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130화.
차가 천천히 산길을 올라오고, 자리에 앉아 있던 이사진들은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누군가 높은 사람이 온다는 생각에 그런 건 아니었다.
그동안 그토록 숨겨 왔던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리라.
앞선 벤츠가 먼저 섰고, 문이 열렸지만 기다리던 사람이 나오지는 않았다.
두 명의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려 뒤에 따라 멈춰 선 차의 문을 열었다.
“미스터 유! 정말 멀리에다 학교를 세우네요! 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오브라이언.”
나는 막 차에서 나온 오브라이언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는 내 손을 잡자마자 나를 끌어안았다.
“건강해 보이는 군요!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어려울 게 뭐가 있나요? 어차피 현재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 개선을 위하 한국의 학교를 연구할 필요도 있었고요.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오브라이언과 천천히 주차장에서 기념식장으로 걸어갔다.
오브라이언은 내 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러 와 시간을 일부러 조금 더 내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그것도 시골 대안 학교 이사장으로.
‘누추한 곳까지 행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 법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나와 이 학교를 낮추고 싶진 않았다.
내가 미국인이 아닌 만큼 그가 나의 대통령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대통령이 별것 있는가?
그냥 선출직 공무원 중 가장 대빵일 뿐이지.
아무튼 나와 그의 사이는 단순히 미국 대통령과 한국 국민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만, 어쨌든 나에 대해 그렇게 여기는 미국 대통령이 한 명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자, 이쪽부터 소개를…….”
이사진 한 명 한 명을 소개하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다들 대단한 사람을 뜬금없는 자리에서 만났기에 이런 저런 대화를 시도했고, 그중에서도 오광필 할아버지의 반응이 압권이었다.
“이거, 한국말 할 줄 아나, 이 사람?”
나를 보면서 정말 순수한 시골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물어보는 할아버지.
“아뇨. 영어로 하셔야 합니다. 어려우시면 제가…….”
“Hey. How do you do? I’m Oh. (헤이. 처음 뵙네요. 나는 오입니다.)”
무슨 감탄사도 아니고.
성이 오 씨니깐 어쩔 수 없다지만 ‘How do you do?’는 나도 초등학교 때 배운 뒤론 써 본 적이 없는 표현이다.
물론 영국에서는 아직도 가끔 쓴다고는 하지만.
그는 마치 자신이 20대라도 되는 양 몸을 건들거리면서 오브라이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70대가 다 된 할아버지가 몸을 흔들거리며 영어로 말을 하는 모습.
아차, 이런 것도 편견일까.
오브라이언은 한술 더 떠 오광필 할아버지처럼 몸을 흔들거리며, “Hi! Glad to meet you, sir. I’m Obrian. (안녕하세요! 반갑네요, 선생님. 저는 오브라이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브라이언은 비어 있던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어차피 자리에서 다들 일어나 있었기에 나는 준비되어 있던 마이크를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말 한 번, 그리고 오브라이언을 위해 영어로 한 번 순차 번역을 계속해야 했다.
“자, 이제 시작을 해야겠네요.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시죠.”
오브라이언의 등장으로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앉는 동안 밖에서는 카메라 셔터가 연신 터졌다.
오브라이언의 경호원들, 그리고 한성 그룹 소속 보안 요원들은 기자들이 과도하게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 * *
“이건 뭐야? 미국 대통령이 왜 이런 학교 이사장을 해?”
개선당 당 중앙위에는 비상이 걸렸다.
정부 여당이라는 간판으로도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을 초청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업무상 거절이리라 생각했다.
자주 오는 방한이 아닌 이상 한 번 올 때 이곳저곳에서 그의 방문을 요청하는 행사는 엄청나게 많을 테니.
하지만 그가 간 곳은 웬 시골 학교.
아직 개교도 하기 전인 재단 설립 기념회였다.
“누구야? 한성 그룹 김미연 부회장도 있네? 이거 한성 작품이야?”
“의원님, 저희도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한성 쪽에서 준비한 일은 아닌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인을 했는데!”
“그룹 비서실에서 직접 연락을 줬습니다.”
국회의원 곽한영.
그는 현재 개선당 최고위원이기도 했다.
당 대표 자리도 아마 마음만 있었다면 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목표는 거기에서 머물 크기가 아니었다.
오브라이언의 방한은 어찌 보면 그에게 기회였다.
창당 5주년 기념일과 맞물리는 오브라이언의 방한 일정.
그리고 지금 개선당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기에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큰 핑계 없이는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개선당의 5주년 기념행사에 미국 대통령인 오브라이언이 참석해 준다면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 개선당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만 된다면 현 야3당에서도 개선당 행사에 참여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번 기념행사의 주역은 곽한영이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이 무산되게 만든 오브라이언의 선약은 시골에 있는 대안 학교 재단 설립 기념회.
“김미연 부회장 말고는, 뭐? 유현덕, 이미도, 오광필, 주현필……. 알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구먼. 도대체 오브라이언이 이쪽 재단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해 봐. 우리나라에 방문을 하고서도 여당 행사에 불참하고 이런 작은 행사에 간다는 것이 말이 돼?”
“1시간 이내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오브라이언 수행원 쪽에도 연락을 넣어 두었으니 곧…….”
“선약이 있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곽한영은 손짓으로 비서를 나가라고 했다.
당사 안에 있는 당 대표 사무실.
여긴 엄연히 따지자면 그의 사무실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와 그의 비서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곽 의원, 너무 급히 생각하지 말게. 그리고 우리 행사는 잘 끝났잖나.”
“맞아, 맞아. 곽 의원이 교통정리를 잘해 준 덕에 야당도 두 곳이나 참석을 했고.”
방금 말을 꺼낸 사람들.
한 명은 대표석에 앉아 있는 이석주 의원, 그리고 곽한영 의원보다 더 그와 가까운 자리에 앉은 장재현 의원이었다.
둘 모두 40대 중반의 곽한영보다 열 살 이상 많았지만 젊은 곽한영의 눈치는 보는 듯했다.
개선당 개혁의 중심인 곽한영, 그리고 성공적인 대선을 이끈 곽한영의 권력은 그들을 한참 앞서고 있었다.
둘 모두 곽한영의 거친 성정을 잘 알기에 분위기를 조금 유화시키려고 말을 꺼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곽한영은 아무런 대답 없이 탁자에 두 팔꿈치를 대고 생각에 잠겼다.
“허허. 아무튼 이번 미국 대통령은 상당히 파격적이구먼. 우리나라에 학교를 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말이나 된답니까. 자기네 나라에나 학교 많이 지을 것이지 왜 여기에…….”
“신문도 다 그게 1면이야. 그래서…….”
개선당 기념행사가 원래 1면에 실렸어야 했다.
그들은 그제야 곽한구가 왜 이리 화를 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치의 생명은 시류를 읽는 뛰어난 안목과 판단력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이상일 뿐.
대통령은 현행법상 단 한 번밖에 하지 못한다.
하지만 국회의원직은 달랐다.
인기만 있다면 재선, 삼선은 물론이고 길게는 5선, 6선까지 성공하는 의원들도 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중요한 건 눈치.
여당 대표직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그게 더욱 뛰어나야 하겠으나, 곽한영은 초선이고 떠오르는 스타였다.
이제까지 그들이 눈치를 봐 온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가진…….
“신문 1면을 거기다 빼앗겼습니다. 우리 당의 기념행사가 들어가야 할 1면을요.”
“으흠.”
사실이었다.
정치란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어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어야 하는데 이번 기회를 너무 허무하게 날려 버린 것.
똑똑.
잠시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나이 든 국회의원들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 주는 노크 소리에 티는 안 냈지만 반가워했다.
그만큼 분위기는 어둡고 불편했다.
“의원님.”
방금 전 나갔던 곽한영의 보좌관이었다.
“뭐 새로운 거 있어?”
“그래. 도대체 누구야? 그 재단 실질적인 운영자가?”
자신이 모시는 곽한영이 아닌 다른 두 명의 의원들이 먼저 반응했기에 잠시 머뭇거린 그는 곽한영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말을 해도 되리라 판단했다.
어쨌든 당 내 공식적인 서열은 저 두 명이 곽한영보단 한참 위였다.
“누군지 확인은 됐습니다만 그자는 이사회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누군데? 제대로 말해. 돌리지 말고.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야.”
“유현덕이란 사업가인데, 현 S 아카데미 대표라고 합니다.”
“S 아카데미?”
곽한영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이름만 듣고는 바로 알지는 못했지만 S 아카데미란 온라인 교육 업체가 있단 건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국내 업계 최고라는 맥스스쿨의 경영자가 뒤바뀌는 사건이 신문에 실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도한 자가 그때 당시 20대 중반의 젊은 학원 강사 겸 사업가란 내용도 떠올랐다.
“S 아카데미? 거기가 어디야?”
“아카데미면 원래 교육 무슨 일하던 사람인가?”
하지만 나머지 둘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듯싶었다.
곽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좌관을 다그쳤다.
“그럼 오브라이언이 뜬금없이 이사장직을 맡게 된 것도 그자의 작품인가?”
이미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
시골에 대안 학교를 설립하여 제대로 운영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다른 것은 제쳐 두고서라도 입학 지원 학생의 수 자체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안 학교 이사장이 현직 미국 대통령이라면?
각 일간지 1면 외에도 인터넷 포털 메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만한 일이었다.
정확히 뭘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경우에 따라서 상당수의 중학생 자식을 둔 강남 아주머니들도 자식들 손을 붙잡고 입시 설명회에 참여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오브라이언 쪽에서 나온 정보로는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 직전까지 그의 캠프에서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교육 정책 공약 관련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보좌관이 방금 확인한 내용의 전부였다.
한성 그룹과 S 아카데미, 그리고 오브라이언의 보좌관들에게까지 연락을 돌리고 돌려 꺼낸 정보들.
그리고 이젠 곽한영이 그것으로 만족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에이. 타이밍이 좋지 않았구먼. 뭐 어쩌겠나. 다른 큰일들도 많으니 이번 건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밖에…….”
이석주 의원이 곽한영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곽한영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더 파고들게 놔두면 어디까지 갈지 걱정됐다.
당 내에 큰일을 할 사람이 부족한 현 시점에서 그가 젊음의 호기로 엉뚱한 짓을 하는 건 막아야 했다.
그리고 사실 이석주의 말마따나 고작 작은 시골 대안 학교일 뿐이었다.
상대로 봐 주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곽한영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말을 마친 보좌관은 나가란 소리도 없었기에 어색한 표정으로 문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S 아카데미 본사가 아마 제 지역구일 겁니다.”
대략 2, 3분쯤 흘렀을까.
곽한영이 꺼낸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석주와 장재현의 얼굴에 순간 ‘그래서 뭐 어떻게 한다고?’ 하는 표정이 잠시 스쳤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곽한영은 그것까지 보진 못했다.
곽한영은 자신이 처음 국회의원이 된 때를 기억했다.
막 정치에 몸담기로 결심을 하고 물밑에서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그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자살을 한 사건을.
그리고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야당 후보를 큰 표 차이로 압도하며 단 세 석이 전부였던 보궐선거에서 현 여당이 완승을 거두는 데 일조하며 당의 스타로 떠올랐던 그때를 말이다.
“그리고 유현덕이라. 조규만 전 의원과도 아마 관계가 있을 겁니다. 한 번 만나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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