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153화.
“아…….”
“빨리 원장님부터 병원으로 모시고 가 주세요.”
나는 일단 강재훈을 빨리 이곳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이한일이 막으면 혹 물리적 충돌이 김승주 회장과 그 사이에 발생할까 걱정이 되긴 했으나, 특별히 그런 움직임은 없었다.
“자넨 괜찮나?”
나름 몇 번 얼굴을 본 사이라 이젠 완전히 편하게 부르는 김승주 회장.
방금 맞았던 곳들을 손으로 꾹꾹 눌러 보았지만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으니.
아무튼 이제 판은 엎어졌다.
아마 오광필 할아버지가 이사회를 소집하고 김미연 부회장에게 지금 상황을 알렸을 것이다.
한성 그룹 사람들이 먼저 올 줄은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회장 본인이 움직일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네. 멀쩡합니다.”
“다행이구만. 무슨 이런 일에 자꾸 휘말리고 그러나, 자네는. 아무튼, 이한일 회장, 유 대표도 데려가겠소.”
똥 씹은 표정의 이한일 얼굴을 보게 되려나 싶었다.
솔직히 이들 둘의 관계, 한성 그룹과 퓨처 금융투자의 관계가 어떤지는 몰랐으니.
그래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중 하나인데 어디 작은 금투사에서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회장님, 유 대표는 저와 대화중이었습니다만. 오랜만에 뵙는데 이렇게 남의 사업에 끼어드는 건 좋지 않습니다.”
뭐라고?
다시 김승주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역정을 낼 줄 알았으나, 이쪽도 의외로 차분했다.
아니, 차분한 것이 아니라 조심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허허. 이렇게 과격한 상황은 만들지 말자는 거네. 이야기는 차분하게 해도 되지 않겠나.”
“차분하게 하고 있었습니다만…….”
“방금 우리가 데려간 사람 상태를 좀 보게. 차분하긴 뭘 차분하게 해.”
이한일이 한숨을 쉬었다.
뭔가를 작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승주 회장은 그의 그런 모습을 오히려 초조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았고.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니.
“그걸 꺼내겠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죠. 사실 제 목숨값 아닙니까. 그거라면 회장님도 물러나 주시겠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이 두 사람이…….
“으흠…….”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김승주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는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밀지 못했다는 건 그도 고민을 한다는 증거였다.
도대체 대기업 회장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두렵다고 표현하는 것이 조금 부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불편해하는 것일까.
이한일은 차분히 다음 상황을 기다리는 듯했다.
유미진은?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애초부터 여기에 왜 그녀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단순히 얼굴만 보러 온 것은 아닐 텐데.
정말로 맥스스쿨을 그녀가 다시 운영하려고 하는 것인가.
“알겠네. 하지만 대화는 나도 같이 껴서 하도록 하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그것만 하더라도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겠지.
일단 죽을 위험은 사라질 테니 말이다.
“같이 하실 부분은 별로 없는데요. 뭐, 사실 이야기는 이제 시작하긴 했지만 긴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회장님 계신 자리에서 보증을 받는 것도 괜찮겠죠.”
그리고 그의 말에 이한일 쪽 남자들과 김승주 회장이 데리고 온 경호원들 사이에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그냥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그들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고.
나중에 지금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얼마나 멍청해 보일까 싶었지만, 사실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런 상태였다.
“이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서서 들으시겠습니까?”
“골프채는 좀 내려놓고 이야기하지.”
그러고 보니 그가 아직 골프채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자신도 몰랐던 것처럼 ‘아차’하는 표정을 지은 그는 바로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골프채를 건넸고, 그는 바로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았다.
김승주 회장이 자리에 앉고, 이한일과 유미진이 차례로 앉았다.
좀 뜬금없는 전개이긴 했다.
방금 전 피떡이 되어 끌려온 강재훈의 모습, 그리고 얻어맞은 나였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약간 분위기가 소강상태가 되자 이한일이 다시 나를 흥미로운 듯 바라봤다.
“혹시 빗맞은 건가?”
맞기는 분명 맞았다.
아프지 않았다는 거지 아예 맞는 느낌이 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탁자 아래로 가려져 있는 손으로 무릎을 꼬집었다.
‘통증은 있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가? 유 대표도 맞았어? 이한일, 이 사람 참…….”
“이건 때렸다고 표현하면 안 되죠. 그냥 손만 잠시 댔을 뿐입니다.”
손만 잠시 대다니.
나에게 손을 댄 건 이한일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골프채를 휘둘렀지.
“괜찮은 거야?”
“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쪽까지는 어떻게…….”
“미연이에게 연락 받고선 바로 달려왔지. 마침 이 주변이었거든.”
“자자,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그럼 회장님도 어차피 이 자리에 함께하신 만큼 보증을 좀 서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증이라니?”
“유 대표의 결정에 대한 보증이죠.”
아직 결정을 내린다고 한 적이 없다.
내가 거절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걸까?
아까라면 어떻게 할지 몰랐다.
강재훈의 상처 입은 얼굴을 보고선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다르지 않은가?
김승주 회장이 나를 쳐다봤다.
“무슨 결정?”
맥스스쿨을 넘기라는 결정.
내가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도 원장이 있고, 주현필이 있다.
지금 이한일이 바라는 것은 퓨처 금융투자의 지분과 내 지분을 합쳐 운영진을 바꾸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긴 할까.
숫자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굳이 필요한지도 의문이 들긴 했고.
“맥스스쿨의 운영진 교체죠.”
“응?”
김승주 회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아무리 맥스스쿨이 온라인 교육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회사라고는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가 거느리는 수많은 회사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일로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는 것이 의외였으리라.
둘 사이에 어떤 과거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거 가지고 이런 거야? 그거 그냥 줘. 유 대표가 주기 싫대?”
뭐?
“그냥 운영이잖아? 지분을 뺏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한일 회장, 겨우 이거 가지고 우리 쪽 사람을 이렇게 험하게 데려간 거야?”
도대체 이 사람,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맥스스쿨은 현재 이미도 원장 체제 하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그 운영권을 넘기라니.
나는 당황스런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승주 회장은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뭐지?
“역시 회장님이시군요. 현명하신…….”
“아니, 나는 그냥 유 대표 입장에서 이게 나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걸세. 이한일 회장, 당신 정도면 사리 분별 되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러나?”
“뭐라고요?”
이한일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리고 여유 있는 김승주의 얼굴에서 나도 머릿속에 뭔가 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나쁠 것이 없다’라.
“일단 강재훈 원장님께는 따로 사과하세요. 보상도 충분히 해 주시고요.”
“응?”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한 사과를 하시라고요!”
갑작스런 나의 태도 변화에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놀란 듯 보였다.
이제까지 묻는 말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어색했고.
하지만 김승주 회장의 의도가 뭔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그렇게 한 것이었다.
회사 하나를 일으키는 건 괜찮은 능력과 운 때만 맞아떨어진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왜 사람들은 못 해서 난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 쉬운 것이지 막상 능력을 갖추는 데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고, 아무리 해도 필요한 위치까지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거기에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그건 정말 하늘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일이고.
어쨌든, 범인은 가지기 어려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성공을 했다손 치자.
그렇게 성공시킨 회사를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개, 또는 수십 개의 회사를 동시에 운영하고 관리하는 능력은 또 다시 별개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재벌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그런 능력과 운을 인정해 줄 필요는 있다.
인정을 해야 나도 그 위치에 올라가거나, 또는 도전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지.
김승주 회장은 그런 면에 있어서 달인이었다.
동네 문구점부터 시작해서 군사 정권 시대가 온 뒤 화약 공장을 세우고, 별로 깨끗한 방법은 아니지만 온갖 어둠의 줄을 잡고 만들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사람.
그리고 현재는 수십 개의 계열사들을 거느린 대기업 회장이었다.
그런 그가 맥스스쿨, 어찌 보면 나나 이미도 원장에게 거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넘겨주라고 하고 있다.
“그 부분이 정리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협상 못 합니다. 우격다짐해 보시려면 해 보세요. 결국 여기 고용된 저 사람들도 돈으로 고용된 것일 테니 돈 싸움이라고 본다면 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허…….”
예상대로 나의 당돌한 반격에 이한일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방금 전 김승주 회장의 말에 표정이 잠시 구겨졌던 그는 이제 아예 그런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겉으로 씌워져 있던 그의 교양 있는 듯한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아뇨. 협상을 하려면 제대로 해 보자는 겁니다. 저도 회장님과 그런 식으로 싸워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진정들 하게나. 이거 젊은 사람들끼리 너무 흥분하고 그래? 이 회장, 자네가 인생 선배니 조금 진정해.”
만약 그가 끊지 않았더라면 사태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좋지 않게 될 수도 있었으리라.
든든한 빽이 이 자리에 같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계속 맞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빽이 왔으면 써먹어야 한다.
“하아. 진짜. 회장님, 회장님 편 꼬맹이 교육 좀 시키셔야 하겠는데요?”
“많이 배워야지 앞으로. 허허. 살살 해, 그러니깐. 자네가 저 나이 때 생각을 해 봐. 그러고 보니 그 때 자네 모습과 유 대표 모습이 조금 비슷한 면도…….”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훨씬 더 나았죠.”
“그래, 그래. 그렇다고 하자고. 허허. 유 대표. 맥스 그냥 줘 버려. 여기 이 회장은 자네가 경쟁할 상대가 아냐.”
경쟁.
정말로 김승주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아직 해보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사실 나도 걸리는 점이 있긴 했다.
돈 문제?
아니, 돈 문제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면 될 일이겠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내가 이 문제로 지금의 나의 본분을 잃게 될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생애에서는 교사 유현덕이 아니라 사업가 유현덕인데.
그의 의중은 둘 중 하나이리라.
정말로 내가 이한일과 싸운다면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었다.
제발 후자이기를.
김승주 회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거절할 수 있으랴.
그래도 아마 그는 이한일 편이라기보다는 내 편일 거라 생각했다.
김미연 부회장과 알게 된 지도 이제 꽤 긴 시간이 흘렀고.
그럼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최선이겠지.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시간은 주시겠죠?”
과연 김승주 회장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이한일은 나를 잠시 쳐다봤다.
내 뺨과 어께 쪽을 유심히.
“시간은 주지만 지금 맥스스쿨 운영진에게 언질을 주면 안 됩니다. 아깐 잠시 흥분을 해서 말을 조금 막 했네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나요?”
지가 휘둘러놓고 이제와서 괜찮냐니…….
“네. 멀쩡합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며 어께를 빙빙 돌렸다.
아까의 상황을 보지 못한 김승주 회장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내 행동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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