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127화.
‘또다시 여기로 올 줄 알았지?’
헉.
예상대로 흰머리 할아버지가 내 눈앞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나?
총알이 옆구리를 스친 건 맞았다.
하지만 약간 안쪽으로 갈비뼈에 맞았고, 그 충격으로 갈비뼈 하나가 부러졌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건 단순히 출혈량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일을 피하려고 떠났던 건데. 또 떠나야 하나?”
그녀가 약간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진 않았다.
방금 전 위험한 일을 겪은 어려운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시도렷다.
사실 총알이 몸에 박힌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수술이랄 것도 없었다.
조금 민망한 사실이긴 한데, 의사도 상태를 보더니 왜 기절한 건지 잘 모르겠다고, 아마도 흘린 피가 좀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했을 뿐이었다.
수술 같은 건 없었다.
내가 깨어난 건 수혈을 받고 30분 정도 지나서라고 했다.
“아뇨. 이젠 그러지 마요, 누나.”
“자꾸 이런 일만 일어나고…….”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을 되돌려 보자면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일도 아닌 듯싶었다.
사람은 각자 다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나?
아마 전생의 나는 별로 큰 사고 없이, 하지만 별로 큰 성공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내 운명이었을 것이고, 지금은?
아, 전생도 사실 죽을 때는 정말 어이없는 사고가 있긴 했다.
어……. 정말 어이없이 죽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죽었더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죽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어?”
김윤지가 부르는 소리에 생각의 심연에서 빠져나와 버렸다.
어떻게 죽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는 학교에서 근무를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어렴풋이 남는 감정만 떠오를 뿐…….
“야!”
“아니에요. 오브라이언은 괜찮대요?”
“지 걱정이나 하지 왜 그렇게 남 걱정을 하냐, 너는. 괜찮대. 맞기는 했는데 다행히 위험한 위치는 아니었나 봐.”
다행이었다.
내가 내 인생을 바꾸면서 많은 역사가 바뀌었겠지만, 적어도 큰 기둥은 아직 바뀐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작은 부분들의 변화를 소홀히 생각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큰 흐름이 바뀐다면 어디로 튈지 걷잡을 수가 없다.
나는 가만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가끔씩 떠오르는 그때의 일.
이렇게 말하면 뭔가 굉장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별건 없다.
오히려 지금처럼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던 만남이었지.
우리가 함께해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정말 같이 있을 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조규만의 미친 짓들과 그의 죽음, 강민호에게 공격당한 일 등.
그 결과로 그녀는 나를 떠나 미국으로 혼자 왔고, 그사이에는 큰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우린 이렇게 다시 만났고, 위험한 일이 또 생기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잘 이겨 낼 수 있겠지.
“누나도 같이 한국으로 가요.”
또 다시 내 갑작스런 말.
방금 전 총에 맞고 병원으로 실려 돌아와서 깨어난 나였다.
그런 사람에게서 이런 뜬금없는 말이 먼저 나왔으니 그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막상 그녀는 놀라지도 않아 보였다.
혹시 내가 그리 말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까.
아니, 그녀가 애초에 나를 떠나 미국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었을 때 나를 다시 찾은 것처럼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날 사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사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내 인생은 내 것이지만 그녀의 인생은 그녀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조언은 해 줄 수 있지만 그 조언을 받고 안 받고는 결국 당사자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들이 모여, 아니 그것 외에도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결정까지 모여 한 명의 삶을 만들어 간다.
“뭐?”
“그냥 같이 가요. 같이 가서, 같이 일하죠, 전처럼.”
이렇게 던져 놓기는 했으나 결정은 그녀가 할 것이다.
나는 나의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전처럼 피하지 않고 그녀의 삶에 더욱 개입하고 싶은 바람에 따른 결정.
그녀는 심란해 보였다.
예전이라면 이런 부담을 주는 것 자체가 나에게도 부담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자면, 나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개입하며 살았고 지금도 그리 살고 있는 거겠지.
이건 내가 성공해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고 완전히 망해서 아무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는 사람처럼 산다 할지라도,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생겨난 이상, 나를 아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잠깐이라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좋든 나쁘든 개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서 뭘 하라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는 그녀.
돌아가면 그냥 다시 학원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교육 정책 분야로 일을 한 번 벌이고 싶으니 함께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부분은 그녀에게 이미 조금은 언급해 둔 상태고.
물론 함께하자고 한 적은 없었지.
다만 같이 가자는 말에는 그런 의미도 있단 것을 그녀도 알 것이다.
“학원을 하고 싶으면 학원 일을 하면 되고, 공부를 하고 싶으면 공부를 더 해도 되죠. 이쪽에서 공부 계속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브라이언의 팀으로 들어온 이후로 대학원은 일단 휴학한 상황이니 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짧게 공부한 건 맞긴 하지.
사실 1년이 이제 막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걸 다 그만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이런 일도 있었던 이상 오브라이언이 그녀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정부 부처의 한 자리를 내어 줄지도 모르는 일.
미국 정부 말이다.
고민이 되겠지.
나도 고민이 되는 일이다.
만약 오브라이언이 나에게도 어떤 제안을 다시 해 온다면 나는 지금 내 결정을 고수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그와 함께 몇 년간 일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 지름길일 수도 있었다.
굉장히 확실한 지름길.
“오브라이언이 우릴 찾을 걸요?”
총까지 맞은 상황에서 시간은 조금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누군가가 닫혀 있는 내 병실을 두드렸다.
똑똑.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 또한 깜짝 놀라기는 했다.
내가 무슨 신내림을 받은 것도 아니고,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예지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밖에서 오브라이언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내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괜찮습니까, 미스터 유?”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해 보였다.
가슴팍과 어께에 붕대를 두르고 있긴 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건 아닌 듯싶었다.
감긴 팔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반대편 팔을 반갑게 흔들며 밝은 표정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브라이언이야 말로 괜찮아요? 총에 맞았다고 들었는데…….”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하하. 그나저나 다행이네요. 대충 상황은 듣고 왔습니다만, 정신을 잃으셨다고 들어 걱정했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보다시피 멀쩡하죠.”
나는 양팔을 들어 보았다.
한쪽 팔을 못 움직이는 그의 상태보다는 훨씬 낫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붕대는 팔이 아니라 내 몸에 감겨 있었다.
총에 맞은 부분이 갈비뼈 근처였기 때문에.
그는 내 몸에 둘러져 있는 붕대를 슬쩍 보고는 안심시키려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미소를 지었다.
뭐, 처음부터 웃으며 들어오긴 했지만 말이다.
“팔을 못 쓰는 나보다는 낫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고 고마워요. 이렇게 말로만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일단은 말이라도 하고 싶어 이렇게 온 겁니다.”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만든 식사 자리였는데요. 제가 오히려 죄송하죠.”
“오우!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죠. 마음은 바뀌진 않으시겠죠?”
팀에서 그만 두겠다는 마음.
종종 내 결정은 사정에 따라 바뀌곤 하지만 이건 이번 일로 바뀔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그 주변에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번 일은 내가 전생에 알지 못했던 사건이다.
그럼 나 때문에 새롭게 생긴 사건이란 말인데, 이건 과연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싶다고 굳이 미국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네.”
나는 살짝 김윤지의 눈치를 살피고는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도 함께.
“한국에 오시면 연락 주십쇼. 대통령 되시면 그렇게 하기도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생명의 은인인데 당연히 뵈러 가야죠. 하하. 아마 한국에 갈 일은 종종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브라이언이 대통령을 하면서 한국에 방문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머릿속으로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기억이 나진 않았다.
가끔 기사로 그를 봤었으나 내한한 횟수를 세고 있을 만큼 그에게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근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돈을 벌었다고 해서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만나고 다닌 것도 아니고, 유명인을 만났던 적도 없다.
그런데 오브라이언은 그런 사람, 그중에서도 굉장히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가 운영하는 팀에서 함께 일을 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만두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
나는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었다.
내가 학원 사업으로 이제까지 번 돈은 어마어마했다.
전생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액수.
오죽하면 쓸 줄도 몰라 묵혀 두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건 어쩌면 그 모든 재산보다도 더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뭐가 좋다고 그리 히죽거리냐?”
오브라이언이 나가고 나서 김윤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히죽거리고 있었나.
총에 맞기까지 한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인데 환자복을 입은 상태로 그리 보이는 게 정상 같지는 않았겠지.
이런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실실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하니 웃음이 더욱 나왔다.
“흐흐흐.”
“미쳤어? 왜 그래?”
이젠 걱정스런 표정까지 지으며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
그럴 만하지 않은가.
백악관 초청받는 것도 꿈은 아니리라.
그러다가 퍼뜩 방금 전까지 김윤지와 하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누나! 어떡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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