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117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기는요.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데요?”
“그렇죠. 하하.”
첫 만남보다는 훨씬 편해진 로빈과 나의 관계였다.
그때는 아무래도 계약 협의도 있고 하니 조금은 긴장감이 흘렀지만, 이제는 그런 건 없었다.
돈 관계가 걸려 있지 않기에 서로 언제라도 계약 파기를 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가 먼저 파기하지 않는 이상 그쪽에서 먼저 할 리는 없어 보였다.
이건 그들 입장에서 봉 잡은 조건이었다.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고 쥬튜브에서 조회 수가 상당했던 강의들을 자신들의 콘텐츠로 편입시킬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프린스 리뷰 본사가 위치한 뉴욕은 올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인산인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 성격이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이곳 뉴욕에서만큼은 그냥 평균적인 수준일 것이다.
그만큼 도로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다들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역동적인 도시다.
그리고 이곳에 본사를 둔 프린스 리뷰 또한 캘리포니아에서 봤던 여유로운 학교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와 전화기들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뭔가를 작성하는 사람들, 그리고 간혹 안쪽 사무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회사의 명성이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우선 이것이 이번 달 프린스 리뷰 재무제표입니다.”
그는 내 앞에 Letter 사이즈의 서류 한 뭉치를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대충 보더라도 알 수 없는 표현들과 수치들이 가득 쓰여 있었고, 나는 몇 페이지를 슬쩍 슬쩍 넘기며 읽는 척했다.
읽는 척? 내가 재무제표를 봐서 무엇 하겠는가?
봐도 모를 뿐더러 투자자의 입장이 아니기에 뭔가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유용할 만한 내용은 없다.
아마 로빈도 그 사실을 알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는 협력 관계이기 때문에 이걸 먼저 준 것이었다.
“재무제표도 알아보시나요?”
이 사람이, 본인이 나한테 줘 놓고선…….
“아뇨. 흐흐. 전혀 모릅니다.”
“회계 쪽 지식도 있으신가 했습니다. 더 깜짝 놀랄 뻔했네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쥬튜브 조회 수는 우리가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프린스 리뷰에 올라간 한성 에듀 콘텐츠는 전적으로 프린스 리뷰에서 넘겨주는 자료로 확인해야 했다.
나도 그게 궁금해 가끔씩 김준현 대리를 닦달하여 이곳으로 전화를 걸어 현황을 물었으나, 딱히 제대로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숨기기 위한 것 같진 않았고, 단지 이들도 월말 현황 파악 이전까지는 각 콘텐츠에 대한 통계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한성 에듀에서 넘겨주셨던 콘텐츠가 우리 프린스 리뷰에서는 기존에 건들지 않은 분야였습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하나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죠.”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아직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온라인 사교육 같은 시스템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심지어 프린스 리뷰는 우리나라 업체가 인수를 해 버린다.
왜 그랬는지는 잊어버렸다.
단지 그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캐플턴을 앞지르고 미국 내에서 점유율 1위를 하는 온라인 교육 업체가 되었는데, 그 시점에 인수를 당하다니…….
뭐 내가 모를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자세한 것까지는 내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확실한 건 그 전에 프린스 리뷰가 제플의 제이튠즈 U에 들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점에 우리 한성 에듀도 함께 들어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카테고리에 대한 통계는 따로 모니터링을 하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잘된 건가요?”
“네! 완전 대박이에요!”
그는 박수까지 쳐 가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게 그 정도로 좋아할 만한 일인가?
우리 콘텐츠는 무료라서 수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그리고 한성 에듀 카테고리에서 저희 유료 강의로 넘어온 비율이 12%입니다.”
이러면 그의 과장된 반응이 이해가 간다.
백지 상태에서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미 구축된 시스템에 콘텐츠만 추가하는 것은 별 비용이 들지 않는다.
플랫폼 사업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 어느 정도나 되는 건가요?”
“수입이요? 저희 사이트 전체 이용자의 10% 정도가 한성 에듀 콘텐츠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12%가 신규 유료 강의 학습자로 전환됐으니 전체 수익이 1.2% 올라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과는 성과였다.
프린스 리뷰 사이트에 론칭 첫 달에 이 정도라면 충분이 만족할 만한 상황이지.
하지만 이런 내용은 전화로 충분히 전달할 만한 일이었다.
이곳까지 날 불러 급히 보자고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일단 기분 좋아 보이니 장단은 맞춰 주는 것이 옳겠지.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미스터 유 덕분이죠. 저희 입장에서 비용은 없었으니까요. 감사드립니다.”
이것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날 여기까지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궁금하긴 했지만 이건 그가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른 건 뭐 없나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자리 앞에는 전형적인 미국식 오렌지 주스와 물이 각각 컵에 담겨 있었다.
과자도 조금 있었는데 원래 군것질을 그다지 하지 않는 편이라 이쁘게 놓여진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
나는 조용히 주스가 담긴 컵을 들고 홀짝였다.
딱히 목이 탄 것은 아니었기에 아주 조금씩만.
“저, 하나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서 여기까지 모셨습니다. 제가 캘리포니아로 넘어가는 것이 맞겠지만, 만약 제안에 동의를 해 주신다면 저와 함께 움직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왜인지도 모르고 먼 길을 왔는데 혹시라도 내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냥 불렀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 제안을 내가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런 확신이 없었더라면 아무런 언질 없이 이렇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제안이 도대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졌다.
제5강 기연 혹은 인연
책상에 몸을 기울이는 나를 보더니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기대되시나 봅니다, 미스터 유. 그리고 이건 확실히 기대하실 만한 일입니다.”
“뭔데요? 궁금하게 자꾸 주변만 훑지 마시고 말씀해 주시죠.”
“짜증도 내시는군요? 하긴 첫 만남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셨으니. 그래도 다 그렇게 하기로 계산하고 들어오셨던 것 아니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첫 만남에서 내가 화를 냈던 건 맞다.
사실 화를 낼 정도의 일은 아니었는데 그런 척을 했었지.
커미션 이야기를 꺼낸 로빈에게 나는 한성 에듀의 강의들은 돈을 벌기 위한 사업 목적이 아니기에 받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는 나와 김준현 대리가 짝짝쿵을 맞추는 모습에서 우리가 사전에 미리 그렇게 하기로 계획했음을 알았던 것인가?
“첫 만남 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왠지 잘못한 걸 들킨 아이인 양 멋쩍게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내가 말을 하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로빈의 제안이 무엇일지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는 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전혀 예상이 되질 않았다.
한성 에듀와의 협업도 이제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더 뜸 들이다가는 이번에는 정말로 혼날 것 같군요.”
나보다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혼낸단 말인가.
그냥 속만 부글부글하고 있겠지.
원래 이런 일로 초조해하거나 답답해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누구와 함께한 시간이 길다 보니 조금 닮게 된 것 같다.
누구냐고? 그야 주현필이지.
이번에는 로빈이 컵을 들고 물을 한 잔 들이켰다.
“프린스 리뷰는 현재 미국 내 온라인 사교육 사이트만 운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각 급 학교, 그리고 심지어 대학교 교재까지 출판을 하고 있죠.”
“네. 알고 있습니다.”
“교재를 출판하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일단 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재는 저명한 학자들이 쓴 글이어야 하거든요.”
‘사람을 만난다’라.
하긴, 내가 한국에서 사교육 시장에 있을 때도 여러 사람을 만나기는 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니 아이들부터 학부모, 그리고 각종 교재를 팔러 다니는 공급업체 사장님들, 다른 학원 강사들, 그리고 심지어 반은 정치인이라고 할 만한 교육방송 사장이나 국회의원까지도.
미국 시장도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넓은 땅에 훨씬 큰돈이 움직이는 시장이니 만나는 사람들도 내가 아는 사람들보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교재 부분에 있어서는 학자들을 많이 알아야 할 테니 그런 사람들도 많이 만날 것이고.
“이번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전해 들어서요. 미국 정치에 몸담고 있는 한 분께서 한국의 교육 제도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나라가 아무래도 문맹률이 조금 높은 편이라 이 부분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문맹률.
말 그대로 글자를 못 읽는 건 아니다.
글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높은 문맹률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그리고 가장 그럴듯한 것이 바로 기초 교육 부실.
말 그대로 학교에서 제대로 못 가르쳤거나 가르치는 방식이 효과적이지 못하단 말이었다.
미국 교육 과정이 좋아 보이지.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강한 나라고 잘사는 나라니깐.
게다가 노벨상 수상자도 종종 나올 만큼 다양한 분야의 강국이다.
실제로 미국에 나갔다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부럽다는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출처는 기억나지 않으나, 미국 교육 제도가 겉보기처럼 좋기만 한 것은 아니란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교육 제도가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답답하고 지엽적이고 쓸모없는 내용만 잔뜩 가르친다고 느끼지만, 막상 자유를 주고, 응용을 시키는 미국식 교육이 우리나라에 도입된다고 해도 그것이 잘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방식이 있고, 이들은 이들에게 맞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건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교육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생각인데, 로빈은 단지 우리나라 교육에 관심이 있는 정치인이 있다고만 말을 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고 있는 거지?
“이분이 어떻게 저와 인연이 닿은 분이라 교육 관련 이야기를 가끔 하시는데, 제가 미스터 유의 이야기를 슬쩍 건네 봤습니다.”
“네? 제 이야기를요?”
불길한 예상이 맞았다.
사교육 시장에서야 전생의 기억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다고 쳐도, 교육정책에 대한 건 제대로 남에게 검증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불안했다.
“하하. 미스터 유도 솔직한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을 짓는 경우가 있군요.”
날 얼마나 봤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지만 저도 자주 뵙지 못하는 분이라서요. 아무튼 말씀을 드렸는데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누구시죠, 그분이?”
“비밀입니다. 하하.”
미친.
비밀이라면 내가 만난다고 할 것 같은가.
누군지도 모르고 단지 미국의 정치인이라고 만나기 위해 안달 난 사람처럼 나를 본 것일까?
설마…….
그리고 그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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