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138화.
내가 대답을 하려다가 무심코 끄덕인 고개에 그는 바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뭐지, 나보고 따라오라는 건가?
그는 건물 안쪽을 지나 뒤편으로 가는 문으로 나왔다.
이쪽은 사실 건물 관리용으로 평소에 닫아 놓기로 한 문인데, 오늘이 입학식이라 아직 잠그지 않은 곳이었다.
나도 온 적 없는 곳인데 그는 어찌 이런 곳을 알고…….
아니, 건물 입구로 들어오면 바로 안쪽으로 보이는 문이라서 알고 있던 걸까.
무슨 대화를 하려고 여기까지.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아직 깔끔한 상태지만 여기는 위치상 곧 이끼들로 뒤덮이기 쉬운 곳이리라.
습한 공기가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구석진 곳.
두 명의 남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좋지 않은 예감은 웬만하면 맞는다더니만…….
“당신, 정체가 뭐야?”
오늘 거의 처음 만난 사람이 ‘당신’이라고 부르다니.
“네?”
“교장 선생님도 절절거리고, 나이는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정체가 도대체 뭐기에 다들 당신 눈치를 봐? 오늘이 처음 만나는 자린데도.”
“잠깐만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선생님 말씀대로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렇게 말 놓고 그래도 됩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당신 무슨 재단 관계자야? 아니면 부모님이나 친인척이…….”
종종 그런 경우가 있긴 하다.
예민한 부분이긴 하지만 사립 학교의 경우 과거부터 재단 관계자가 교사나 행정실 직원으로 채용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게다가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오면 학교에서의 권력도 어느 정도 보장될 수밖에 없다.
공립 학교와 다르게 사립 학교는 인사권이 재단에게 있다.
징계를 받더라도 재단 이름으로 징계를 하는 수밖에 없고, 교감이나 교장 승진도 재단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재단 관계자와 친밀한 사이라면 당연히 힘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순간 강현민 이 사람이 다른 사립 학교에서 경력을 좀 쌓고 들어온 건가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사실 내가 사범 대학을 다닐 때, 이번 생도 아니고 전생에서 대학생일 때도 종종 듣던 이야기였다.
“그럴 수도 있죠.”
“뭐?”
장난을 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사람이 초면인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한다는 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재단 관계자와 친밀한 사이일 수도 있다고요. 그나저나 그게 왜 지금 중요한 겁니까? 절 여기까지 끌고 와서 할 이야기인가요?”
뭐, 이런 이야기를 꺼내려면 여기 만한 곳이 없긴 하지.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 다 듣고 있는데 할 수는 없잖은가.
그가 갑자기 씩 웃었다.
웃을 만한 말을 한 건 없는데.
소름이 목덜미에 쫙 돋는 기분이 들었다.
“흐흐. 그래서 그랬구먼? 아까 교장 선생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하더니.”
“무슨 말씀이신…….”
그러더니 마치 아주 경력이 많은 선배인 양 이렇게 말한다.
“이거 학교 폭력 문제야. 굳이 우리가 이걸 덮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덮는 듯한 모습만 보이면 기자들에게 물어뜯기기 딱 좋아.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잠잠해질 때까지 지켜보면서 애나 관리 잘하면 되는 거고. 그런데 적극적으로 기자에게 항의하고 반박 기사문 내겠다고 하는 걸 보니 뭔가 뒷배가 있다고 생각했지.”
학교 폭력 문제는 그 말대로 학교 입장에서 쉬이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나 재료가 기자들에게는 너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성 관련 학교 폭력.
하지만 중요한 건 오늘이 그 학생이 우리 학교에 입학한 날이고, 사건이 있던 건 그 학생이 중학생 때라는 것.
처분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우리에게 넘어왔더라면 강현민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분이 내려진 건 이미 1년도 더 지난 일.
우리 입장에서는 조용히 그걸 덮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기사는 이미 퍼졌고, 다른 입학생들의 학부모들까지 학교로 연락을 해 오는 상황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그 학생은 2차적 피해를 입게 될 것이고, 이제 개교한 은성 고등학교도 탄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학생이 진심으로 뉘우쳤는지, 아니면 뉘우치는 척을 한 건지는 추후 시간을 가지고 확인해야 할 일.
중요한 건 일단 학교가 학생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뒷배요?”
“어. 재단과 어쨌든 관련이 있다면…….”
그런데 이 사람 한참을 잘못 가고 있다.
내가 재단과 관계가 있는 건 맞췄지만, 왜 내가 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하려는지 잘못 짚었다.
“그러면 재단에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하는 게 맞죠. 선생님 말씀처럼 기자들이 알아서 떠들도록 놔두는 것이 재단에게 유리할 테니까요. 그러면 우린 피해 볼 일은 없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우리가 애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재단에 피해가 가든 안 가든 간에 말이죠.”
“그건…….”
“지금 상황에서 가만히 기자들이 물어뜯는 걸 보고만 있는 게 옳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무엇을 위해서요?”
이 사람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학교 교사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기득권처럼 보일지라도 기자와 상대할 만한 힘은 없다.
그리고 2010년이 넘어가면서 서비스 직종 비슷하게 바뀌게 되지.
뽑는 인원도 급감하고.
그만큼 글의 힘은 무서운 것.
일반적인 경우라면 상당히 눈치를 봐야 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사범대 막 졸업해서 일을 시작한 교사라면 그랬겠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되기 전인데다 잔뼈 굵은 선배 선생님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신입의 패기란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온 햇수만 50년?
매년 세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주눅 들진 않는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맡게 된 아이를 보호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번거로운 일이 생겨 걱정을 하고 계신 겁니까? 혹시 둘 다일지도 모르겠네요.”
“야!”
이젠 반말까지.
하지만 이걸 바라고 한 말이었다.
내가 저리 반응했다고 “그래?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는 교사는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게다가 나랑 비슷한 나이 또래로 봤는데, 조금 많다고 하더라도 그래 봐야 30대.
길게 보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은성 고등학교를 끌어 나가야 할 사람이다.
“말씀 조심하시죠. 선생님께서 저보다 학교 경력이 많으실 수는 있겠지만, 학교 경력이 곧 사회 경험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그 학생, 이름이 이준일이었던가요? 그 학생은 선생님 반입니다. 적어도 1년간은 선생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하고요.”
제발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길 바라며…….
“이번 일은 제가 도와드리는 겁니다. 이왕 초장에 터진 것, 학교에서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사람 인생 하나 구할 수도 있고 범죄자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선생님께 달려 있습니다.”
강현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표정에는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하는 의미가 담긴 듯했으나, 다행히도 그 얼굴은 아주 잠깐 있다 사라졌다.
그리고 곧 내가 방금 한 말에 대해 고심하는 듯했다.
내가 학교에 다시 오고 싶었던 이유.
이런 일이 바로 그 이유였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학교에 처음 들어갈 때면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일을 시작한다.
‘공부 잘하는 제자를 키우겠다’, ‘공부는 몰라도 인성만큼은 정말 착한 학생을 키우겠다’, ‘나라를 움직이는 큰 인물을 키우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꿈은 일에 익숙해짐과 동시에, 또는 일에 치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어린 아이의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동화도 그렇지 않은가?
어릴 때 읽었던 걸리버 연대기가 한 사람의 단순한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를 풍자하는 어른들이 읽을 만한 소설이며, 콩쥐 팥쥐의 결론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
강현민은 이제 겪기 시작하는 상황이다.
그의 꿈은 뭘까.
그리고 그보다 먼저 내가 이 학교에서 이루려는 건 뭘까.
힘이 없어서, 또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여 학생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사람은 이기적이기에 이건 이상이지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이라도 하고 교사로 일하는 것과, 아예 생각조차 없이 직업으로서의 교사가 되는 건 다르리라.
하나는 내가 이미 해 봤고, 이번에는 나머지 하나를 해 보려고 한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학교에 있는 선생님들 다수와 함께.
내 입장에서는 여기 있는 강현민 선생님은 그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저는 도와드리고 싶은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요. 준일이는 아직 제가 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 학생의 담임이신 강현민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거죠?”
날이 선 목소리에서 날카로움을 확 뺐다.
일단 내가 관리자나 재단 이사가 아닌 이상 여기까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머지는 그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그 학생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이해시키고 다독이는 일, 그리고 과거 사건 이후 학생의 현 상태를 파악하는 일, 더 나아가 반의 분위기를 다잡는 일까지.
힘들 것이다.
아마 조금 보다가, 아니겠다 싶은 타이밍에 전학을 보내거나 내보내는 것이 다수의 분위기에는 더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아이들을 만난 건 단 몇 시간.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며, 긴 시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아휴.”
그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벅벅.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만약 그의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알겠어. 그리고 초면인데 반말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내가 믿는 대로 처리할 테니 유현덕 선생님이 하시려는 건 알아서 해 주셔야 하겠네요.”
별로 도움을 구할 것도 없다.
내가 그에게 무슨 도움을 받는단 말인가?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이 정도로만 나와 줘도 다행이니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 입장이 서로 뒤바뀐 게 아닐까 싶네요. 저도 선생님 이해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테니, 선생님께서도 할 수 있는 걸 해 주세요. 꼭 그 학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믿으시는 것, 믿으셨던 걸 해 주세요.”
“근데 나이가 몇 살이랬죠?”
“네?”
헐, 나이도 모르면서 반말 찍찍 해 댔던 건가?
아무튼 시간 낭비는 충분히 했다.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 * *
강현민은 곧바로 자신의 반으로 갔다.
딱히 교무실에서 전화 받고 실랑이 할 여유는 없었다.
일단 오늘 입학한 학생들이 뜬금없는, 하지만 충격적인 기사 하나로 술렁이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으리라.
이건 그의 판단이었다.
기사가 뜬 직후 해당 학생을 바로 상담실로 불렀으나, 아직 다른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는 건 어찌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그 부분은 어떡할까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듣고 보니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기사로 다 뜬 상황인 만큼 없던 일로 무마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준일이에게 들은 내용과 중학교에서 확인한 내용을 근거로 아이들에게 전후 사정을 솔직히 설명하는 것, 그리고 과거의 일에 대한 건 준일이가 죗값을 치른 상황이고 더 이상 우왕좌왕할 필요 없다는 것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내가 그간의 습관으로 이 상황을 밖으로 돌려 해결하려고 할 때, 강현민은 학교 안의 학생들과 그 분위기를 고려하고 있던 것이었다.
반말은 찍찍 해 대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래섭 기자님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와 내가 무슨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 신성 학원에서 내가 학력 때문에 공격을 당할 때 오광필 할아버지의 소개로 반박 기사문을 써 준 적이 있었다.
거기에 S 아카데미의 공무원 시장 진출 뉴스도 과거 도움을 받은 걸 갚기 위해 그에게 먼저 연락했고, 인터뷰도 한 번 진행해 줬던 적이 있었다.
이래섭 기자.
신성 학원 때는 작은 지방지 기자였다.
그리고 나와 관련된 기사, 조규만 의원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가 나름 평가를 받으며 중앙지 기자로 이직했고, 지금도 그쪽에서 종종 이름을 봤다.
만난 건 물론 몇 년 전이 마지막이었지만.
“안녕하셨어요, 기자님. 저 유현덕입니다. S 아카데미 대표…….”
아차, 지금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곳은 은성 고등학교 본부 교무실.
아무 생각 없이 너무 크게 말해 버렸다.
“……였고, 지금은 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요. 일이 좀 생겨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혹시 시간 있으신가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어 나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시선들이…….
젠장, 숨어서 지내려고 했는데.
어쨌든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리라.
-네, 시간 있습니다. 큰일인가 보죠?
“조금 큰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기자님께서 들어 보시고 판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번 뵙고 싶은데 언제 괜찮으신가요? 조금 급합니다만…….”
-은성 고등학교 일인가 보군요. 허허.
이 기자는 내가 은성 고등학교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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