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113화.
‘한성 에듀라는 곳에서 만든 영상들로 우리 아이 대입 성공했어요.’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면 시장은 한 번에 움직일 것이다.
“그럼 일단 진행하고 있는 건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김준현 대리는 며칠 전부터 추가 강의들을 제작하기 위한 강사 물색 중이었다.
생각보다 교수나 대학원생 급 강사들이 연락이 닿질 않아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관심을 보였다.
거기에 내 개인적인 추천으로 컴퓨터 IT 분야 강사들은 인도 출신 대학원생들, 그리고 수학은 극동 아시아 3국의 대학원생들 위주로 접촉하고 있다.
일단 현재 업로드 된 SAT 대비 강의들 외에 학교 수업 보조용으로 사용될 테마 강좌들이 촬영 중이고, 이것만 완료되면 구색은 갖출 것이었다.
* * *
‘시간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때 훨씬 빠르게 흘러간다.’
“뭐야? 미국 가더니만 왜 이리 멍해졌어, 사람이?”
“네? 아! 아니에요, 선생님.”
“맞는 소리 했구먼, 뭘. 내가 봐도 그런데? 허허.”
주현필의 일침, 그리고 오광필 할아버지까지.
이미도 원장은 여느 때처럼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보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다.
“그나저나 사업은 어떻게 하고 여길 온 거야? 오랜만에 얼굴 보니 좋긴 한데…….”
주현필이 나에게 물었다.
그는 한껏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는데 영 어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처음 보는 모습 같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가까이서 함께 보내 온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의외로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구석이 많았다.
이미도 원장님과 그의 관계도 그랬다.
분명 내가 봤을 때는 주현필이나 이미도 원장님이나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 둘이 저 정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주현필과의 마지막 술자리에서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미쳤냐? 이미도 원장님은 나에게 있어서 조각상 같은 존재야. 막상 잘된다고 해도 감당할 자신도 없고. 좋은 남자 만나셔야지.”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게 사실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마음은 있으나 다가갈 용기도, 의지도 없는 상황이라고 해 두어야 할까?
이미도 원장에게도 물어봤다.
“원장님, 주현필 선생님이랑 만날 생각은 없으신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대답 또한 주현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다르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둘 다 비슷했다.
“주현필 선생님이요? 호호.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래도 주현필 선생님은 마음이 있으신 것 같던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잘 알죠. 그건 그렇고, 유현덕 선생님이야말로 김윤지 원장과는 어떻게 된 건데요?”
전형적인 말 돌리기.
마음이 없는 건 아니리라.
하지만 마음을 꺼내 놓을 용기가 없다거나, 혹은 둘 사이에는 사랑보다 더 끈끈한 우정 같은 것이 이미 자라나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내가 이들을 알게 된 것이 이제 10년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인데도 이들 둘의 관계는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이들의 사랑의 큐피드를 해 줄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지켜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시장이 커서 그런지 쉽지 않더라고요.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왔습니다, 하하.”
“뭐야? 실패야?”
“실패는 아닙니다만…….”
“대표님께서 말씀은 이렇게 하십니다만 나름 괜찮은 성적을 보여 주고 오셨습니다.”
지원재 실장은 유독 말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이 구성원으로 모인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준서는 싹싹하게 사람들을 대했지만 그는 조용했다고 했다.
일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거, 이거. 지원재 실장이 유현덕 대변인이신 것 같은데?”
“아니에요. 푸글 어플에도 못 넣었고, 그냥 점유율만 확장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한성 그룹에서도 만족하고 있는 점유율인걸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정착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성 그룹에서는 내가 미국에서 진행한 일의 결과를 나름의 성과로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한성 에듀 사명으로 미국 교육 시장에 진출한 지 6개월.
그간 한성 에듀 미국 지사에서 제작한 강의는 쥬튜브 내의 교육 콘텐츠 채널 조회수에서 2위까지 올라갔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 내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 15군데와 협약을 맺고 맥스와 함께 준비한 테마 강의를 공급하는 중이었다.
애초부터 영리사업이 아니었기에 적자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사업가가 다 됐나 보다.
콘텐츠를 만들고 아무런 대가 없이 공급하기에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아무리 한성 그룹에서 홍보 효과를 인정했다 할지라도 내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일이다.
“푸글이나 제플 못 잡으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 거예요. 그런데 못 잡았고…….”
푸글은 미국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육 기업 캐플턴과 손을 잡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아예 인수를 해서 그들의 모바일 운영체제 안드로이드에 기본 어플리케이션으로 캐플턴의 강의와 교재 이북 링크를 걸어 놓은 것이었다.
제플은……. 제플은 역시 이것도 자기네들이 직접 만들어 보급하겠다고 했다.
사실 이건 예상대로였다.
제이북스와 제이튠즈 U 서비스가 바로 내가 구상하던 것이었고, 그건 사실 내 머릿속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서 나왔기에 제플은 굳이 나의 제안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계획은 그들보다 먼저 교육 사업을 제안하여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의 나의 성공과는 다르게 이뤄지지 않았다.
“괜찮아. 그래도 이만큼 이뤄 낸 게 어디에요. 그죠?”
“준서는 S 아카데미 경영자이면서 아직도 어린 아이 같구먼? 기 센 강사들이 얕보기 쉽겠어.”
“아니에요!”
준서가 어리게 보이는 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그리고 경험도 훨씬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준서의 모습은 상당히 어른스러웠다.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도 말이다.
“근데 갑자기 왜 온 거에요? 혹시 한국에서 활동을 다시 하려고?”
사람 좋아 보이는 엄마 미소만 짓고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미도 원장이 말했다.
내가 한국에 갑작스레 귀국한 것에 대한 이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귀국한단 것도 귀국하고 나서 연락을 했다.
그만큼 갑작스런 방문이었고, 오자마자 ‘저 한국 왔어요.’라는 말과 함께 이 자리를 만들었으니 다들 궁금했겠지.
오랜만에 만난 그리웠던 얼굴들.
단지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외모도, 그리고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맞아. 갑자기 귀국하더니만 이리 다 불러 모으고. 그러고 보니 김미연 부회장 빼고는 전부 있구먼.”
“김윤지 원장도 없잖아요.”
“그 친구는 떠났잖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걸. 유현덕도 아마 모를 걸? 알아?”
김윤지…….
그녀는 그녀의 길을 홀로 떠났다.
그녀의 외삼촌이었던 조규만 국회의원의 죽음, 그리고 그 이전에 있었던 그의 배신까지.
아마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를 알게 된 이후로 그녀의 평탄했던 삶, 아니 평탄하게 진행될 예정이던 삶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버렸다.
내가 원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으나, 아마 내가 없었다면 그녀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제 막 정착한 한성 에듀를 놔두고 급거 귀국을 결심한 이유도 그녀 때문이었다.
“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사업에서 손 떼려고 합니다.”
약간은 어수선했던 분위기, 하지만 내가 이 말을 입에서 뱉은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 * *
일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강의 개수는 이제 학교에 수업 보조용으로 홍보를 나갈 정도로 규모를 갖췄고, 프린스 리뷰는 예상대로 경쟁사인 캐플턴의 피인수 소식에 잔뜩 긴장한 상황이었다.
“반갑습니다. 미리 조사를 좀 할 시간이 필요해서 만남을 조금 늦췄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로빈이라고 합니다.”
프린스 리뷰의 로빈이라고 밝힌 이 사람.
인터넷에서 회사를 알아보던 중 사진으로 봤던 사람이 나왔다.
특별히 인상 깊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머리가 많이 벗겨진 중년 아저씨?
그나저나 내가 얼굴을 기억할 정도라면 예상보다 중요 인물일 텐데 막상 무슨 역할을 맡은 사람인지 딱 떠오르지가 않아 답답했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유현덕이라고 합니다.”
“김준현입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 50대의 중년 아저씨는 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푸글에서의 미팅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연락은 우리가 먼저 했으나 우리보다 이쪽이 더 급한 상황인가?
캐플턴 때문인가?
“우선 귀사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인터넷에 상당량의 고등학생용 강의를 올려놓은 상황이더군요.”
“아, 네.”
이거, 만나잔 건 우리였는데 왠지 입장이 뒤바뀐 기분.
상당히 뭔가 오묘한 느낌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릴 만나자고 한 건 우리가 미국 내에서 인지도가 있는 사교육 업체이기 때문이고요?”
“그렇죠.”
계속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는 있으나, 이상하리만치 그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급해 보이기에 그냥 들어보기로 했다.
평소와 다른 나의 태도에 김준현 대리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따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고 기다렸다.
“제안하실 내용이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지금 상황이 저희가 바라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리라 생각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 보죠. 몇 프로의 커미션(수수료)을 원하십니까?”
보기와 다르게 굉장히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커미션이라.
우선은 이 커미션이 어디에서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알아야 했다.
만약 우리가 커미션을 그들에게 내야 한다면, 그건 마치 외주 생산(OEM)같은 역할을 우리가 하게 된다는 의미렷다.
우리의 강의에 현재 진행 중인 한성 그룹 홍보 영상 외에 프린스 리뷰의 로고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이고, 프린스 리뷰에서는 아마도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우리 영상들을 올릴 것이다.
그래야 서로 수지가 어느 정도 맞는 거래가 될 테니깐.
하지만 이럴 경우 한성 에듀의 운영비 지출이 더 많아진다.
강의 영상 제작에도 몇십 억이 들어가고 있는데 수수료까지 낸다면 원래의 목적을 벗어난 사업을 해야 한다.
반면, 그가 언급한 커미션이 우리의 강의를 프린스 리뷰에 들여놓는 조건으로 우리가 받게 되는 수수료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프린스 리뷰를 통해 한성 에듀 강의 수강자를 급격히 늘릴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구미에 맞는 강의로 변경을 해야 할 우려도 있다.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커미션을 내야 하는 경우보다는 받는 것이 좋기는 한데, 내가 애초에 프린스 리뷰에 연락을 한 것은 수수료를 주고받으며 사업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내 생각을 그에게 전하고 우리 주도로 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은 세게 나가도 괜찮으리라.
대답을 하기 전, 일부러 약간의 뜸을 들이면서 앞에 놓인 사탕을 집어 들고 포장지를 벗겨 냈다.
“커미션이요? 저희 회사에 대해서 조사를 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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