교는 대안 학교이기 때문에 수업 구성이 조금 자유롭다는 것.
그리고 그 자유를 각각의 선생님들이 무리하지 않을 수준으로 누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사해 오란 건 다 해 왔지?”
“네.”
아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는 건 조금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은 끝마쳐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학교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칫 학생들에게 어떤 하나의 사상을 강요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
좋아하는 선생님, 싫어하는 선생님의 정치 성향에 따라 사고방식이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민주당 공약, 그리고 공화당 공약 팀으로 나눠서 앉자.”
하지만 나는 강행해 보기로 했다.
국내 정치는 너무 예민한 부분이 있다 보니 미국의 그것을 조금 가져와서 말이다.
책상 끄는 소리가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아이들.
이런 토론 수업이 중학교 때까지 겪어 볼 일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어수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아이들은 ‘남의 생각을 주입’받는 식의 수업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의 수업에 적응했다.
“부모님과 연락할 때 이상한 말씀 드리면 안 된다. 선생님이 정치 이야기 한다는 둥…….”
“그건 맞는 말이잖아요? 흐흐.”
“맞는 말이지만 괜히 걱정하시니까. 아니면 하지 말고.”
“아니에요!”
재밌는 건, 나도 솔직히 이 수업을 준비하며 조금은 걱정했던 것이 아이들이 과연 의미를 잘 이해해 줄 것인가 부분이었는데, 의외로 나보다 더 흥미를 느껴 한다는 점이었다.
남의 이론을 듣고 외우는 데 익숙해져 있던 친구들이 이제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표현하며 남을 설득한다.
‘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까?
그동안 우리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미숙하고 부족한 존재로 규정하고 무시해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수업은 진행됐다.
사회는 내가, 그리고 미국 양 정당의 대선 공약집을 가지고 토론회를 진행하는 모의 대선 수업.
양측은 열을 올려 가며 안보와 인권, 성장과 복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발표했다.
사실 우리 정치나 미국 정치나 서로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 없다.
단지 한정된 자원을 바탕으로 어느 쪽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뿐.
‘네가 틀려!’라는 방식보다 ‘너도 맞는데 이것도 조금 고려할 필요가 있어!’라는 방식의 대화를 진행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조금 더 많아진다면 좋지 않을까.
그렇다고 정치인을 키우려는 목적은 아니다.
남의 주장에 대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따르거나, 또는 합리적으로 반박할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함이다.
정신없는 토론, 여기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의 성향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래도 성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만, 몇몇 아이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단지 소심해서, 또는 이런 방식이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자, 이제 슬슬 종 칠 시간이다. 양쪽에서는 이제까지 나온 논점들을 정리해서 가지고 오도록!”
고무적인 것은 그래도 교과서 해석하고 문법 설명해 주는 수업보다 이 수업에서 참여도가 높다는 것이다.
아, 표현을 조금 바꿔야겠다.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점이다.
“수업 끝내기 전에 한마디만 하자. 지금 상담 선생님께서 계속 너희들 순서대로 상담 진행하고 있는 것 다 알지?”
재준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공개적으로 이렇게 꺼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나, 필요할 때는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필요한 일이니까 하는 건데, 혹시 상담 선생님 말고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언제라도 와서 말하면 좋겠어. 이제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야.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기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시기고. 어른들은 너희들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 학교 선생님들이다. 같이 함께 살아가야 하니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대답하는 목소리들은 작았다.
뭔가 분명히 있긴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재준이가 누군가를 따돌리거나 괴롭힐 성격은 아니겠지.
하지만 오해가 있었거나, 또는 그 반대 상황일 수도 있다.
재준이가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
“그래도 우리 반 친구들은 어른스러워서 좋다! 직접 말하기 어려우면 SNS도 있으니깐 살짝 그리로 연락해도 되고! 자,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
“네?”
아직 종 치기까지 5분 정도 남았다.
“종 치기 전까지 마음껏 휴식을 취하도록!”
그래도 가끔씩 약간의 여유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내가 학교 다닐 때 그런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니.
그나저나 과연 누가, 언제쯤 연락을 줄까?
그런데 기다리는 연락보다 기다리지 않던 연락이 먼저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