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118화.
“혹시 민주당원?”
“네? 찍으신 겁니까? 촉이 좋으신데요? 하하.”
“잘생긴 분 아닙니까?”
“잘생겼죠. 음…….”
하긴, 잘생겼다는 걸 특징으로 잡고 추측하기에는 범위가 조금 넓으리라.
이렇게까지밖에 내가 물어볼 수 없는 건 나도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그냥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하지만 세상에 관심이 조금 넓게 있는 선생님일 뿐이었다.
전생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이 될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이 정도밖에는…….
그리고 지금 로빈이 말하는 그 사람이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설마 그 사람이겠어?
하지만 때때로 설마 했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 * *
“헤이, 윤지? 오늘 끝나고 뭐 해?”
오랜만에 찾아온 대학원 건물.
길지 않은 인생에서 거의 4년을 보낸 공간이지만, 다시 봐도 우리나라의 건물들과는 정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김윤지는 한국을 떠나올 때만 하더라도 다시 대학원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에게는 어떤 차후의 계획도 없었다.
일단은 자신의 일상을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대책도 없이 짐을 싸 들고 공항으로 갔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일종의 회귀 본능을 가지고 있다.
무작정 티켓팅한 공항은 자신이 바로 몇 년 전 한국에서 외삼촌 조규만을 돕기 위해 떠나왔던 그 공항이었고, 그곳까지 오자 그녀는 다시 익숙했던 교정을 찾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유현덕이 성공 대입학원을 인수하며 준 금액이 적지 않았기에 돈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은 아직 학교 근방에 있는 옛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 집을 구하고 필요한 것들을 사는 일.
시간은 걱정했던 것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점점 다시 이 생활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중지시켜 뒀던 대학원 과정에 다시 복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는 일은 마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
과거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그녀의 다사다난했던 일상에도 평온함이 돌아왔다.
“공부해야지. 넌 공부 안 하냐?”
“한국인은 왜 그렇게 공부에 매달리는 거야? 쉴 때는 좀 쉬어 가면서 해야지.”
“한국인이 공부를 많이 하는 게 아니라 미국인이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거야.”
“그건 맞는 말이야. 하하.”
수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그녀를 쫓아 급히 뛰어온 남자는 얼핏 유현덕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물론 유현덕은 한국인이고 이 친구는 전형적인 백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뭔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잭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김윤지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대학원에 재등록한 뒤 새로 알게 된 친구였다.
특별히 남녀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래는 어찌될지 모르는 일.
잭은 그녀에게 분명 관심이 있어 보였다.
원래 남자란 관심 없는 여성에게 이렇게까지 절대 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번 주말에 뭐 해?”
그는 누가 보더라도 느낄 정도로 조심스레 말했다.
김윤지는 슬쩍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주말 스케줄을 떠올렸다.
별다른 약속은 없었다.
원래 주말은 그냥 쉬는 날이지 뭘 하는 날은 아니었다.
“별것 없는데? 왜?”
“그래? 너 정치에는 관심 있니?”
그래도 한국 남자들은 여자들이 군대 이야기, 정치 이야기는 딱 질색인 걸 알고 행동하는데 미국은 아닌가.
하긴, 이쪽은 여학생들도 종종 이런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지나가다가 ‘도를 아십니까?’를 물어보는 사람을 만날 확률과 비슷하긴 했지만.
많이 하는 건 아니란 의미였다.
“웬 정치?”
“얼마 안 있으면 대선 기간이잖아?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근방에 온다고 하더라고.”
“대선? 나는 투표도 못 하는데?”
“꼭 투표를 할 수 있어야 가는 건 아니지. 그냥 앞으로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미국이란 나라를 운영할지 궁금하니깐 가는 거지.”
“그래서? 같이 가자고?”
살짝 어이가 없었으나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여러 명의 남자들이 그녀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말을 걸어왔지만, 그래도 이 친구만큼 끈질기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없었다.
물론 계속 사무적으로 대하는 건 별반 다를 것이 없어 이제는 남녀 관계라기보다는 그냥 소꿉친구 같은 사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응. 갔다가 시간 되면 저녁이나 같이 먹어도 되고.”
“저녁? 그게 목적인 거 아냐? 그 사람 보려고 가는 게 아니라?”
“흐흐. 들켰네, 이거. 생각 있으면 금요일까지 좀 알려 줘.”
정치인을 보러 가는 자리라.
별로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번에도 평소처럼 그녀는 아마 깔끔하게 거절할 것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번은 조금 달랐다.
뭐가 다른지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 기분이었다.
왜였을까.
이미 지나간 과거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지나간 과거는 한국에서의 삶이었다.
그 삶은 다양한 기억과 추억을 낳았지만, 그 중심에는 이제 단 한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유현덕.
* * *
“오브라이언 바나한!”
“반갑습니다. 로빈에게 이야기를 듣고 꼭 좀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는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앞에 있는 젊은 흑인 남성.
인종의 차이로 인해 미남인지 아닌지 바로 알아보기는 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힘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기도, 그리고 내 전생의 기억이 나에게 만들어 낸 환상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름을 말하시네요.”
우리를 소개한 로빈은 놀라는 내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에서 이제 막 발을 내딛기 시작한 소규모 교육업체 대표가 동일 업종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의 프린스 리뷰에 와서도 당당함을 보여 줬다.
상당히 인상 깊은 느낌을 받았겠지만 사교육 업계는 나에게 익숙한 분야. 그리고 정치인은 그렇지 않은 분야였다.
나에게 있어서 지금 내 앞에 있는 오브라이언 바나한이라는 사람은 마치 연예인과 다를 바 없었다.
“아, 아닙니다. 하하.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놀람과 약간의 멋쩍은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각자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는 협상의 자리가 아니었기에 굳이 긴장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왔으나, 막상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오브라이언의 표정에 나는 긴장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니, 크기는 컸지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할 곳으로는 조금 비좁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직은 선거 기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구경하는 나를 보고 오브라이언이 웃으며 말했다.
“뭐,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 선거 준비는 여기에서 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긴 그냥 제가 오랫동안 사무실로 사용하던 곳이라 익숙해서 아직 쓰고 있는 거죠.”
“그렇군요. 그래도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내가 말은 그리했으나 사실 여기 오고 나서 계속 약간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만을 보여 주고 있었기에 오브라이언이 다시 웃었다.
“지금 한국의 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강의 사업을 하고 계신다고요?”
“네, 맞습니다.”
“저도 최근 알았는데 한국에서는 그 대기업에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학원을 창업해서 상당히 성공한 기업가라고 하더군요.”
우리의 대화를 보고 있던 로빈이 끼어들었다.
사실 그에게는 S 아카데미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한성 에듀의 사업을 함께 진행하는 것만 논의를 했었고, 그가 나에 대해 아마 흥미가 생겼던 것 같다.
뒷조사를 한 건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좋지 않은 일로 나에 대해 조사를 한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아, 아닙니다. 하하. 그냥 작은 학원 운영했을 뿐이에요.”
“한국에서는 탑 투 안에 들어가는 곳이던데요? 게다가 나머지 한곳, 어디더라? 맥스스쿨! 거기에도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들었습니다. 교육 관련해서 사교육 시장 이야기가 나오면 꼭 언급되는 분이시라고요.”
그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으리라.
어쨌든 처음보다 지분은 많이 줄었으나 맥스스쿨의 대주주 중 한 명이고, S 아카데미를 창업하고 운영한 건 사실이다.
학원 강사만 하더라도 유명한 사람들은 전국의 학생들이 대부분 이름을 아는데, 한국 내 업계 1, 2위 학원과 깊게 관여되어 있는 20대 중반의 젊은 강사 겸 사업가 또한 그렇지 않을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본론으로 역시 바로 들어가시네요. 하하.”
로빈이 이렇게 말하며 웃었고, 오브라이언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미스터 유, 당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대답은 하지 않고 질문을 하다니.
“네?”
“돈을 벌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교육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또는 다른 목적이 있으신가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봤던 질문이었다.
누가 했더라.
처음 듣는 질문은 아니었다.
“교육관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아뇨. 하하. 교육관까지는 아니고 미스터 유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사업으로 성공을 하신 분께서 다른 업체의 홍보를 위한 공익사업에 참여하시고, 미국까지 와서 그 일을 총괄한다는 배경 자체가 너무 신선해서요.”
“글쎄요. 도전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도전하고 싶은 성격인 것 같아요. 저도 몰랐던 저의 성격입니다.”
도전이라니.
질문도 조금 유치했지만 답변이 더 유치했다.
어쩌랴.
미리 내 교육관을 펼쳐 보일 준비를 하고 간 것이 아니었기에 지금 당장은 이렇게라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걸 왜 물어보는 것일까.
하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학원에서 일을 시작하고 S 아카데미를 만들 때까지 나는 전형적인 돈을 많이 벌기 원하는 젊은이일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뜬금없이 한성 에듀로 소속을 옮겨 미국에 와서 하는 일이 무료 강의 서비스.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성 그룹에서 연봉을 꽤나 많이 받으면서 내 전문 분야를 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뭔가 좀 많이 독특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 나는 후자일 것이다.
“도전이라…….”
“도전적인 삶을 계속해서 살고 싶다는 말인가요?”
오브라이언은 바로 말을 이어가지 않았고, 로빈만 재차 나의 대답을 확인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네. 그렇게 살고 싶은 것아 아닐까 싶어요.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도전을 말하는 거죠? 교육과 관련한 도전이라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오브라이언이 물었다.
“교육과 관련한 도전이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그쪽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네요. 하하.”
“교육과 관련한 도전을 하고 싶으시다면 구체적으로 향후 계획을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향후 계획이요?”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성격이었나?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계획에 대해선 말씀드릴 순 있지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네요.”
전형적인 계획이 없을 때의 얼버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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