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120화.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한 건 아니고 지금 막 생각해 낸 것이라 오브라이언이 얼마나 내 답변을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오브라이언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빈 또한 그와 나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자신이 소개시켜 준 자리면서.
프린스 리뷰가 아무리 미국 내 교육업계 순위권이라고 해도 정치권력에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원래 경제계를 제외하고 정치권을 움직일 수 있는 부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간혹 아직 민주주의 체제가 정착되지 않은 곳에서는 군부가 득세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미국은 그런 위태위태한 국가가 아니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던 오브라이언이 고개를 들었다.
“잘 들었습니다만 특별한 것은 없는 걸요? 다만…….”
역시나, 교육정책 관련은 내 전문이 아닌 만큼 부족한 점이 많았으리라.
근데 ‘다만’이라고?
“미스터 유에 대한 판단은 잠깐 유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만남에 아무런 귀띔도 없이 엄청난 걸 가져오리라 기대했던 제 잘못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하하. 여기 있는 로빈은 자신이 미스터 유를 나에게 소개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먼저 미스터 유를 언급한 사람은 따로 있었답니다.”
“뭐라고요? 정말입니까?”
로빈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
나 또한 놀랐다.
물론 내가 프린스 리뷰와 한성 에듀를 연결하며 기대했던 바가 이런 자리였지만, 그래도 이 사람을 직접 만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무리 프린스 리뷰 대표라고 하더라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사람과 만나기는 쉽지 않을 터.
그냥 적당한 교육 관련 정계 인물들, 그리고 푸글의 라이벌이 될 제플 관계자 정도를 소개받으면 성공이라 생각했다.
만약 현생에서도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이거 정말 대박인데…….
뭐가 대박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박 아닐까?
그나저나 오브라이언에게 로빈 말고 나를 언급한 사람이 또 있다고?
그건 또 누구였을까?
미국에서 나의 인지도는 거의 제로였다.
한국에서야 당연히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 나름 유명해진 것 같긴 했지만, 미국에서는 푸글에서 비웃음을 당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를 이 사람에게 언급한 사람이 또 있다고?
혹시 한성 에듀 강의 제작에 참여한 교수급 인사들 중 한 명일까 생각을 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들에게 접촉하여 강의를 제작하는 모든 과정은 김준현 대리가 총괄했고, 나는 큰 그림만 정해주는 식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로빈 말고요? 저를 아는 사람은 미국에 별로 없는데요?”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한국 교육 전문가를 찾는다는 공고를 내고 찾아온 친구들 중 하나가 미스터 유를 추천하더군요. 이미 한국에서 성공한 교육 사업가이며, 지금은 돈도 안 되는 공익사업을 하고 있다고요.”
돈도 안 되는 공익사업이라니. 누가 나를 그리 표현하지?
지원재 실장인가?
똑똑.
오브라이언이 궁금해 죽을 것 같은 내 표정을 보며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오! 늦지 않고 왔네요. 사실 이 자리는 저만 따로 미스터 유를 보려고 만든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세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만 셋이었다.
이들이 그가 말했던 한국 교육 관련 전문가들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성 한 명이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현덕이?”
김윤지였다.
* * *
“너 원래 저 사람 알고 있었어?”
“아니, 무슨 말이야?”
“네가 질문 시간에 질문을 던지기는 했지만 굉장히 오랫동안 너와 이야기했잖아. 끝나고도 따로 보고 오고. 뭐야?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거야?”
“아냐. 그런 거 없어. 나 오늘 너 따라 갔다가 처음 본거야. 하는 이야기가 마침 교육 분야였고, 흥미가 생겨서 질문했던 것이고.”
하지만 잭이 오해할 만했다.
유력 대통령 후보로 점쳐지는 오브라이언 바나한의 연설 후, 그는 청중에게 자신에게 질문할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사실 미국인도 아닌 김윤지는 그냥 조용히 구경만 하려고 했지만, 오브라이언의 연설 내용이 교육 제도, 그것도 한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본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어 질문을 했던 것이었다.
그의 연설의 주제는 문맹 퇴치였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서 웬 문맹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기초 교육이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왜일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교육에 투자를 하는 데도 문맹은 사라지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교육에 투자하는 한국의 교육 제도는 분명 그에게 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의 교육 제도가 끔찍하다고 평가할지 몰라도, 적어도 민주 사회의 국민으로서 알아야 할 것들은 확실하게 학교에서 가르치고 넘어가는 것이 한국이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김이라고 합니다. 오브라이언 전 주의원님께서 한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극찬을 하셔서 기분은 좋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칭찬하신 그 교육 제도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고 개선하려고 오히려 이곳 미국의 교육 제도를 벤치마킹하는 상황인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별다른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한 답변 대신에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모든 교육 제도에는 개선해 나가야 할 것들이 있겠지요. 반대로 그럼 여쭤보겠습니다. 미스 김은 한국이 미국의 교육 제도를 벤치마킹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알 수 있을까요? 지금 대학생이신가요?”
“네, 대학원 다니고 있습니다. 질문은 제가 했는데…….”
확실히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전반적인 지식의 양은 한국인이 많을지라도 그걸 말로 풀어내는 능력은 다른 교육을 받은 미국인이 유리한 것 같았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일단 갑작스럽게 제 생각을 말씀드려야 해서 의도가 제대로 전달이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한국이 벤치마킹하려는 것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자율성을 추구하는 미국 교육 방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방편으로 일단 수업 종류를 늘리고 학생들이 미국처럼 자신에게 필요한 수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적절한 개선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질문에도 답변을 굉장히 깔끔하게 해 주시는 걸요? 하하. 그런 부분이 한국 교육 제도의 약점인가 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미국의 교육 제도가 지나치게 자율성을 추구하느라 정작 중요한 기본 교과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즉, 지금의 교육과정에서 한국처럼 영어, 수학의 비중을 졸업 요건에서 훨씬 강화시켜 학생들이 재미는 없더라도 살아가며 새로운 지식을 배울 때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자는 의미입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이건 다시 하나 질문을 드리면 좋겠네요. 미스 김?”
“네?”
연설과 그에 대한 질문 응답 시간이 아니라 거의 담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연단에 서 있는 그는 여러 사람 속에 섞여 있는 김윤지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이건 굉장히 원론적인 질문과 답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한국의 높은 수학 능력이 어디에서 기반 한다고 보시나요? 이건 저의 개인적인 질문입니다.”
한국 학생들의 수학 능력은 전 세계적으로 이스라엘과 더불어 매년 수위권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입신양명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문화, 역사적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성공을 위해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 탓이 컸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뜸을 들이자, 오브라이언이 김윤지를 보고 있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저도 지금 찾는 중입니다.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시간이 되시면 이 자리가 끝난 뒤에 잠시 따로 뵐 수 있을까요?”
미남의 유능한 정치인이 미모의 동양인 여성에게 따로 보자고 하다니…….
주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중에는 부러움의 눈도 있을 것이고 의아함의 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그녀는 이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을 하느라 주변의 시선 따위는 의식할 수 없었다.
“김!”
“어? 아! 네.”
잭이 멍하니 있는 그녀의 팔을 살짝 잡고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옆을 보니 잭이 질투의 눈으로 연단 위에 서 있는 오브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가 오자고 해 놓고선.’
“이따 같이 가 줄 수 있지?”
오브라이언은 다른 청중들에게 질문을 받았고, 답변을 하는 시간을 이어나갔다.
김윤지는 아무래도 혼자서 저 사람을 만나기는 좀 불편해 같이 온 잭에게 물었다.
“나? 너 보자고 한 거잖아. 나는 차에 가 있을 테니깐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는 할 수나 있겠냐? 알겠어. 별 일이 있겠어? 공인인데…….”
“그치. 질투 나는 걸?”
“무슨 소리야?”
“저 사람은 유명한 정치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 같은 미인에게 미팅 약속을 바로 잡을 수 있잖아. 좀 그렇네.”
“에휴. 그런 게 아니잖아.”
“농담이지.”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잭의 말투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와 같이 다닌 기간도 어느 정도 되니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브라이언을 만나기 위해 질문 응답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다른 사람의 질문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냥 우리 애들 이야기, 학교 선생님들 이야기, 시설물 관련 내용 등의 우리나라에서도 들을 법한 것들이었다.
그가 연단 뒤쪽으로 내려가고 김윤지는 연단 쪽으로 나아갔다.
오브라이언이 아까 끝나고 따로 보자는 말을 한 뒤로 경호원 몇이 그녀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저기…….”
“이쪽으로 오시죠. 의원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한 덩치 하는 선글라스의 백인 보디가드를 따라 연단을 돌아 뒤쪽으로 갔다.
객석에서는 몰랐는데 뒤편에는 테이블 몇 개와 다과, 그리고 음료수가 있었다.
잠깐 잠깐 쉬는 타이밍에 연단 뒤로 들어가 쉬는 장소인 것 같아 보였다.
“오! 미스 김! 고맙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에 흥건한 땀을 닦던 그는 김윤지가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곧바로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반가워할 것 까지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가 만나기를 원했던 것이니 그녀는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대학원생이시라면,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저도 학교 다닐 때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곤 했는데, 그들의 지식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같은 나이인데도 그렇게 많은 걸 알고 있는지 말이죠.”
“저는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직도 배우는 중이고요.”
“겸손이시군요. 하하. 아무튼 바쁘시겠지만 제가 이렇게 자리를 부탁드린 건 따로 한국 교육 제도와 미국 교육 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도에 대한 이야기.
그녀는 자신이 사교육 시장에 몸담았다는 걸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한국에서는 사교육이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방식이 다를 뿐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인정해 주었다.
물론 한국처럼 사교육 시장이 너무 커져 가계 경제를 위협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저도 잘 아는 건 없습니다. 한국에서 사교육 업체, 학원이라고 불리는 튜터링 업체를 운영해 봤던 것이 전부에요.”
“정말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저에게.”
튜터링 업체라는 단어에서 잠시 놀람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연단 위에서와 같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비서에게 뭔가를 말하더니 비서가 차로 달려갔다.
“튜터링 전문가라고 하시니 초대장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받고 말고는 전적으로 미스 김의 선택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스 김이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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