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128화.
“잠깐만? 그러면 김윤지 원장은? 너 혼자 온 거 아냐?”
한참동안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주현필이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말했다.
뭔가 내 결정에 대해 이해시키려고 장황하게 한 말인데 오히려 호기심만을 증폭시킨 건가?
다들 그런 표정이었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는 표정.
그리고 김윤지와 내가 미국에서 함께 일했다는 사실은 업무상 내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지원재 실장이나 준서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단 의미일까.
“혼자 왔죠. 일단은 저 먼저 오고, 그쪽 선거 끝나자마자 한국 돌아오기로 했어요.”
“허허. 둘이 이제 좀 잘해 보려고 하나? 한참을 기다렸는데.”
“할아버지!”
오랜만에 봤지만 평소처럼 장난스런 말투의 오광필 할아버지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김윤지는 오브라이언의 선거를 끝까지 보고 싶다고 했다.
내가 팀에서 나오는 마당에 그녀까지 함께 나온다면 불필요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여지가 있긴 했다.
그래서 나도 동의한 부분이고.
뭐, 사실 내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그녀 결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2008년 말.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전생대로라면 오브라이언이 당선이 되겠지만 지금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난 번 테러 시도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지지율이 높아졌단 것.
이대로라면 그는 무난하게 당선이 될 것이다.
김윤지는 그의 교육 정책 팀 두 곳 중 하나에서 계속 일을 맡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일이라고 해 봐야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 중 미국 교육시스템에 적용 가능한 부분을 간추려 오브라이언의 교육 정책공약에 넣는 정도였기에 무리는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 후보까지 만나고 다니고, 그것도 미국 대통령 후보라니……. 많이 출세했네?”
“출세는 무슨. 아무튼 일이 그리되어서 S 아카데미는 당분간 계속 준서 네가 맡아 줘야 할 것 같아.”
“그래? 나도 너한테 할 이야기 있었는데.”
준서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원래 무슨 말을 할 때 그런 분위기를 잡는 친구가 아닌데 이날따라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오랜만에 얼굴을 본 친구라 어색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만났을 때부터 약간 우울해 보였다.
나도 경영을 하고 있을 땐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그런가보다 했으나, 지금 보니 그것과는 다른 문제인 듯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표정이 왜 그래?”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다들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뭐지?
무슨 문제가 생겼나?
“허허. 뭘 그리 뜸을 들여, 이 친구야. 저 녀석 지금 자기 처지는 완전히 잊고 있구먼?”
오광필 할아버지가 보통 때의 너털웃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웃어 보이려 애쓰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내 처지라고?
내가 무슨 처지이길래.
“나 이제 군대 가야 할 것 같아.”
군대…….
이거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나도 군대 또 가야 하지.
“시무룩해졌구먼. 근데 유현덕은 병원이나 한 번 가 보지?”
“병원이요?”
“예전에 머리 맞고 쓰러진 적 있었잖아?”
뇌진탕?
그런 것 가지고 군대를 뺄 수 있을까.
물론 건강한 남자로 태어났다면 군대야 가면 되는 일.
하지만 나는 이미 전생에 한 번 겪은 일이 아닌가.
억울하게 생각할 일은 아닐지도.
사는 것도 두 번, 아니 세 번을 살고 있으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은 우울해졌다.
젠장, 군대라니.
“그리고 뭘 다 가는 곳을 가지고 그래? 그냥 눈 딱 감고 다녀와. 병원에서 못 빼 준다고 하면 말야.”
“알고 계셨어요? 준서 군대 가는 거?”
“다들 알고 있었어요. 유현덕 선생 없어도 이 모임은 돌아가요. 호호.”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이미도 원장까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말 군대란 내가 갈 때만 아니라면 남들에게는 웃긴 일이겠지.
내가 교육을 주특기로 하는 정치인의 길을 결정했을 때, 군대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단지 S 아카데미의 운영은 이제 준서에게 거의 일임해 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준서가 군대를 가면 누구에게 여길 맡긴단 말인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도 군 입대를 해야 하나?
언제?
“별로 어렵지 않아. 게다가 나이도 찼으니 건드리는 녀석도 없을 테고.”
주현필이 마치 엄청 나이든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내 군 생활이 어땠더라.
“얼굴이 허옇게 질렸어.”
“그러게.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나 보군.”
“일은 잘하면서 가끔 얼빠진 모습을 보인다니까요.”
계속 생각에 잠겨 버렸다.
그 정도로 큰 문제.
퍽.
누군가가 내 등을 후려쳐 생각의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준서였다.
“으윽. 갈비뼈……”
“아, 깜빡했다. 미안. 야, 근데 내가 간다는데 네가 그러면 어떡해. 술 한 잔 안 따라 줄 거야?”
아직 부러진 갈비뼈가 완전히 붙지는 않았기에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버틸 만 했다.
그나저나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는 준서의 모습은 오히려 나보다 편안해 보였다.
정작 군 입대를 하는 건 준서인데 내가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지.
하지만 감정은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감정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면 세상에 감정 조절 실패로 일어나는 사고는 설명할 수 없다.
여기까지 오니 정말 내가 멘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준서의 말이 옳았다.
일단은 준서가 먼저 군대를 들어가는 것이니 내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나라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언제 간다고?”
내 문제는 다음 일이다.
정해진 건 준서가 떠난다는 것.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이 소식을 전하고는 있으나 당장 나보다는 그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다음 달.”
“어디? 훈련소?”
“응. 논산이지 뭐.”
다음 달이라면 내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시키기에는 부족한 시간.
아무래도 준서와는 군 문제가 끝난 뒤에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기분 좋게 보내 주는 거야.’
“건강하게 다녀와!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멋져 보이는 말.
하지만 그의 대답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너는 언제 가려고?”
* * *
S 아카데미는 경영을 전공하고 온 준서와 지원재의 리드로 크진 않지만 꾸준히 성장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강사 인지도 면에서 맥스스쿨에 비해 많이 부족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쪽에서 인지도를 쌓은 강사들이 매출을 잘 이끌어 주고 있었다.
거기에 플랫폼 성향을 가진 업체의 특성상 신규 강사 유입이 용이했기에 새로운 스타 강사들도 종종 출현하여 회사의 성장과 보조를 맞추었다.
준서는 떠났으나 대신 이미도 원장에게 부탁하여 S 아카데미 경영을 맡을 이사진을 꾸렸다.
원래 계획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준서가 몇 달 간 그랬던 것처럼 1인 체제로 운영하려고 했지만 준서가 군대에 가게 된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바로 집단 경영.
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회사라면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이사진은 물론 내가 믿을 수 있고 잘 아는 사람들로.
이미도 원장을 필두로 주현필, 지원재 실장과 오광필 할아버지, 거기에 김미연 한성 그룹 부회장에게도 한 자리를 부탁했다.
거기에 성공 대입학원을 맡고 있던 강재훈 맥스스쿨 전 대표도 포함하여 총 여섯 명의 이사회가 구성되었다.
나는?
나는 새로운 사업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오늘 그 사업을 위한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곳이 어디냐고?
나도 정확히 모르는 위치.
주변에는 산과 나무밖에 없는 산속이었다.
“헉……. 헉…….”
“너무 체력이 약해졌어.”
많이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숨이 찰까.
도로가 연결된 곳까지는 차를 타고 들어왔고, 목적지는 10분 정도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여기야?”
“네, 맞아요. 여기네요. 헉…….”
숨은 계속 찼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산속에 있는 공터.
족히 작은 학교 하나는 세울 만한 공간이었다.
학교?
맞다.
나는 학교를 세울 생각이었다.
정치를 생각하고 있는데 학교를 세운다고?
그게 목적이 아니라 교육을 바꿔 보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학교를 설립하는 건 내가 가진 생각들을 실현해 보고 결과를 보기 위해서였고.
사실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
어쩌면 전생부터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일지도 모른다.
사교육이 필요 없는 공교육 제도의 강화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이다.
하지만 모든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순 없는 것.
이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실과는 어느 정도 괴리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공교육이 없는 사교육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다.
국가란 틀을 유지하면서 국민의 교육을 국가가 일정 부분 담당하는 곳이라면 대부분이 교육의 중심은 공교육이다.
허구한 날 욕을 처먹더라도 근간 자체는 공교육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학교란 그 공교육의 중심을 상징한다.
“너 운동 좀 해야겠어. 벌써 배도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네.”
“슬슬 나올 때 되지 않았나요?”
“야! 무슨 30대도 되지 않았는데 배가 나와? 그럼 어떡해?”
김윤지와 나는 마치 연인처럼 티격태격하며 풀이 무성이 자라나 있는 공터를 보고 있었다.
넓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적절했다.
규모가 크면 보기에는 좋을지 모른다.
‘나 이런 학교 이사장이야!’ 하며 어께에 힘을 주고 다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생에 봤던 어떤 책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작은 정부라고 해서, 뭐랄까, 담당하는 범위 자체는 축소하되 축소된 범위만큼은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확실하게 처리하는 정부.
정치사상과는 관계가 없다.
단지 학교에도 그 사람의 의견을 적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학교 이름은 정했어?”
“아니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그나저나 여기 풀이 너무 많은데?”
“공사 들어가면 풀 싹 베어 내고 공사 차량들로 한동안 시끄러울 겁니다.”
“이런 공사도 진행했던 적이 있었나?”
그냥 그렇지 않을까 상상한 걸 마치 해 본 일인 양 말을 해 버렸다.
“아니요. 한 번도요.”
그녀가 나를 째려봤다.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기분 나쁜 그런 눈빛은 아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앞으로 일을 같이 해 주시면 됩니다, 누나.”
“벌써부터 부려먹으려고 하네. 야!”
갑작스런 고함.
“네?”
“여기 모기 많은가?”
“모기요?”
“어! 나 모기 엄청 싫어해!”
“아……. 모르겠는데요?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주변에 웅덩이 같은 건 없잖아요?”
웅덩이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며시 내 양 팔의 소매를 내렸다.
이미 팔에는 모기에 물린 상처가 잔뜩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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