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155화.
“어떻게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말할 수 있지?”
“뭘요?”
“아까 말이야. 그런 꼴 보이려고 같이 있겠다고 한 건가? 내가 그럴 필요 없다고, 알아서 한다고 했는데도?”
유미진은 아무 대답 없이 이한일을 노려보기만 했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된 일인데도 뭔가 기분이 영 찜찜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왠지 유현덕이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꾸만 분위기가 자신들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건 오늘 그와 처음 만난 이한일도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계획?
유현덕은 벌벌 떨며 이 자리에 끌려온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강재훈의 상태를 보고 난 뒤에는 아무리 강단 있는 사내라도 긴장하지 않을 리 없다.
강재훈을 본 유현덕이 긴장한 것까지는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그 뒤의 상황은 아주 약간씩 예정에서 벗어났다.
분명 결과는 의도대로 된 것과 같았는데 뭔가 찜찜했다.
“아니다. 됐어. 아무튼 다시는! 남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나를 넘어서려고 하지 마. 다시 그랬다간!”
“그랬다간요? 뭘 어떻게 할 건데요?”
“어휴. 당신을 데리고 온 내가 잘못이지.”
“당신도 제대로 한 것 없잖아요? 윽박지르는 것 하나 못 해 가지고…….”
“뭐!”
둘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조용히 해 달라고 찾아오거나 할 장소는 아니었다.
다만 밖에 있는 직원들이 듣는 건 별로 좋진 않을 거라 생각한 이한일은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맥스스쿨을 다시 되찾는 것에는 유미진과 이한일의 생각이 동일했다.
하지만 유미진은 원래부터 유현덕과 이미도에게 한 방 먹이고 되찾으려고 했고, 이한일은 그게 그리 쉽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찾은 절충안이 합법적인 선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것.
유현덕만이 대상으로 선정된 건 아니다.
강재훈은 이미 몇 시간 전 이곳으로 끌려와 자신들에게 원하는 것을 내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지분만으로는 맥스스쿨을 차지하기가 어렵다.
일단 이쪽에서 투자한 지분은 의결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관을 바꾸는 작업부터 진행해야 했다.
그러려면 현재 의결권이 있는 사람들이 나서 주는 수밖에 없고.
그 부분에서 강재훈과 유현덕의 지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약간의 저항을 예상했지만 윽박지름이 성공했던 것일까.
유현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했다.
거기에 현재 가장 큰 걸림돌인 이미도 원장을 설득하는 부분까지.
곧 맥스스쿨은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다.
이게 중요한 거라고 이한일은 생각했다.
“아무튼, 맥스스쿨 가져오는 것 까지는 해 주겠는데, 운영은 어떻게 할 셈이야?”
“운영은 전문가가 나서서 해 주면 되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업 손 댔다가 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혹여 유미진이 직접 운영하겠다고 했다면 이한일은 반대를 할 셈이었다.
이미 그 회사가 현재 이미도 원장에게 넘어간 것부터가 유미진이 제대로 운영을 못했기 때문이었으니.
아무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맥스스쿨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
이 사실이 중요했다.
그나저나 약간 꺼림칙한 부분이 또 머리에 떠올랐다.
갑작스런 김승주 회장의 등장으로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던 호기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옆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우산 꽂이가 하나 있고, 우산 몇 개와 골프채 여러 개가 정돈된 모습으로 꽂혀 있었다.
원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운동기구란 소중히 다뤄야 할 물건이겠지만, 여기 있는 골프채들은 사용하는 용도가 본래 용도와 달랐다.
손으로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좀 전에 휘둘렀던 그 골프채였다.
바로 뽑지 못한 건 그 상황에서 어떤 골프채를 사용할까 생각하고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분명 손잡이를 통해 전해져 온 묵직한 타격감은 그의 스윙이 나쁘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었다.
하지만 유현덕은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머리통을 날릴 생각은 아니었기에 마지막 순간에 살짝 몸을 비튼 것이 실수였을까?
어께에 약간 빗맞듯 맞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빗겨 나간 건 아니었다.
“으흠…….”
“왜요?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스윙도 젊을 때와 다른 건가요?”
방금 전의 작은 다툼으로 약간은 삐진 듯, 유미진이 말했다.
나이…….
나이가 들어서 자신이 착각한 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다른 무엇인가가 유현덕이란 사람에게 더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아예 내색도 하지 않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요? 둘 다 제대로 때리지도 못했나 보죠, 뭐.”
“그래. 그랬을 수도 있고.”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어차피 조만간 얼굴 볼 사이니, 원하는 것만 얻어낸 뒤에는 어떻게 처리하든 관계없을 것이다.
김승주 회장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 또한 자신의 일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한성 그룹의 회장 앞에서도 허리를 깊이 숙이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바로 퓨처 금융투자 회장이었다.
“한영이한테 연락 온 거는 없었지?”
“바쁜가 봐요. 오늘 일에도 찬성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고요.”
“알겠어. 그래도 적당히 맞춰 줘야지. 내일 보고 올 테니 당신은 이쪽 사무실에 나와 있어. 누군가는 사무실을 지켜야 할 테니까.”
오늘 이야기를 전부 듣는다면 곽한영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이한일이었다.
그는 확실히 유현덕이란 남자에게 부정적인 면보다도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오늘 일로 인해 이한일도 유현덕에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
“이거 미안합니다. 자꾸 이런 일에…….”
얼굴이 팅팅 부은 상태로 나를 보자마자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는 강재훈이었다.
하지만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서 불쌍하게 된 사람은 강재훈 본인뿐일 테니.
물론 일이 복잡하게 꼬인 건 사실이지만, 이 모든 일은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셔요. 실장님, 어떤 상태라고 하십니까?”
괜히 불편해 하는 강재훈에게 직접 물어보면 좀 그럴 것 같아 병원에 올 때부터 계속 같이 있던 지원재 실장에게 물었다.
그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톤으로 “타박상만 좀 있고 뼈는 다 멀쩡하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뭐야? 이 사람은 무슨 로봇이야?”
“네? 아닙니다, 회장님. 지원재 실장이라고…….”
“지원재? 어디서 들어본……. 아! 강재훈 배신한!”
김승주 회장 정도라면 딸인 김미연 부회장이 우리와 함께 일을 하면서부터 우리 주변의 일들을 속속들이 조사해 두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대부분의 전후 사정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것이, 보통은 비서진이 따라다니면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고 오너는 큰 그림만 그려 준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드라마의 영향이려나.
하긴 자기 자신이 그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 거대한 기업 연합을 뜻대로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미안합니다. 허허. 이거 초면에 실례를 했네.”
곧바로 ‘배신’이란 단어의 어감이 너무 강했다고 생각했는지 사과까지 한다.
그 모습을 보던 지원재 실장과 강재훈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살짝 지었지만, 순식간에 그 모습은 사라졌다.
사업적인 부분에서 내 모든 일을 대신해 주고 있는 지원재는 김승주 회장을 만난 일이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기업 회장 만나기가 쉬운 일인 줄 아는가?
몇 겹으로 둘러싼 경호원들을 거치며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지원재 또한 오늘이 그를 처음 보는 날이었다.
“참, 소개를 아직 안 해 드렸네요. 이쪽은 김승주 회장님이십니다. 김미연 부회장님 아버님…….”
“헉…….”
지원재가 이런 반응도 보일 줄 알았던 사람인가?
나 또한 그가 로봇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일에 철두철미하고 감정에 큰 동요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런 그가 이런 아마추어 같은 반응을 하다니…….
“아, 처음 뵙겠습니다. 강재훈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강재훈과 김승주 회장의 나이는 아마 비슷할 것 같았다.
딸들이 이미 다 큰 상태이니.
오히려 강재훈이 조금 더 많으려나?
김미연 부회장보다는 이미도 원장이 조금 나이가 많으니 말이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맥스스쿨을 세우고 성장시키신 분이시죠. 대단하십니다.”
아, 이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맥스스쿨과 관련해서는 아직 약간의 미안함이 남아 있는데.
하지만 강재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허허. 그건 이미 예전 일입니다. 지금은 여기 유 대표와 지 실장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걸요.”
“아……. 몸 일으키지 마십쇼. 나이도 있으신데. 아무튼 험한 일을 당하셔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딱 얼굴만 집중적으로 때리더군요. 허허, 보통 이런 건 상처가 안 보이게 몸을 때리는 거 아닌지……. 그래도 그 사람에게 이런 일을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서, 별로 상관없습니다.”
처음이 아니라는 말.
왠지 알 것 같았다.
맥스스쿨의 지분 구조를 보면 퓨처 금융투자가 비상식적으로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대부업체의 도움을 받는 건 초창기뿐이고,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자금을 회수하기 마련인데.
맥스스쿨은 계속해서 퓨처 금융투자의 지분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아니, 유지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발을 못 빼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지.
유미진이 현재는 그쪽에 붙은 상태고.
아마 강재훈과 이한일, 두 사람 사이에도 어떤 과거가 있지 않았을까?
이미도 원장의 모친 이야기도 대략적으로 들었던 만큼, 상당히 복잡하게 얽인 실타래 같은 관계.
“여자 문제는 항상 복잡하죠.”
응? 방금 말을 한 건 김승주 회장이었다.
그런데 ‘여자 문제’?
역시나 내 예상과 같은 것이려나?
내가 봐 온 강재훈이란 사람의 성격상 딸을 버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도 원장의 나이가 강민호의 나이보다 많았으니 아마 그가 유미진을 만나기 전 이미도 원장의 모친과 먼저 만났을 것이고.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아들도 잃었고요.”
갑자기 어두운 내용으로 대화가 흐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굳이 내 일도 아니고, 내가 관계된 일도 아닌지라 굳이 내가 불편해할 것은 없지만, 사람이란 것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비극이죠. 어쨌든 이 일이 잘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이제 유 대표가 나섰으니 강재훈 원장께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은 유 대표가 알아서 당하겠죠. 허허.”
헐.
설마 했는데 정말로 오광필 할아버지와 닮았다.
김승주 회장이나 오광필 할아버지에 비하면 강재훈 원장은 상당히 신사의 모습을 잃지 않았구나.
말을 끝마치고 능글맞게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는 눈빛까지도…….
“그나저나 나랑은 관계없겠지만, 어떻게 하려고 그런 약속을 한 거야?”
“약속이요?”
‘약속’이란 단어에 지원재 실장이 먼저 반응했다.
사업에서의 약속은 구두 약속이라 할지라도 상당히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냥 학교에서 애들끼리, 또는 친구들끼리 하는 약속과는 다르다.
그리고 나는 약속을 한 적은 없다.
물론 내 입 밖으로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생각도 없지만…….
“아, 그거요? 음……. 말씀드릴 수는 있지만, 하나만 확인하고요. 회장님께서는 제 편이시죠?”
“이 사람이……. 내가 직접 움직였어. 그거 보면 모르겠어? 나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사람 아냐!”
그렇겠지.
솔직히 그가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딸의 부탁이겠거니 싶기도 했으나, 재벌들의 부녀지간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까.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뭉쳐 있는 모든 결정들.
그는 어떤 계산을 하고 내 편에 서기로 했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답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은 나도 그의 경험이 필요했다.
내 판단에 대한 그의 경험에 따른 답.
“맥스스쿨을 통째로 넘길 생각입니다. 아, 물론 제값을 받고요.”
옆에서 우리 대화를 유심히 듣던 얼굴 퉁퉁 부은 강재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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