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121화.
“무슨 초대장이요?”
“교육 정책과 관련하여 한국 교육 전문가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 전 그냥 대학원생일 뿐인데요. 그쪽 전공도 아니고…….”
“제도권 안에 있는 전문가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전문 분야에만 시선이 머무르죠.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을 알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로 팀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의 비서가 봉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잠시 봉투를 만지작거리더니 김윤지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만남의 날짜와 시간은 안에 적혀 있습니다. 혹 시간이 되신다면 부담 갖지 마시고 다른 분들과도 만나 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 * *
“어떻게 된 거에요?”
“이분이 그 유명한 유현덕 씨군요? 반갑습니다. 장재호라고 합니다.”
그녀에 앞서 먼저 들어왔던 남자들 중 한 명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으며 악수를 하긴 했지만 나의 시선은 김윤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몇 달만의 재회였다.
원하는 방식은 분명 아니었다.
뭔가 조금 더 달달한 재회를 원했건만…….
하지만 그런 재회는 평생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할까.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네?”
“아니, 어떻게 된 거냐고요?”
“어떻게 되기는, 이렇게 됐지. 오브라이언과 함께 일하게 됐어. 뭐, 정확히 말하자면 함께 일하는 건지 도와주는 건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거의 승낙한 모양이네, 너도?”
그녀도 오브라이언이 말했던 팀의 일원이었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예상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가 나를 오브라이언에게 소개했던 것일까?
프린스 리뷰의 로빈이 그러려고 하기도 전에?
“네가 돈도 안 되는 일 하려고 미국에 왔다는 소식 들었어. 뭐, 정확히 말하자면 대기업 홍보 일이지만, 어쨌든 공짜는 공짜잖아. 이제까지와 뭔가 다른 일을 하려고 하는구나 생각을 했지.”
“누나는 그럼 어떻게…….”
“나는 오브라이언에게 낚인 거고. 호호.”
황당한 여자 같으니라고.
낚였다는 말을 저리 천연덕스럽게 한단 말인가.
그녀의 말에 나중에 들어왔던 한국인들이 우리를 잠깐 쳐다봤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저기, 한국말도 좋지만 저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브라이언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로 어색함을 지우며 내 건너편 자리에 방금 들어온 다른 한국 전문가들과 앉았다.
“미안해요. 호호.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서요.”
“오래 걸리지 않으니 끝나고 보셔도 될 겁니다. 오늘은 그냥 인사만 하는 자리니까요. 그나저나 다들 미스터 유는 잘 아시죠? 한국에서 성공한 사업가, 그리고 지금은 미국 내에서 무료로 강의를 공개하는 사업을 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민망한 내용의 소개로 얼굴이 붉어졌다.
몇 살이나 나이를 먹더라도 이런 상황에서의 쑥스러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현덕입니다.”
나는 먼저 영어로, 그리고 이어서 한국말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나보다는 나이가 다들 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젊은 구성원이었다.
딱 봐도 김윤지 나이 또래의 사람들.
“이제 인사는 끝났고, 우리 일을 미스터 유에게 잠시 소개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리더가 오브라이언 당신이잖습니까. 저희는 괜찮습니다.”
확실히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미국다웠다.
방금 들은 내용으로 리더는 오브라이언 자신이, 그리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아마 아이디어들을 내놓는 역할이려나?
“미스터 유는 아직 우리 팀에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아직 소개를 못 했는데, 프린스 리뷰의 대표인 로빈입니다.”
잊고 있었다!
그는 이 만남의 초반을 제외하고 줄곳 조용히 우리 대화를 듣고만 있던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작은 온라인 강의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우리나라보다 훨씬 큰 시장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한국인들도 미국 생활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니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 교육 시스템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개선이 더딥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로 인한 손해를 느끼고 있어요. 기초 교육의 부실이라는 손해죠. 뛰어난 인재들은 해외에서 들어옵니다. 미국 초중고를 나온 사람이 NASA나 기타 연구 기관으로 들어가는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고요. 그렇기에 역으로 미국에서 한국의 교육 제도 중 좋은 것들을 일부 반영하기 위한 방안을 만들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힘이 없으면 안 되겠지요. 힘은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교육 관련 공약들을 만들어 내는 역할들을 담당하시게 될 겁니다.”
결국 대선 관련 정책팀이란 소리다.
그중에서도 교육 담당은 한국인들로 채웠다는 의미.
미국 교육 시스템을 해외 인재들로 결국 바꾼다는 건데, 이는 미국 대선에서는 양날의 검이기는 했다.
단지 나는 결과를 알고 있는 양날의 검.
“이 정도라면 지금 이 팀의 목적은 이해되셨겠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말처럼 이 팀이 운영되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자, 그러면 지난 번 제가 내 드린 숙제는 다 해 오셨는지 확인을 좀 해 볼까요?”
숙제?
“저부터 해도 될까요?”
김윤지가 손을 들었다.
마치 조사할 내용을 숙제로 내 주고 발표를 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학생들과 달리 이들은 의문이 생길 때마다 즉각 즉각 질문을 했다.
보통 오브라이언이 그 질문을 하는 역할이었지만, 다른 한국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손을 잠시 들고 발언을 멈추기 일쑤였다.
어찌 보면 대학생 때 겪었던 조별 활동 같기도 했다.
확실히 이렇게 하니 단순하게 자신의 조사 결과를 전달하고 질문과 답변을 하면서 저절로 필요한 내용이 간추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누군가가 여기에서 정리된 내용을 기록할 필요가 있을 텐데…….
“뭐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무심코 다른 한국 전문가의 발언 중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오브라이언이 다시 말을 걸었다.
원래 이렇게 세심한 사람인지, 아니면 내가 오늘 이 자리가 첫 만남이라 나에 대해 신경을 써 주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 관심이 좋기도, 동시에 약간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자꾸 나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수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 앞에 서서 수업이나 진학 설명회를 진행한 사람이 뭐 이런 것 가지고 쪼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익숙한 것과 편한 것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현이다.
이런 자리는 익숙하기는 해도 편해지기는 어려웠다.
능청스러운 성격이라면 혹 달랐으려나?
그런 성격의 대명사가 한 명 떠올랐다.
연세도 이제 많으셔서 주변에서 일을 계속하는 걸 만류를 해도 바득바득 우기면서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분.
“아! 아닙니다. 하하.”
“아닌데? 뭔가 있었는데?”
나는 눈치채진 못했지만 김윤지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기…….”
“네! 무슨 해 주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오브라이언의 눈이 동그래져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의 말에 연이은 팀 활동으로 지쳐 보이던 다른 한국인들 또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봤다.
다시 시선이 집중되었다.
젠장.
“기록은 누가 하죠?”
“아, 그게 궁금했던 거군요.”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하하. 그냥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네요.”
다들 웃음을 지었다.
기록에 대한 문제는 나만 생각한 건 아닐 텐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건가?
오브라이언이 의자에 걸어 둔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펜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펜의 옆쪽에 있는 버튼을 두 번 눌렀다.
거기에 버튼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애초에 그의 재킷에서 그런 펜이 나올 줄도 몰랐지만.
삑삑!
그리고 이어서 그 펜에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 내용이었다.
이 팀의 대화 내용은 그 펜이 음성으로 기록하고 있던 것.
모든 대화 내용이 녹음 중이니 나중에 다시 확인하고 필사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회의 중 필사를 동시에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을 자칫 놓칠 수도 있고, 생각의 흐름이란 의외로 순간을 놓치면 사라지기 쉽다.
“녹음이군요.”
“그런 셈이죠.”
“들어오기로 결정한 거야, 이미?”
“아뇨. 조금 생각해 봐야죠. 너무 훅 결정하면 싸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얻는 것이 뭔지도 물어봐야 하고요.”
김윤지와 내가 이런 대화를 하는 동안 오브라이언은 다시 멍 때리고 있어야 했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오브라이언?”
“네?”
“이걸 하면 저에게 돌아오는 건 뭘까요?”
의외의 질문이었을까?
미국 대통령 후보가 구성한 팀원으로 뽑힌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실리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지금 당장 이 일보다 한성 에듀의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프린스 리뷰와의 협력으로 어느 정도 미국 내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쯤 해서 나는 제플과의 협상을 마지막으로 한성 에듀의 일에서는 빠져 줄까 생각 중이었다.
그래야 김준현 대리 같은 사람도 올라갈 자리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받은 오브라이언의 제안.
나쁘지 않았다.
경험으로는 최적이리라.
하지만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갈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건 아마도 시간이 조금 필요한 일일 것이다.
“글쎄요. 그 질문은 여기 앉아 계신 분들 중 아무도 하지 않으셨네요, 그러고 보니.”
그는 방금 전까지 마치 대학 발표 수업을 하는 듯 열정적으로 토론하던 팀원들을 슥 쳐다봤다.
사실 이들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이 자리는 그들의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정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미국 대통령 후보자의 교육정책 테스크포스 일원이었다는 건 아주 큰 간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사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얻은 새로운 지식들로 구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윤지나 나는?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여기에 참여했는지는 모른다.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지.
하지만 나는 어떤가?
교육 일?
S 아카데미로의 복귀?
뭘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상황.
어쩌면 이게 또 다른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전생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현생.
그리고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얻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채워질 것만 같던 마음은 무엇인가 들어올수록 점점 더 넓어져 버렸다.
“미국 교육의 전문가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 팀 말고 다른 팀이 하나 더 있거든요. 한국 교육 전문가 팀, 그리고 미국 교육 전문가 팀에서 각각 여러 가지 제안을 저에게 주시게 됩니다. 그러면 양쪽의 의견을 통해 최적의 교육 정책을 구성하고 공약으로 지정하는 거죠.”
“곧 이쪽 교육 전문가들도 만나 볼 기회가 있다는 의미고요. 맞죠?”
“미스 김 말씀이 맞습니다.”
“잠깐 유현덕과 대화 좀 나누고 와도 될까요?”
망설이는 것 같아 보여 설득하기 위한 시간을 얻은 걸까?
김윤지가 오브라이언에게 잠깐의 휴식을 요청했다.
“당연하죠. 언제든!”
그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있는 내 손을 붙잡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정말 오랜만에 잡아 보는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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