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123화.
“잘 살고 있느냐?”
멀리서 낯선,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잘 살고 있냐니깐?”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멀리 있던 목소리의 주인이 조금 가깝게 다가온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자러 침대에 누웠는데.
“야!”
“아악!”
갑자기 귓가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한밤중에 나는 침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예상했던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가득 찬 공간.
“젊은 친구가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먹어?”
그리고 내 눈앞에 흰머리 할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쭈글쭈글하면서 머리는 완전히 백발의 할아버지.
정말 오랫동안 본 적이 없던 그 할아버지였다.
어이없이 감전사한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두 번이나 줬던 할아버지!
“어?”
“또 죽었냐고? 아니, 아직 죽지는 않았어. 쯧쯧.”
죽지는 않았는데 왜 혀를 차는지.
그래도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죽어서야 보는 사람이거나, 또는 죽을 뻔한 상황이 되어야 볼 수 있는 사람인데 왜 그리웠을까.
사람이 그리움을 느끼는 건 참 단순한 것 같다.
꼭 보고 싶었던 사람을 봤을 때 그런 것보다도 오히려 예상치 못하게 오랜만에 과거의 지인을 만날 때 느끼는 그 그리움.
“죽지 않았으면 왜 할아버지가 여기 계셔요?”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 해. 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난 그게 다 들린단 말이야!”
“아, 죄송합니다.”
까다로운 노인네군.
“뒤질래, 너?”
“하하. 죄송해요. 생각은 말처럼 쉽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에요?”
“내가 네가 있는 곳으로 간 게 아니라 네가 온 거지. 말은 똑바로 하자고. 어떻게 되기는, 네가 너 자신을 자꾸 죽음으로 몰고 가는 중이니 자꾸 이곳으로 오는 것 아냐?”
“죽음으로요?”
무슨 상황이지, 도대체?
강민호의 산장 습격 이후로 나는 죽음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누군가의 공분을 사 위험에 빠질 일도 하지 않았고, 사업을 한다고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냥 조그마한 컨설팅을 하고 있는 것뿐인데…….
“네 몸이 망가지고 있어. 단순하게 살아, 단순하게.”
“지금도 복잡하게 살고 있는 것 아닌데요?”
“자꾸 꼬박꼬박 말대꾸 할래? 어른한테 아직 백 살도 안 먹은 녀석이…….”
도무지 어찌 된 상황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네 두 번째 삶을 떠올려. 그걸 기억해야 네가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두 번째 삶.
별다른 것은 없었다.
삶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았던 한 학생의 삶.
“약쟁이 애의 몸으로 들어간 거요? 그때는 금방 다시 죽었잖아요.”
“그게 다가 아니야. 잘 떠올려. 왜 잊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걸 떠올려야 해.”
“그냥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전 진짜 웬 어린애의 삶 중간에 끼어들어 가서 하루도 못 살고 사고가 났었는데…….”
“그 이전 기억도 네 머리에 있으니 떠올려라.”
“그건 그렇고, 할아버지는 신이신가요?”
이 질문을 왜 이제야 했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무슨 과거로 돌아간다느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느니 그런 헛소리를 했을 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미 시간이 지났지만 어쨌든 다시 만났으니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
신인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신이라서 사람들에게 딱 세 번의 삶을 부여할 수 있고 지켜볼 수 있는 것일까?
그는 가만히 서서 뭔가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아니면 전에 말했던 것처럼 다른 죽은 사람의 환생이나 회귀를 돌보고 있는 것일까.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다면 그것도 가능하리라.
현실이라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겠는데, 여기는 그런 건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은 방이 아니라 어디까지 펼쳐진 건지도 모를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단지 강한 빛이 사방에 충만했기에 아주 먼 곳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신은 아니지. 너의 삶에서 공무원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공무원? 저승에도 공무원이 있어요? 근데 왜 그리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려요?”
“너만 돌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할 때만 각각의 사람들의 삶을 살짝 살펴보고 와야 하거든.”
전보다는 확실히 대답을 잘해 주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내 두 번째 삶이 어땠기에 그러는 거지?
“전 진짜 두 번째 그 애의 몸으로 들어갔을 때가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냥 살펴볼 수 있으시면 보고 말씀을 해 주시면 안 되나요?”
하지만 그는 이 질문만큼은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건 안 돼. 전생이든 현생이든, 그리고 앞으로 가질 미래이든 간에 우리가 너희 삶에 개입하는 건 안 될 일이거든.”
“힌트라도…….”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아 어쩔 수 없이 매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가 대답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걸 기억해야 한다는데 못 기억하면 그도 도와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잠깐 동안(잠깐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길게 느껴졌다) 바라보고 있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니깐. 지가 산 일생도 기억을 못하고 여기 오는 친구들…….”
뭔가 말을 해 주려나?
말은 무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이제 그의 말대로 내가 그 아이의 삶을 보게 될 것을.
어쨌든 할아버지는 마치 마네킹처럼 멈춰 버렸고, 나에게 다시 찾아온 기다림의 시간.
이번에는 길지 않았다.
빛으로 가득했던 하얀 공간이 갑자기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뭔가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영화를 빨리 감기를 하는 듯 장면들이 훅훅 지나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곧 이게 그 아이가 생전 봤던 모습들임을 알 수 있었다.
“엄마…….”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눈앞에 가끔씩 지나가는 여성은 내 엄마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분명 아니었다.
내가 겪은 삶은 아니었다.
이건 마치 감동적인 영화를 한 편 보는 기분일까?
좋은 내용이라 감동적인 건 아니었다.
좋지 않은 내용이라 오히려 씁쓸하고, ‘그래서 이 친구가 약에 빠졌구나.’ 하는 모습들.
“너무 푹 빠지지는 말아. 지금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렸다.
실제로 멀리 있는 건 아니리라.
아마 나는 그 흰 공간에 그대로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너무도 생생한,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의 삶에 들어가 그의 일생을 영화로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풍족한 삶을 살았다.
확실히 내가 잠깐 동안 그의 집에서 느꼈던 부유함.
어릴 적부터 계속 그리 살아왔다.
나는 그런 꿈을 꿨던 적이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삶이 훨씬 편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꿈.
바로 이 친구의 삶을 꿈꿨던 것 같다.
하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도대체 구하기도 어려운 약에 왜 빠졌을까.
이건 그의 어린 시절,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기억 때문이었다.
아니, 그냥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다른 뭔가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아이가 정말로 된 것 같았다.
그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사랑하는 내 가족이 있었고, 준서와 같은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고, 현생에서는 이미도 원장, 주현필, 오광필 할아버지와 같은 동료들이 있다.
거기에 애매한 관계이기는 하나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김윤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는 이런 평범한 것들을 볼 수가 없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등하교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말까지도 얼굴 보기 힘든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이혼하고 이 아이를 버린 친엄마, 그리고 따뜻하긴 하지만 언제나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졌던 새엄마뿐이었다.
친구? 멀쩡한 친구가 쉽게 생길 리 없었다.
얼핏 지나간 장면으로는 웬 덩치 큰 친구 하나가 약 공급책으로 있었을 뿐이었다.
돈은 많았으니 원하는 것을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다 가지는 평범한 것들은 그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
이 아이의 부모 눈치만을 보는 교사들뿐이었고.
혹시 그가 나 같은 교사를 만났으면 조금 달랐을까?
아니, 내가 그를 학생으로 만났다면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슬슬 끝날 때가 됐는데?”
다시 할아버지의 목소리.
맞다.
슬슬 그의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내가 그의 몸으로 들어간 날이 되었다.
그리고 거기부터는 내 기억대로 일이 진행됐다.
일어나서 놀라는 모습, 아침 식사치고는 거하게 차려진 식탁, 아버지의 외제차, 사고 장면까지 그대로였다.
시야가 다시 어두워졌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것만 같은 시점이었으나, 그런 것 없이 주변이 밝아졌다.
다시 흰 방으로 돌아왔다.
“우냐? 이그. 한 번 겪은 일을 빨리 훑어보는 건데 울긴 왜 울어! 산 날만 해도 50년이 훌쩍 넘는 노인네가.”
50년?
볼로 눈물이 흘러내려 민망함에 급히 소매로 닦았다.
“어떻게 된 거에요?”
“뭐가?”
“이 아이요. 죽은 건가요?”
“그 아이가 바로 너야. 아직도 모르겠어?”
불쌍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방금 전 그 아이의 시점으로 인생이 진행됨을 보긴 했으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정말 영화의 주인공인 것처럼 느끼지는 않지 않은가.
하지만 그 아이가 나라면, 그건 그것대로 말이 됐다.
내가 잊었던 기억이기에 그 아이의 시각으로 다시 기억을 되살린 것일 수도 있었다.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병이 있다는 것을 들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과거를 완전한 타인으로 인식한다는 병…….
“무슨…….”
“네가 그 아이였다고. 돈을 원했잖아. 부모의 돈을. 그래서 준 거야, 그런 가정을.”
정말로 돈만 있으면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원했던 부모의 재력이 생기자 온갖 다른 문제들, 그것도 어찌 보면 훨씬 더 심각해 보이는 문제들이 발생했다.
끝이 사고라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방금 본 기억으로는 그 아이가 바로 며칠 전부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건 눈으로 본 내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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