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146화.
“그럼 이번 일도 그 두 명이 만든 건가요?”
“네. 주 기자님의 소스는 그쪽이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정보 제공에 대한 조건으로 자기는 정정 기사를 내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인가.
국회의 떠오르는 스타 의원과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금융투자사의 회장이라면 기자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만약 그들이 나에게 직접 연락을 해 와 뭔가를 요구했다면…….
그런데 딱히 나한테 요구할 일은 없지.
이 기사로 인해 그들이 얻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했는지 이해되지가 않았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
나는 그들이 신경 쓸 만한 존재는 아니다.
한성 그룹 김미연 부회장?
아니면 김승주 회장에게 압박을 가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은성 고등학교와 한성 그룹의 관계는 딱 이사회 두 자리 빼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오늘 전까지는 언론에서도 그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이미 여러 학교에 직접 기부를 하는 그룹인데 학교 하나가 추가됐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겠지.
혹시 오브라이언?
“정정 기사는 양보하기 조금 어렵습니다. 저에 관한 기사였다면 상관없을지도 모르는데 이건 애들에 관한 문제잖아요. 제가 직접 통화해 봐도 될까요?”
“이따 번호 드릴게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이건 사실 유현덕 선생님께 조금 미안한 소리이기도 한데 주 기자님께 연락이 온 직후 아버지께서도 연락을 주셨어요.”
“김승주 회장님이요?”
“네. 살살 하라고 하시더군요. 이 정도면 기자들에 대해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됐을 것이고, 곽한영 의원과 이한일 회장에게도 이쪽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 표명은 된 거라고요. 제 생각도 같아요. 법적 조치를 거론한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정말로 그걸 진행하는 건 다른 문제에요.”
“법적으로는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학교와 관계없이 제가 진행할 것이고요.”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는 수진이의 아버지인 이강재도 있었다.
사실 그는 본인 차를 끌고 왔기에 기자 회견이 끝나고 다시 자신의 차로 가면 될 것이었지만, 기자 회견이 어수선하게 끝났기에 여기까지 들어와 있었다.
김승주 회장까지 나선 상황이라면 내가 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이강재 변호사라면 다르겠지.
그는 이번 일의 직접적인 관계자다.
“변호사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김미연 부회장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 사람도 결국 가진 자라는 건가.
‘무시’는 아니지만 나와 대화할 때보다 훨씬 ‘단호’했다.
“그럼…….”
“학교 차원에서 나설 수 있는 부분은 제가 생각할 때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물론 상황에 따라 이강재 변호사님을 지원해 드릴 순 있겠지만요.”
단호하지만 사실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만든 건데, 만약 이 일이 더 커진다면 나나 오광필 할아버지는 학교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지겠지.
하지만 이것도 교육이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학생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교육.
“아버님, 저희가 많이 지원하겠습니다. 생각하신 것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어떻게 지원하시겠단 건데요?”
서운한 목소리.
“학생 보호를 위한 일은 제 사비를 들여서라도 금전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외부 압박이 들어올 경우에는 그만둘 각오하고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법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시겠다고 하신다면요.”
“법은 내가 전문입니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도 김미연 부회장님과 약간은 일치하는 것이, 만약 정치권력이나 경제 권력이 이번 일에 관여되어 있다면 안전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죽을 뻔도 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거기에 조규만 의원 때를 생각해 보면 김윤지도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을 만한 일도 있었고.
단순한 사건, 단순한 기자의 기사이기를 바라는 건 내 희망이었을까.
결국 이번 일도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김윤지나 오광필 할아버지가 전날 밤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 주변에는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진다.
그렇기에 놔둘 수는 없었다.
이강재 변호사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하되, 경호원도 한두 명 붙여 주고 할 생각이다.
그걸로 충분하진 않겠지만, 일단 법은 그의 영역이다.
“혹시 제가 경호원을 몇 고용할 수 있을까요, 부회장님?”
“경호원이요?”
“네. 학부모님 경호, 그리고 학교에도 몇 명 있으면 좋을 것 같네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학교는 저희 부담으로 하죠. 학부모님은 유 대표님 부담으로.”
“경호까지 필요합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죠. 저도 몇 번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부회장님, 그러면 일단 주광진 기자님 정정 보도는 그렇게 하시라고 해 주세요. 법적 조치는 학교 차원에서는 하지 않겠다고 전해 주시고요.”
어떻게 싸워야 할까.
근데 싸울 실체는 드러났는데 팔이 닿지를 않는다.
이럴 때는 그냥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항상 고민해 왔지만, 그래 봤자 그 실체가 닿는 곳까지 들어오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참, 주광진 기자님 번호 지금 주실 수 있으세요?”
“지금 연락하시게요?”
“네. 방금 회견 보셨을 테니 딱 적당한 타이밍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뭔가 다른 것도 들을 수 있을지 몰라서요.”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기자의 연락처를 보여 주었다.
내가 그 연락처를 받아 적고 나서 전화를 하려고 했을 때, 멍한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던 이강재가 가만히 뭔가를 고민하더니 나를 톡톡 두 번 쳤다.
“저, 그럼 저는 이만 제 차로 다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걸…….
뒤쪽에 앉아 있는 오광필 할아버지를 보자 딱 표정이 ‘이 녀석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하는 모습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한단 걸 깜빡했네요.”
“괜찮습니다. 엄청 바쁘신 걸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 정도로 이사회 분들까지 다 참여해 주실 줄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요. 이번 일로 수진이가 다치지 않도록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부모님께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일의 발끝에도 못 미치거든요.”
굳어 있던 그의 표정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편안한 모습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겠지.
그래도 우리가 직접 이리 움직이는 걸 보고 그도 조금은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우리가 그나마 이 정도로 나설 수 있던 건 중학교에서 일을 복잡하지 않게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정 기사 요청도 수진이가 우리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애매한 부분이기도 했고.
그래도 그가 마지막엔 편한 표정으로 나가는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긴 싸움은 이제 시작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함께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그는 우리를 함께할 사람들로 인정했고, 우리도 그에 대한 보답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일단은 학교로 가야겠지.
“이제 다시 돌아갈 시간이구먼.”
“네! 얼른 가야죠.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들이 터지다니…….”
“다 너 때문이야, 이 녀석아. 일을 몰고 다니는 녀석.”
오광필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그래도 큰일을 앞두고 오는 길보다는 일을 끝마치고 가는 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광진 기자에게 연락을 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썩 좋지 못했다.
당연히 그랬겠지.
소스는 제공받았기에 기사를 올렸지만, 돌아온 것은 자신을 규탄하는 기자 회견이었다.
그러니깐 애들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참, 그가 건드린 게 아닌가.
곽한영과 이한일.
그들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주광진은 약간 겁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도대체 왜 이런 기사를 올린 겁니까? 그분들이 이런 소스를 어떻게 알고 준 거예요?”
-저도 모르죠. 소스는 여기저기에서 들어옵니다만, 이번 일은 특별히 날짜까지 정해서 올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걸 그냥 확 녹음을 해서 터뜨려 버려?
하지만 처음 그가 전화를 받았을 때, 녹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기에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는데 이런 우려를 한 적이 없었을까?
그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겠지.
아쉽지만 여기까지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나머지는 당사자의 보호자인 학부모들이 해 줘야 할 일이다.
중간 중간 필요한 것, 우리가 더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나서겠지만.
-제가 정정 기사를 내게 되면 의심을 받습니다. 그러니 그건 이해를…….
“어차피 쏟아진 물인걸요. 다만 누가 뒤에 있던지 간에 애들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마십쇼.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거잖습니까?”
-저라고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이건 사실 기삿거리도 되지 않는 내용인데요. 아무튼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한 추가 기사는 내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또 그러면 기자 회견 하나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국회의원이고 뭐고 없어요! 저도 돈 많고 도와줄 사람 많은 것 아시죠?”
알았다는 말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벌려 놓긴 했으니 적어도 몇몇 언론에서는 내일이면 해당 기사를 낼 것이다.
강한 존재들과 어두운 뒷골목에서 협상을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지.
강하면 강할수록 밝은 곳으로 나와 소리쳐야 한다.
이걸 들어줄지 말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맥스스쿨 본사에서 김미연 부회장, 이미도 원장, 그리고 주현필과 인사를 나눈 뒤 오광필 할아버지와 나는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아직 오전의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
새벽부터 급히 움직인 건, 오늘 할 일이 많았더라도 학교 일과 시간 내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연가를 냈으니 그냥 하루 쉬어도 무방하나, 이제 개교한 학교라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는 모르는 일.
나부터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 아이들과 입학식 후에 잠시 본 것을 빼고는 보질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 애들한테는 미안했고.
최대한 빨리 간다면 종례 시간에는 볼 수 있다.
“표정이 왜 그래? 후련하다는 표정이 아닌데?”
“아니에요.”
“뭐야, 걱정거리라도 있어?”
오광필 할아버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나의 일이 끝나자 다음 일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나와는 다른 모습.
원래 저 자리는 여유가 없어도 여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할 자리다.
어떤 조직이든지 실제 업무는 말단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러면 어른은 불필요한 것이냐, 그건 절대 아니다.
젊었을 적 아무리 일을 빡세게, 그리고 잘했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때는 어른들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이 풍파에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고,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조직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만약 그가 나보다 더 우왕좌왕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올 생각도 못했겠지.
그러고 보니 과거부터 그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미도 원장도 한참 어리다.
물론 이미도 원장도 장난 아니게 침착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주현필이나 김윤지, 그리고 내가 일에 치일 때마다 그는 큰 요동 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파도를 멀찍이서 보듯 중심을 잡아 주었다.
이런 걸 전부 고려했으니 그에게 은성 고등학교 초대 교장직을 부탁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의식적으로 그런 것 때문에 그를 선택했던 건 아니었다.
어이없을지도 모르지만 단순하게 그가 조직을 이끈 경험이 제일 많단 이유였다.
학원연합 같은 조직.
그리고 이미도 원장과 달리 언제라도 현역에서 물러나도 좋을 만큼 나이도 많았고.
“아뇨. 종결이 안 나서 그렇기도 하고, 이제 시작인데 기운이 쫙 빠지네요.”
“그런 거군. 애들 걱정이네, 이제 다시.”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 해 보였다.
그러고는…….
“하지만 세상 일이 한꺼번에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법이야.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급한 것 하나 일단 막아 뒀으니 다음 일을 시작하면 돼.”
하나씩 하나씩.
그가 옳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겠지.
한계 없이 달려온 것이 10년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공간인 학교에서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사건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나저나 고사 한 번 지내야 하겠는데? 아니면 예배라도? 네 주변엔 무슨 일이 끊이질 않냐.”
“일을 너무 많이 벌리고 다니나 보죠. 근데 이번에는 일을 안 벌이려고 학교로 온 건데.”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겨.”
갑작스런 충청도 사투리에 둘 다 웃었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우리가 내릴 역에 다가서고 있었다.
곽한영과 이한일은 그렇다 쳐도, 설마 유미진이 다시 뭔가를 하진 않겠지?
아, 그러면 피곤해진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시 가자 조금 나아지던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세 번이 끝나기 전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실장님, 일단 학교 주변에 경호원 좀 배치시켜 주세요.”
-경호원 말씀이십니까?
“네. 뭔가 기분이 오묘한 것이, 보안 요원으로 수를 좀 늘려 놔야겠어요. 별일은 없겠지만요.”
-알겠습니다. 다른 건 없으십니까?
유미진을 생각하니 왠지 싸한 기분이 들었다.
퓨처 금융투자가 조폭과 관련이 있었다는 소리도 그렇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설마 학교로 뭔 짓을 하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일단 안전은 확보해야 할 테니 말이다.
“네. 그것만 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오광필 할아버지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녀석 봐라. 네가 교장이냐, 내가 교장이냐?”
“에이. 봐주세요. 나쁜 일도 아니고요.”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진 않았다.
조규만 건부터 이런 일이 자꾸 있었으니 이번에는 대비를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일단 학교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아이들도 편안하게 지내겠지.
기숙형 학교는 신경 쓸 거리가 많다.
어쩌면 시작부터 이렇게 하고 시작했어야 옳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뒤, 나의 촉은 아직 죽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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