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135화.
“정말로 학교 운영과 관련해서는 관여하지 않을 겁니까?”
“네. 정확히 말하자면 재단 운영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겁니다. 그럴 능력도, 그럴 생각도 없고요.”
호탕한 웃음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변한다.
나를 만나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렇게 변할 때는 호감의 표시인 경우가 많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겠지.
동료가 될 사람은 이런 변화가 긍정의 의미. 하지만 적에게는 이런 변화는 경계의 표시였다.
김승주 회장은 나에게 적어도 적은 안 되지 않을까.
나 같은 사람이 그 같은 사람에게 적이 될 일은 없겠지.
먼 훗날이라면 몰라도.
게다가 이제 나는 돈에 큰 관심은 없다.
“젊은 나이에 무슨 세상 다 살아 본 분처럼 말씀하시니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젊긴 젊을 것이다.
현재 나의 나이는 아직 서른도 안 됐다.
그래도 전생, 그리고 얼마 전 알게 된 사실로는 그 불쌍한 녀석의 삶까지 살았을 테니 아마 김승주 나이보다도 길게 살지 않았을까.
헉, 그러고 보니 참 너무 오래 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중간 기억은 거의 없으니 내가 느끼는 바로는 딱 전생의 유현덕 플러스 지금의 나.
“존경스럽네요. 허허. 나는 아직도 돈을 더 벌고 싶은데.”
“돈을 벌면 좋죠. 그런데 그걸로 뭘 할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유 대표는 그걸로 학교에서 일을 하고 싶으신 것이고요?”
“평생은 아니지만 좋은 학교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시작한 일입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할 수 있으랴 싶을지 모른다.
전생의 나, 그리고 그때의 나의 삶에서는 정말 안 할 수 없어서 하던 일이 학교 일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떻게 성스러운 교직에 그런 마음가짐으로 몸을 담고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지 욱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현실은 현실.
아이들의 미래, 아이들의 인생이 물론 학교에서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안의 구성원들, 예컨대 교사, 행정실 선생님들, 급식실 어머님들까지도 각자의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기반이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학교라는 공간의 모든 구성원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
물론 한 명의 교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겠지.
이사의 힘을 빌린다면, 그리고 내가 가진 돈의 힘을 빌린다면 내가 이 학교에서 바라는 목표는 일정 부분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결국 돈으로 그런 공간, 그런 사회를 산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일개 교사, 하지만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 볼 수 있는 선생님으로서의 삶.
그것이 내가 은성 고등학교에서 바라는 모습이었다.
“말씀은 이렇게 번지르르하게 드리지만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하.”
“번지르르하긴 하군요.”
“저도 이건 처음이라서요. 그래도 해 보고 싶었던 일이니 하는 것입니다.”
“음…….”
“유현덕 대표님,”
김미연이었다.
“네?”
“그럼 이제 유현덕 선생님으로 불러야 되겠네요? 호호.”
잠자코 나와 김승주 회장의 대화를 듣던 그녀가 약간은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 보려 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곧바로 내 옆에 앉아 있던 김윤지의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졌으나, 그것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이 방 안에 나밖에 없는 듯 했다.
“네, 그렇죠. 그리고 부회장님은 이사님이 되시는 거고요.”
내가 교사가 된다면 그녀는 이사가 되는 거지.
나가자마자 아마도 김윤지에게 꼬집히겠으나, 그래도 일단 지금은 그녀가 어색한 분위기에서 회복했다는 것이 중요하리라.
그리고 김미연 부회장은 김윤지를 잊지 않았다.
“윤지 씨는 기숙사장님이 되시는 건가요?”
“아, 저는 어떻게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김윤지의 기나긴 침묵도 끝이 났으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날이 서 있었다.
“종종 만나서 이야기 들려주시죠. 허허. 궁금해집니다. 유현덕 대표가 앞으로 만들어 갈 학교의 모습이.”
내 입장에서 거절할 만한 문제는 아니다.
아마 엄청 바빠져서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입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 * *
은성 고등학교 개학식.
애초 목표했던 정원은 무난히 채웠다.
총 90명의 학생들이 산골에 있는 은성 고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다.
입학식의 풍경은 여느 학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새로 지은 학교 건물과 운동장에 모여 있는 신입생들, 그리고 학부모님들과 교사들.
오광필 할아버지는 평소에 보여 주지 않던 숨겨 둔 정장을 가져온다더니만, 검은 세로줄이 있는 하얀색 정장을 입고 왔다.
하얀색 정장.
그렇다.
그는 은성 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하얀 정장 차림으로 그가 구령대 위에 올라갔다.
“좀 춥죠?”
이게 그의 첫 마디였다.
학생들이 순간 술렁였다.
아침 출근한 교사들이 그의 패션을 마주하고 경악했던 것처럼.
‘도대체 뭐지?’
‘저 나이트 패션의 할아버지는 누구야?’
뭐 대충 이런 생각들이겠지.
그리고 학부모님들은…….
‘애를 잘못 보냈다.’ 하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하아, 그래도 이게 그의 매력이지.
“강당이 준비가 되면 좋은데 오늘은 강당도 똑같이 춥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공기라도 좋은 밖에서 주변의 산들을 바라보며 은성 고등학교의 1회 신입생으로 들어오실 여러분들을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말은 정말 번지르르하게 잘한다.
주현필도 그렇고.
학원 일은 결국 말빨(?)인 것인가.
그렇게 은성 고등학교 1학년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여러분과 1년 동안 함께 생활할 담임 유현덕이다.”
내 사전에 학생들에게 존댓말이란 없었다.
이미 내가 전생에 죽었을 무렵에는 이런 말을 함부로 밖에서 하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직 2010년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써 주는 건 장단점이 명확하게 있는 것 같다.
존중받는 기분을 들게 해 준다거나, 또는 과도한 언사를 교사 스스로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되지.
반면 아이들과의 친밀도 부분에서는 좋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교사 입장에서도 아이들에게 신경 써서 존댓말을 해 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기고, 아이들 입장에서도 선생님은 선생님일 뿐, 자신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형이나 누나의 역할을 바랄 수가 없다.
물론 존댓말을 하면서도 아이들과 깊은 유대감을 쌓는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으시지만…….
나는 왠지 그게 어려웠다.
내가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나에 대한 소개와 학교의 교칙 안내로 하고 있을 때, 학생 하나가 뜬금없이 손을 들었다.
“응? 왜?”
“점심은 잘 나오나요?”
내 말을 끊고 그가 한 소리는 점심이 잘 나오냐는 말.
이 새끼가 첫날 첫 시간부터 점심이 괜찮냐를 물어보다니.
“물론 잘 나오지!”
“드셔 보셨어요?”
“아니, 오늘이 나도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서 밥 먹는 날이야.”
“그럼 어떻게 아세요, 잘 나오는지?”
특급 셰프들을 모셨으니 잘 나온다, 이 녀석아.
하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첫 시간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은 약간의 심리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학교만 하더라도 어색하고, 얼마 전까지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교라는 어색한 환경에서 불편함을 느낄 텐데, 이렇게 자신을 과시함으로써 학교생활의 주도권을 잡아가려는 것이다.
“오늘 밥을 먹어 보면 나오지 않을까?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건 그렇죠.”
역시나 내 대답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일 뿐.
일일이 전부 다 대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도 첫 시간이 중요했다.
담임 경험은 벌써 10년도 더 된 기억일 뿐.
지금 하는 담임 일은 나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먹어야 할 밥 걱정은 나중에 하고, 우리 학교 교칙 설명 좀 더 하자.”
교칙이라고 해 봤자 일반 고등학교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그렇게 일부러 조금 조정을 거쳤고.
오광필 할아버지, 그러니깐 이제 교장 선생님이 된 오광필 교장 선생님의 반대가 심했다.
“어이, 그런 것까지 다 풀어 주면 어떡해?”
“그래도 대안 학교인 만큼 어느 정도 자유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뜩이나 학교가 산 속에 있어서 더 답답할 거예요.”
평소라면 더 편하게 말했겠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평교사.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 설립 후 최초, 유일의 기간제 교사다.
나쁘지 않은걸?
경제적 부담감이 있었던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같은 일을 하는 거지.
그리고 회의 시간에 내가 편하게 ‘할아버지’ 하면서 교장 선생님을 대한다는 건 다른 신규 선생님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도 있다.
물론 함께하는 선생님들 중 일부는 S 아카데미와 맥스스쿨에서부터 나를 알고 지냈던 분들도 있다.
한 예로 내가 멀쩡히 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잘하고 있던 선생님 몇 분을 S 아카데미로 꼬셔서 데려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이 다시 은성 고등학교로 채용되었다.
내 입김이 따로 작용했던 건 아니다.
교사 채용에 있어서 나는 인사권자가 아니기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교사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선순위에 올라간 것이다.
재단 차원에서는 모를 일이나, 어차피 이사회 전체가 내가 알고 있는 분들이시기에 특별히 돈이 궁하신 분들도 없었고.
아무튼 학교의 교칙에는 으레 두발 규정이나 복장 규정 등이 있어야 하지만, 은성 고등학교에는 그런 것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애매모호하게 ‘너무 지저분하면 씻고 오라고 할 수 있다’정도랄까.
이건 사실 강제성도 없는 유명무실한 규정.
그래도 ‘완전 자유’와 ‘유명무실하지만 보장된 규정’은 다르다.
“그럼 머리 마음대로 길러도 되요?”
아까 그 녀석이다.
첫날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톡톡히 드러내고 있다.
“응, 지저분하지만 않으면 돼.”
“지저분한 것이 어느 정도인데요?”
“선생님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반은 내 기준으로 머리에 이가 살지만 않으면 된다.”
“이?”
아차, 요즘 아이들은 이를 모르겠구나.
하긴 나도 아주 어렸을 적 몇 번 본 것 빼고는 기억에 없다.
아주 작은 개미만 한 벌레들이 머리에서 기어 다니면, 그렇게 가려울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거의 사라져서 보기 어려운 이.
“안 씻어서 냄새나고 머리 긁적이고 하면 씻으러 보낸다는 말이야.”
“아.”
어쨌든 아이들은 다행히도 착한 것처럼 보였다.
아직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대안 학교라고 하면 일반적인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쫓겨난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은성 고등학교에 아이를 보낸 학부모들은 교육과 입시에 대한 관심이 높은 부류였다.
입시보다는 자유로운 환경을 더 중시해서 보낸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유별나게 튀는 아이는 없었다.
나름 경쟁률도 있는 편이었고.
물론 서류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학생 개개인에 대한 대략적인 사안들은 생활기록부를 통해 확인해야 하지만, 학폭 관련 내용이나 그 결정에 대한 세부내용은 따로 중학교에 연락하여 확인하지 않는 한 짤막한 몇 줄만 있을 뿐이었다.
학교는 이렇게 원했던 흐름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데, 사고는 의외로 밖에서 터졌다.
* * *
쉬는 시간.
어차피 작은 학교라 교무실을 학년별로 따로 운영할 필요가 없었다.
첫날부터 수업을 빠듯하게 진행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각 교실을 별다른 준비물 없이 들락날락 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교무실에 돌아왔다.
그런데 자리에서 모두가 일어나 있었다.
“응?”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바탕 풍파가 지나간 듯했다.
그리고 내가 들어오자 선생님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유현덕 선생님, 교장 선생님께서 찾으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나는 바로 안쪽에 있는 교장실로 들어갔다.
“유현덕 선생, 여기 좀 앉아 봐.”
“무슨 일 있습니까?”
“방금 전까지 수업이라 몰랐을 거야. 전화가 수십 통이 왔었어.”
전화가 수십 통?
아니, 개학 첫날 전화가 많이 오기는 하지만 밖에서 오는 전화는 별로 없는데.
애초에 개학일은 교육청이나 학교나 각자 바삐 돌아가기에 서로 연락도 잘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에 이렇게 전화가 쏟아져 오는 경우라면…….
“언론인가요?”
“어? 어떻게 알았어?”
그것밖에는 없지.
사고가 터졌을 때 오는 언론사 전화.
그리고 뉴스를 보고 연락을 하는 학부모들.
하지만 오늘이 개학날.
아이들과 관계된 어떤 사고가 존재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면 학교 자체 일이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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