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147화.
“자, 다시 시작한다. 여기 나오는 건 문장이 아니라 다른 역할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부분이야. ‘보다’라는 동작이 있을 때,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 하는 동작 자체를 볼 수도 있겠지?”
대안 학교나 보통 학교나 학교 수업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교과 과정은 학교의 건학 이념이나 운영 방식이 다르다고 해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은성 고등학교 교육 과정은 보통 학교에서 보기 힘든 것이기는 했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체육 수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여기에 특별할 것은 없다.
매일 한 시간 동안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저런 체육 활동을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체육은 체육이다.
특이한 부분은 그 다음부터.
체육 수업이 끝난 뒤, 아침 식사 시간이 있고(기숙형 학교라 그렇다) 곧바로 각 반에서는 일과가 시작된다.
오전 중에는 수학, 과학, 영어, 국어의 일반 교과목들.
오후에는 철학, 인문, 디자인, 대중음악, 켈리그라피 등의 다른 학교에서 보기 어려운 과목들이 진행된다.
학생들은 정해진 수업 시간표를 매일 매일 확인하며 원하는 수업을 하나씩 택하여 들을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게 학생들에게 상당히 파격적인 자율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업에 들어가지 않으면 벌점이 계속 누적되고, 일정 수준 이상 벌점이 쌓이면 학교에서 자퇴 처리까지 요구할 수 있다.
양날의 검과 같은 이 제도를 생각해 낸 건 내가 아니라 오광필 할아버지였다.
“이거 이렇게 하시면 너무 중구난방인 수업 형태가 되지 않을까요? 어떤 학생은 일주일에 인문을 최대 다섯 번을 듣는데 다른 학생은 한 번도 듣지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애들이 듣고 싶은 거 찾아 들으면 덜 잘 것 아냐?”
학원가도 이게 최근에 꽤나 문제되는 일이었다.
해가 지날수록 수업 시간에 엎어져 자는 학생들의 수가 증가했다.
나 어릴 때만 하더라도 피곤하면 졸기는 했지만 아예 엎어져 잔적은 거의 없었는데.
그렇게 자기 싫어서 자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랬다가는 엄청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
한두 명이 자는 건 봐줄 수 있다지만, 절반 정도가 잠에 빠지면 나머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피해가 간다.
어쨌든 고등학교 교육 과정이 자신의 삶에 필요하다는 생각도 못 느끼고, 재미도 못 느끼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그 부분을 본다면 오광필 할아버지의 생각도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학생들이 수업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것보다도 수업을 준비하는 교사들이 시차별로 수업 구성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선생님들이 수업 준비는 어떻게 하고요?”
“과목 개수가 충분하니 1학기는 체험형으로 하자고. 2학기 부터는 무슨 농사짓자며?”
농사.
이건 교육학에도 나오는 개념이었다.
근데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
아무튼 벌점을 남발해 봐야 학생들 입장에서 벌점은 처벌로 느끼질 못한다.
차라리 몸이 조금 힘든 편이 낫고, 어차피 체벌은 피하려고 하니 학교 주변에 텃밭을 반별로 몇 개 만들어서 운영하자는 제안.
잘하면 텃밭에 들어갈 일이 없기에 반별로 특별히 문제가 없는 반일수록 텃밭은 텅텅 비어 있게 되지.
대신 몸이 피곤할 일은 없다.
텃밭의 채소는 저절로 자라지 않고, 채소를 키우고 싶다면 혼이 날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
또는 이런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씨 다 뿌려 놓고 갑자기 생활 태도가 좋아져서 채소들이 자라지 않고 죽어 버리……..
과연 이 실험이 아이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까.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하여간 특이하단 말이야. 이거 나도 얼마 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긴 한 건데, 이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어.”
“교육학 공부하실 때 나왔을 겁니다. 얼마 전이 아니라 한참 전이죠.”
“이 녀석아!”
개교 직후 거대한 사건 하나가 터졌을 때만 하더라도 과연 학교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다.
전생의 기억은 이미 시스템화 된 학교에 하나의 부속품으로서 들어가 일을 배우고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이니깐.
새로운 학교에서 시작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우리의 일상은 다시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은근히 잘 버티는데?”
“그러게요. 이렇게 대놓고 나올 줄은 몰랐네요. 고작해 봐야 조금 고생하고 넘어가겠거니 했는데.”
곽한영과 이한일, 그리고 유미진은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각자 너무나도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모이는 건 얼핏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정치와 경제, 그리고 그들 뒤의 모사꾼은 역사적으로 항상 나란히 존재했다.
경제 권력 없는 정치권력은 기반이 부실할 수밖에 없고, 정치권력 없는 경제 권력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거기에 모사꾼은 이들 둘 사이를 조절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유현덕에게 한 번 크게 당한 유미진을 모사꾼이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공부를 잘하거나 일을 잘하는 방식으로 뛰어난 것이 아니라 이간질과 협잡의 귀재였다.
“그나저나 의원님께서도 유현덕에게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허허. 저도 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저야말로 제수씨께서 복수를 하고 싶단 사람이 그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세상 참 좁군요.”
“한일 씨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아들 죽인 사람이니까요.”
아들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에 항상 몇 겹의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그녀도 스며 나오는 어두운 기운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나머지 두 사람, 곽한영과 이한일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몇 번 봤기에 익숙했다.
“조금 약하지 않나, 그래도? 이걸로 끝내려고?”
퓨처 금융투자 회장 이한일.
그는 과거 조직 폭력 세계에서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라온 자였다.
다부진 몸에 날카로운 눈매는 40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과거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반면 곽한영은 이한일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호감 가는 얼굴이었다.
물론 정치계가 인기나 호감만 가지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기에 외모 이면에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소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외모라고 해야 할까.
“더 나가면 어떻게 하려고? 언론까지 움직였는데도 나름 잘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앞에 있는 유미진의 표정을 살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곽한영은 유현덕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입장이 된 것 같아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나이에 이 정도 위치까지 스스로 올라온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기자 회견장에서도 나름 스타성을 보여 주었고.
“뱀 같은 사람이에요. 착한 것 같지만 속은…….”
“맞아. 나는 이해하지. 그런데 일단은 해 볼 만한건 해 봤다고 해야지, 뭐. 학교를 직접 더 건드릴 수는 없잖아? 학원이면 몰라도.”
“그리고 문제가, 신성 학원과 S 아카데미 모두 조규만 의원 때 세무 조사까지 받았어요. 결과는 깔끔했고.”
곽한영도 세무 조사나 다른 방식으로 S 아카데미를 압박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알아보던 와중에 바로 몇 년 전 조규만 의원도 똑같은 방식으로 세무서를 통해 진행을 한 적이 있었고, 결과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사람이 항상 큰 길만 가겠는가.
하지만 유현덕은 그렇게 해 왔던 것 같고, 신기하리만치 그의 선택이 어긋난 적은 없었다.
유미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맥스스쿨이 넘어갈 당시 유현덕을 몇 번 봤기에 잘 알 수 있었다.
사람 자체가 치밀하거나 계획적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중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적을 궁지로 몰아넣는 건 아주 능숙했다.
하지만 이쪽은 국회의원, 금융 사업가가 있다.
지는 싸움은 없을 것이다.
관건은 얼마나 크게 이기느냐.
한 번의 공격은 큰 피해 없이 넘어갔다.
그럼 두 번, 세 번은 어떨까.
“그럼 방법은 없단 말씀이신가요?”
“음…….”
곽한영은 하나 생각을 해 둔 것이 있긴 했다.
아직 유현덕을 적으로 아주 돌릴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머릿속에만 가지고 있던 생각.
하지만 이것조차도 유현덕이 S 아카데미에서 손을 뗀 상황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는 몰랐다.
“국감이 있긴 하죠. 그런데 S 아카데미 대표직도 내려온 상황이라 국감장에 유현덕을 소환하는 건 조금 어렵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해서. 한일아, 네 생각은 어떠냐?”
“나라고 별 수 있겠어? 맥스스쿨에서도 손 뗀 상황이고. 사실 맥스스쿨을 흔든다고 하더라도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얻을 것이 너무 없어.”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돈은 많지만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모은 돈이 아니기에 공격할 구실이 없다.
거기에다 지금 현재는 사업에서도 손을 뗀 상태로 웬 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들어가 있다.
설마 자신과 껄끄러운 상황이 될까 봐 그가 이런 구도를 의도적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잠시 들었지만, 사실 은성 고등학교 이사장직에 오브라이언이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애초부터 자신과 그는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라오도록 만들어 준 이한일과, 그의 여자로 앉아 있는 유미진.
그녀와 유현덕의 악연으로 인해 자신도 깊던 얕던 상황에 빠져들어 버렸다.
“일단 뭐 더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알아서 무너지거나 흔들리기를 기대하는 것이…….”
“뭐, 어쩔 수 없겠네요. 아무튼 주의는 계속해 주세요.”
“너무 명령조로 말하지는 마.”
“명령이라뇨! 부탁이지.”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찌 보면 유미진의 말에 의미가 있는 부분도 있었다.
곽한영 자신의 편에 설 자가 아니라면 애초부터 무너뜨려 놓는 것이 옳다.
다시 한 번 만나 볼까 싶기도 했으나, 이미 지난 번 만남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왔던 기억이 그를 막았다.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한 번 고민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일이, 너야말로 맥스스쿨 잡는 건 잘 진행되고 있어?”
“그거? 그건 기다려 봐. 나도 모르지. 어떻게든 다시 뺏어 올 거니깐 걱정하지 말고 있어. 네 역할이나 제대로 해 주면 되.”
유미진의 전 남편, 강재훈의 맥스스쿨은 이제 없다.
남편이란 작자는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고.
퓨처 금융투자는 맥스스쿨의 시작부터 함께 한 투자사였다.
이한일은 강재훈과 유미진이 부부 사이였을 때도 주변에서 맴돌며 그들의 관계에 관여했다.
그리고 이제는 유미진이 맥스스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유현덕도 같이 걸려들면 좋겠고요. 호호.”
욕심도 많은 여자.
하지만 곽한영이 지금 자리에 오는 건 이한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자신이 국회에 입성하여 여당 중심부까지 스스로 올라간 만큼 이번 일도 뭔가 아이디어를 짜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한일이 지금 손을 뗀다면 금전적 지원 없는 의원 신세.
한참 날아오르는 상황에서 날개가 꺾이겠지.
“알겠습니다. 생각 좀 해 보죠.”
“좋아. 그럼 이걸로 된 거지?”
“어. 맥스스쿨 건 시작되면 연락 먼저 주고. 너무 급하게 진행하진 마. 이목이 집중돼서 좋을 건 없으니깐.”
“걱정 마시게.”
셋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성원이 구성원인지라 의원실에서 만나기 부담스러워 여의도 인근 사무실 한 곳에서 만났던 것이었다.
악수를 서로 나누고 나오면서 곽한영은 몇 달 전 만났던 유현덕의 모습을 생각했다.
‘아직 하룻강아지인데, 어디까지 클지 감도 잡히질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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