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사는 회귀해도 개고생이네-124화 (124/200)

[124] 124화.

내 머릿속에 원래 있었던 기억이었다.

나는 그였고, 모종의 이유로 그로 살았던 대부분의 시간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지금으로써는 이 할아버지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고, 그랬다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현생에서는 돈을 많이 벌었더구나. 지금 삶에서는…….”

“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난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

그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그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해 뜬금없이 돈도 안 되는 한성 에듀의 사업을 도와주기 시작했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았기에 오브라이언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어디까지 달리려고 그러니. 그렇게 달려서 목표에 도달하면 다른 목표를 또 찾아야 하잖니.”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러다 명보다 빨리 다시 여기에 온다. 그리고 그때는 되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

이제까지의 말투와는 조금 달랐다.

단순한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의 말투가 아니었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 주는 목소리.

싫지 않았다.

“그 친구는 제가 가지고 싶었던 돈을 가진 부모를 만났는데, 제가 돈이 없을 때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전혀 가지지 못했군요.”

그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제가 일찍 죽게 되나요, 이렇게 살다가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의사한테 물어야지!”

다시 원래의 흰머리 할아버지로 돌아왔다.

“이게 힌트에요?”

힌트가 이거라니.

이 아이의 삶, 아니 내 삶이랬나?

아무튼 이걸 가지고 내가 힌트를 이해해야 하는 건가?

이 삶에서 도대체 뭘 배우라는 말인가.

겪은 일이라고는 돈을 마음껏 쓴 일, 그리고 제대로 된 가정이나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자신을 혹사시키며 산 인생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았단 말인가.

“답은 네가 찾아야 해, 그러니 얼른 다시 돌아가도록!”

대답을 할 새도 없이 그가 내 머리를 또 한 대 쳤다.

지난번과 같은 방식으로 나를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세상이 어두워졌다.

* * *

“흑…….”

이번에는 온몸이 뻐근했다.

잠에 들 때까지는 일주일이나 병원에서 쓰러져 있었어도 멀쩡했는데.

이건 그간 내가 겪었어야 할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갈증이 났다.

땀으로 흥건히 젖은 침대에서 일어나 힘겹게 냉장고로 아픈 몸을 끌고 갔다.

미리 낮에 넣어 둔 찬 물을 한 컵 들이켜니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도대체 힌트가 뭐라는 거지. 그리고 몸은 왜 이리 아프냐.’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온갖 지식들과 내가 이제까지 봤던 소설들을 떠올렸다.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답과 비슷한 걸 찾는다면, 그게 답이라고 믿고 가면 되는 것이다.

‘힌트…….’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또 다른 나의 삶이 힌트였다.

좋지 않았던 삶.

원했던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내가 이뤘던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삶에서 나이를 서른 이상이나 먹고도 나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가지기를, 누군가가 거저 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예상보다 훨씬 크고 고통스러웠다.

이번 삶은 아직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과거 그 아이 부모가 가진 돈 만큼은 아니지만(그 집은 정말 부자였다. 어마어마한 부자.) 그래도 어느 정도 내 스스로 돈도 벌어 두었다.

이렇게 얻은 부의 대가도 뭔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식탁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대가, 대가.

모든 일에는 인과율과 등가 교환이 있다고 한다.

성공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또한 그만큼 뭔가 내가 내놓아야 할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생애에서 내가 내놓아야 할 대가는 이미 치룬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치러야 할 것인가.

삐리릭. 삐리릭.

휴대폰 벨소리가 내 상념의 시간을 깼다.

벽걸이 시계를 보니 시각은 새벽 5시. 보통 내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휴대폰 벨은 알람 벨이었다.

5시에 기상해 하루 일을 시작하고,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 들어갔다.

그것도 일이 별로 없을 때 이야기.

일이 많을 때는 사나흘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했다.

대부분이 신성 학원 강사로 일을 시작했을 때 생긴 버릇이었다.

돈을 벌기 전이나,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만 쓴다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번 지금이나 똑같은 삶.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젊을 때는 어느 정도 몸이 버텨 준다.

하지만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그간 혹사당한 몸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다.

일주일 전 내가 쓰러진 것도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은 질문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해가 뜨는 걸 보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휴대폰 벨이 울렸다.

화면에는 ‘김윤지 누나’ 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 * *

-어? 뭐야? 오늘도 밤샌 거야?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것일까.

“아니에요, 누나. 오늘은 좀 잤어요. 무슨 일이에요?”

하지만 반가워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내가 내뱉은 말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걱정돼서 전화했지. 몸은 좀 어때?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

부모님도 연락은 멀어서 자주 못 하시지만 항상 내 걱정을 하고 계실 것이다.

“괜찮아요. 오브라이언은…….”

-이번 주 나올 수 있겠어? 그렇잖아도 그 문제도 있고 해서.

“문제요?”

-아니, 문제랄 것 까진 아니고. 그냥 이제 곧 선거철이잖아. 슬슬 오브라이언이 이제까지 나온 아이디어를 정리할 생각인가 봐. 이 부분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 어차피 우리가 아무리 이것저것 해 보자고 해도 결정은 그가 내리는 거고. 거기에 우리야 외국인 입장이니 이쪽 사정을 그 사람이나 미국 팀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하니깐.

그러고 보니 어느새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승리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전생과는 달리 내가 그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정도이리라.

그의 밑에서 미국 정부의 일원으로 일을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물론 그가 제안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생각만 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길이 아니라 판단했다.

사실 나는 미국 교육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한국이라면 그나마 전생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나도 학교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었으니 도움이 될 만한 정책들을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알겠어요. 다음 미팅은 토요일이죠?”

-응, 그렇지. 그날은 나올 수 있지?

사흘 후였다.

“가 봐야죠. 괜히 몇 번 빠졌는걸요. 정리를 슬슬 할 때가 된 것 같네요.”

-정리?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단 며칠간의 일이었지만, 뭔가 심경에 다시 한 번 변화가 생겼다고 해야 할까?

김준현 대리에게도 연락을 해야 했다.

한성 에듀의 사업 또한 정리를 해 두어야 한국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리라.

그간 한성 에듀는 프린스 리뷰와 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커서 프린스 리뷰는 창사 이래 세 번째로 구글에 인수된 캐플턴을 한참 앞질렀다.

쥬튜브에 올라간 한성 에듀 강의 동영상의 효과였지만 그래도 성과는 고무적이었다.

추가적인 비용 투자나 자본의 유입 없이도 성과를 내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걸 해내고 나니 로빈의 입은 가끔 만날 때마다 귀에 걸릴 정도였다.

그리고 내 제안으로 곧 제플과 교육 어플리케이션 관련한 협의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물론 한성 에듀는 단순히 프린스 리뷰의 사업 파트너였고, 협의의 주체는 프린스 리뷰와 제플이 될 것이다.

아쉽지만 여기까지가 외국 업체의 한계였다.

“누나, 이번 주 미팅 전에 오브라이언을 따로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누나랑 같이 셋이서만요.”

* * *

“응? 이제 대선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요? 지금 나간다고요?”

오브라이언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건 놀람과 함께 약간의 화도 섞여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있건 없건 이들의 프로젝트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 팀의 여러 가지 제안들은 오브라이언이 정리를 해 둔 상황이고, 지금부터는 혹여 발생할지 모르는 교육 관련 사안에 대한 대처, 그리고 차분하게 대선 결과를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이런 결정을 내리고 그에게 말한 것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실망이 큰 건 아닐지 갑자기 걱정이 됐다.

“혹 나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신다면 계속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제 프로젝트 제안도 거의 끝이 난 상태이니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실수한 건가요?”

나는 조심스레 이렇게 다시 물어봤다.

결정은 내렸지만 이제까지 내가 내렸던 다른 결정들처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미국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그럴 만큼 급한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

과연 내가 오브라이언의 팀에서 일하는 것이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하는 부분이었다.

미국 교육계를 위해? 아니면 오브라이언 자신의 대선을 위해 좋은 일일까.

그럼 나에게는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인가.

미국 정재계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인가, 아니면 혹 한국에서의 앞으로의 계획에 도움이 될 것인가.

다른 팀원들은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미국 내에서 더욱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교육 관련 쟁점들이 떠오른다면 나름 전문가로 활동할 길도 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인정을 받는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인정해 주겠지.

하지만 나나 김윤지는 어떨까?

오브라이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사퇴 의사 표현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냥 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몸도 좋지 않았고요.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서 그만두려는 건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제가 얻기를 원하는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대선이 끝나면 어차피 멈추는 조직 아닌가요?”

“그건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면 인사권을 가지게 되죠.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다른 팀원들도 계속 남아 있는 겁니다.”

인사권.

대통령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폼이 난다거나 하는 얼토당토 않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라의 중대사를 모두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통령의 힘은 나라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요직에 자신이 믿는 사람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이다.

그리고 방금 오브라이언의 말로 추측을 해 보자면, 그는 이 팀을 단발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대통령이 된 이후까지도 염두에 두고 운영했다는 것이다.

한국 출신의 학자들과 사업가를 미국 정부 요직에 말이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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