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143화.
축하받아야 할 입학식과 폭풍 같이 들이닥친 사건 다음 날 아침.
날씨는 다행히도 맑았다.
“어제 밤에는 먹구름만 잔뜩 끼어 있더니만, 오늘은 왠지 날씨가 화창하네.”
“그러게요. 사진발 좀 받으시겠는데요?”
“이 녀석이? 내가 너랑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나이 차이가 한참이야! 적당히 해.”
“네. 흐흐.”
오광필 할아버지와 나는 기차에 탔다.
아침 출근 직후 나는 연가를 냈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연가를 내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이건 뭐 출장이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하여 교육청에 문의한 후 연가 처리를 했던 것이었다.
물론 오광필 할아버지도 나와 똑같이 연가를 냈고.
이제 개교한 학교의 장과 기간제 교사가 함께 어디를 가냐고?
대부분의 메이저 언론사들은 서울이 밀집되어 있다.
이래섭 기자도 인터뷰를 하려면 서울에서 내려와야 하고.
어제 우리는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대책을 머릿속에서 굴리느라 굉장히 늦게 잠들었다.
결론은 준일이나 수진이를 노출시키지 말자는 것.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피해자고 우리는 제삼자라고 생각했다.
우리 학교에서 벌어지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우리까지 연관되는 걸 피하려는 본능이었으리라.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입학식이 끝나고 학사 일정이 시작된 이상 학생을 수업 중에 데리고 나와 인터뷰를 한다는 것 또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거기에다 제삼자라고 생각했던 우리가 지금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3년 동안은 이 아이들의 보호자다.
기숙 학교다 보니 수진이 아버님도 곧바로 학교에 방문하는 것이 부담이었으리라.
당연히 그는 온다고 하긴 했지만…….
여기까지가 표면적 이유.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 일이 아무래도 준일이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거 사건이 갑자기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오브라이언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이 설립한 은성 고등학교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학교를 여는 계획을 만들고 실행한 건 나였다.
어차피 전면에 나서기로 한 것, 굳이 이 산속 학교로 언론을 끌어들이고 시끄럽게 만들 일이 뭐가 있을까.
내가 올라가면 될 것을.
맥스스쿨의 여러 분원 중 한 곳이 여의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한강의 다리는 지방 여타 강의 다리와는 다르긴 하다.
그렇더라도 일단 맥스스쿨에 들러 이래섭 기자를 만난 뒤, 여의도로 향할 예정이었다.
여의도로 향해서 뭘 어쩌겠냐고?
그 다음 일은 나도 모른다.
기자 회견을 요청한 상황이고, 우리는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은 채로 해당 기사 삭제와 사과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과연 생각처럼 될까? 사람 한 명도 안 올 수도 있어. 그냥 여기서 애들 내세우고 하면 동정심도 유발하고 좋지 않을까.”
오광필 할아버지가 밤늦게 내가 결정한 계획에 우려를 표시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어른이 맡아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어른들이 해 줘야 할 일이리라.
“해 봐야죠. 한 명도 안 오진 않을 겁니다. 이래섭 기자님은 오시겠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맥스스쿨에서 만나서 함께 가는 걸로.”
혹여나 그조차 나오지 않으면 참 뻘쭘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
시위를 하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한다.
이래서 일인 시위가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힘을 받지 못하는 거다.
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시위를 할 수 있으나, 그 시위의 효과는 결국 주목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이래섭 기자와 회견을 할 장소는 여의도 공원.
아주 긴 회견은 아닌지라 특별히 준비할 건 없었다.
마이크와 앰프는 너무 크지 않은 것으로 이래섭 기자 측에서 준비해 주기로 했고.
“일찍 나오셨네요?”
그리고 만날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이분은 전면으로 나서진 않겠지.
하지만 그녀가 이번 일로 여기에 왔다는 건 한성일보 관계자들에게 이미 보고가 됐다.
이로써 회견에 관심을 가지게 될 언론사가 최소 두 곳은 확보가 된 것이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뇨. 저도 보고 싶었어요.”
“안녕하셨습니까, 김 이사님.”
“오, 직함 좋은걸요, 오광필 교장 선생님? 호호.”
김미연 부회장, 이제는 은성 고등학교 학교법인 에듀파티의 김미연 이사도 맥스스쿨까지 나와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찾아가 모시고 와야 할 사람이지만, 그간 워낙 이것저것 함께한 일이 많아 그런 어려운 관계는 이미 넘어선지 오래였다.
마음 같아선 김승주 회장을 모시고 싶었으나, 이건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처음 보는 여성이 한 명 있었다.
물론 경호원을 항상 바꿔 가며 대동하는지라 보통 같으면 인식을 잘 못했을 텐데, 여리여리한 체구에 미인이라 호기심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갔던 것 같다.
김미연 부회장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씩 웃었다.
“참, 소개를 아직 못 했군요. 이쪽은 한성일보 유지현 기자님. 유현덕 대표님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대표님.”
“아, 이제 대표 아닙니다. 하하.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게 더 그런가요? 유현덕 씨라고 불러 주셔도 됩니다.”
“유현덕 씨? 뭐야? 너 왜 이렇게 당황해?”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참 눈치 없는 노인네다.
“당황하긴요! 아무튼 이래섭 기자님은 아직 오지 않으셨나요?”
“유현덕 선생님!”
반가운 목소리.
그리고 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개교 준비로 한 달 전에 보긴 했지만.
이미도 원장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미리 주현필이 와 있었던 것 같다.
대견하다는 듯 나를 보며 웃는 이미도 원장과 그에 대비되는 불편한 표정의 주현필.
하지만 그도 그리 불편하거나 한 건 아니리라.
그는 항상 표정이 저렇다.
가끔 일에 직접적으로 영향이 있는 학부모를 만나거나 학생들을 대할 때는 확 달라지지만.
“원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죠? 아니, 잘 못 지내서 여기 온 건가? 호호.”
“자자, 다들 모인 것 같으니 얼른 들어갑시다. 이 기자님 아까부터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시작이구나.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사실 한성 그룹 부회장까지 대동한 자리이면서 뭘 긴장하냐 싶겠지만,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하지 않은 행사였다.
여러 사람 앞에 나서게 될까.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일까.
맥스스쿨 건물인지라 이미도 원장을 필두로 우린 이래섭 기자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내 뒤에서 따라오던 김미연 부회장이 나를 톡 치며 말했다.
“긴장하지 마세요.”
“네, 긴장 안 했습니다.”
그녀도 내 긴장을 느꼈던 것일까.
확실히 평소보다는 그렇긴 했다.
왜일까.
전생과 같은 입장은 아니리라.
하지만 비슷한 입장으로 해 볼 수 있는 것들을 해 보기 위해 다시 학교로 들어갔고, 이번 일은 그 첫 발자국.
학원에서 강사로 일을 시작할 때도 많이 긴장했지만, 그때와는 다른 긴장감이었다.
그나저나 김미연 부회장도 따라오는 걸로 봐서는 이래섭 기자가 있는 자리까지 같이 들어가려는 걸까?
이른 아침, 그녀에게 이 일로 연락을 했을 때 그녀는 다행인지 서울에 이미 와 있었다.
회사 일로 서울에 왔는데 마침 내가 서울에 간다고 연락을 한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그녀는 곧바로 한성일보도 그 자리에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기자가 많아서 나쁠 건 없기에 나는 바로 콜.
우리가 만날 곳을 이야기했던 것이 전부인데 그녀가 직접 올지는 몰랐다.
아예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만약 온다 한들 과연 기자 회견장에 얼굴을 비칠까 싶기도 했고.
“기자님, 준비되셨나요?”
“허……. 이렇게 많이 가시나요?”
이래섭 기자가 우리 숫자를 보고 먼저 놀랐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내 뒤로 따라 들어온 김미연 부회장의 얼굴을 알아보고 다시 한 번 놀람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작은 눈이 두 배 이상 커졌다.
“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기자님.”
“아, 네. 이래섭이라고 합니다. 혹시 한성 그룹…….”
“오? 알아보시네요?”
사실 그녀 얼굴을 어떻게 알아봤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누군지 듣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것 같은데.
이래섭 기자는 기자라 아무래도 나와는 다른 것일까?
대기업 그룹 가족 얼굴은 다 외우고 다니는?
그건 아닐 텐데.
“김승주 회장님 따님이시죠? 허, 이것 참……. 오늘 같이 가십니까?”
“저도 같이 갈 겁니다. 에듀파티 재단 이사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이미도 원장이나 주현필, 오광필 할아버지도 조금은 놀란 것 같았다.
나도 그렇긴 했지.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녀도 기자 회견에 재단 이사 신분으로 참석을 한다고?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어쨌든 언론의 주목은 제대로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사장은 자리에 나오지 못했지만 어쨌든 현 미국 대통령이다.
그리고 이사진에는 한국 최대 온라인 교육 업체 원장, 거기에 기간제 교사라고 하면서 회견을 할 나는 S 아카데미 최대 주주이며 동시에 맥스스쿨 대주주지.
하이라이트로 한성 그룹 주인의 딸이 이사로 들어와 있다.
“하아. 정말 일을 크게 벌이시네요. 학생은 오지 않은 겁니까?”
“아까 전화로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철저히 학교 대 해당 기자로 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가 보시죠, 그럼.”
대략적인 인사만 간단히 끝내고 우린 다 같이(몇몇은 직접 기자 회견장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여기 있는 모두가 은성 고등학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의도로 출발했다.
* * *
한적한 풍경?
이래섭 기자가 미리 신문사 사람들을 불러 세팅을 마쳐 놨다.
자주 와 보진 않았지만 주말에는 이런저런 행사들이 많이 열리는 이 곳.
하지만 오늘은 일반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개학 이튿날, 3월 3일이니 주말과는 다르겠지.
맥스스쿨에서 미리 임대한 대형 버스 한 대로 움직였다.
차가 멈추고, 잠시 심호흡을 다시 해야만 했다.
“허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광필 할아버지만 낮게 ‘허허’ 거릴 뿐이었다.
다들 긴장한 듯했다.
잠시 동안의 정적.
이래섭 기자가 말문을 제일 먼저 열었다.
“저도 이쪽에다가는 그냥 지시만 내리고 맥스스쿨로 갔던지라 연락 받고 놀랐습니다. 학교 개교 행사 때도 이렇게 주목받진 않았던 것 같은데…….”
“다 기자들인가요?”
심지어 김미연 부회장까지도 놀란 모습이었다.
“상당수는 기자겠죠. 이쪽에서 보이지는 않아도 안쪽에는 시민 단체 몇 곳에서도 온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뭐, 이 정도로 큰 판은 저도 처음인 것 같네요. 등장인물도 어울리는 수준이니……. 유현덕 대표님.”
“네?”
긴장, 또 긴장이었다.
수십? 아니, 백은 넘는 듯했다.
잠시 머리가 멍해진 듯한 기분.
이래섭 기자가 내 이름을 직접 부를 때까지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것 같다.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판은 열렸습니다. 회견 끝나고 포털 뉴스 분위기가 어떨지는 대표님이 만드시는 겁니다. 긴장해서 준비하신 일을 그르치지는 마십쇼.”
그는 기자답게 밖의 분위기만 보고도 오늘 회견의 결과가 아주 중요하다는 걸 잘 알았다.
이걸로 내 현생의 방향이 정해질 수도 있다.
시작은 뜬금없이 뜬 기사 하나였지만 그것에 대한 나의 대응은 현재의 나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도전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도 바뀔 수 있다.
부디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내린 결정인 만큼 나의 긴장 때문에 절대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아마 질문도 많이 들어올 겁니다. 발표 내용은 발표 내용이고, 은성 고등학교, 학생, 그리고 유현덕 대표가 왜 그 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들어가 있는지까지 말이죠. 지금 와서 예상 질문을 검토할 여유는 없습니다. S 아카데미와 맥스스쿨에서 보여 주셨던 모습 이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에는 확실히 이래섭 기자가 나보다는 많이 알았다.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판은 벌어졌다.
그리고 그 판은 나의 판.
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 혼자 지는 것이 아니다.
‘잘해야 한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버스 기사님이 문을 열어 주었다.
회견장 쪽에 자리 잡고 있던 기자들 몇이 버스를 보고 이쪽으로 급히 뛰어왔다.
오광필 할아버지가 내리며 카메라 플래시가 한차례 쏟아졌다.
그리고 내 뒤로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이 내리고, 마지막으로 김미연 부회장이 내릴 때 다시 한 번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미리 다른 승합차로 먼저 도착한 김미연 부회장의 경호원들이 가까이 접근하려는 기자들을 막아서고 길을 뚫었다.
김미연 부회장을 보호하는 것이 일차 목표겠지만 그녀만 보호할 수는 없다.
우리는 뭉쳐서 인파를 뚫고 회견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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