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111화.
“제안 받으신 거죠? 같이 일하기로?”
“아직 아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들어나 보고 판단하게.”
내가 맥스를 채용함에 있어 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굳이 그를 이리 급하게 채용하려고 하는 거냐고?
같은 조건이라면 여러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저나 여기 미스터 김은 이쪽 교육 현실에 대해 잘 모릅니다. 뭐, 신문이나 책으로 봤던 내용들은 있지만, 일단 한국보다 교육열이 훨씬 떨어진다는 부분도 어제 학교에 가서야 알았던 것이고요. 이런 것들을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건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맥스 선생님께서 저희가 간과하는 부분을 알려 주시고 제안해 주시면 됩니다.”
일종의 컨설턴트 역할.
그것이 내가 아침부터 이 사람을 데리고 카페에 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였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
어제 한 번의 만남으로 내가 그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는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고 외국인 학생을 담당한다는 것.
그리고 수업도 수업이지만 교수 설계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정책 제안 비슷한 건가?”
그리고 나의 길지 않은 설명을 제대로 이해한 듯해 보였다.
“맞아요. 우리가 사업을 계획하면 그 계획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생각할 시간은 주시겠죠?”
“물론이죠!”
됐다!
그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기다리면서 우리의 계획을 수정해 놓는 것.
수정 방향은 정해졌다.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강의들을 주제별로 쪼개는 것.
그리고 필요에 따라 재촬영을 해야 하는 강의들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가지고 있는 강의들은 간신히 론칭을 해 놓은 수준.
“참!”
떠오른 아이디어.
지금 떠오른 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아니었으니.
“선생님들께 직접 강의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뭘 어떻게 해.”
“좋아하실까요?”
“공짜로?”
“물론 아니죠. 흐흐. 지금 있는 강의들만큼 비싼 강의료는 드릴 수 없겠지만, 아마 당장 학교에서 받으시는 시급보단 높게?”
S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방식이다.
우리는 그들의 강의를 올리고 팔아 준다.
강사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알아서 수입을 가져가는 구조.
콘텐츠 사업에서는 이것만큼 편한 방식이 없다.
편하고 효율적인.
적절한 관리만 해준다면 여기서도 적용이 가능한 방식이다.
“오케이. 그건 나도 다른 선생님들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좋을 것 같네. 부수입이라.”
미국 교사의 월급이 적은 건 아니다.
게다가 학생 관리 등의 업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즉, 우리나라 교사만큼의 수입을 가지면서 일은 훨씬 편한 직업.
하지만 평생 직업이 아니다. 정년 보장이 없다는 의미.
또한 기본적으로 물가가 비싼 나라이기에 결국 같은 돈을 번다 하더라도 조금 쪼들릴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교사들 중 일부는 직업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가르치는 일로 수입을 두 배 늘릴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김준현 대리에게 계약서 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현지인과의 계약은 한성 그룹 차원에서 여러 번 진행해 본 일이 있을 테니 그쪽에서 잡아 주면 될 것이다.
김준현 대리는 카페 밖으로 나가 어딘가에 전화를 했고, 맥스와 나는 이런저런 계획들을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만 있던 계획들.
* * *
대략 한 달.
시간이 엄청 빠르게 흐른다.
일을 하지 않을 때와 일을 할 때의 시간은 개념 자체가 다른 것 같다.
1시간이 같은 1시간이 아니다.
맥스는 데이비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우리와 아예 상시로 함께하기를 결정했다.
첫 만남에 그의 말과 눈빛을 통해 느껴졌던 열정.
그는 그것을 온전히 우리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였다.
아직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김준현 대리와 나는 데이비스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한 달간 총 열두 군데의 학교를 돌아다녔다.
매번 수업을 구경했던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 수업 공개를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사실 지원재 실장이 미리 준비한 학교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거절당했다.
이 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의 대답은 ‘저도 연락은 다 했는데 허락받았던 곳들이 그 다섯 군데뿐이었어요.’였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홍보 활동을 거절하진 않았다.
데이비스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한성 에듀 강의 동영상 조회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인지도도 캘리포니아 내에서는 어느 정도 생긴 듯했고.
사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영리 목적이 아니고 무료로 제공되는 프로그램이기에 학교에서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학 진학률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수업과 교육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는 교사들이 많았다.
우리와 다른 모습이라 신기했지.
우린 수업도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데.
“오랜만이에요.”
누구냐고?
누구일까?
“네, 부회장님. 여기까지 먼 길 오셨습니다.”
“호호. 저는 가끔 왔던 나란데요. 오히려 유현덕 대표님이야말로 먼 곳까지 오셔서 고생이시네요.”
“고생은요. 나름 재미있습니다. 힘들어 죽겠지만.”
김미연 부회장.
마중을 나가야 하겠으나, 그렇게 하진 않았다.
나나 김준현 대리 말고도 이 정도 거물급이면 움직일 사람이 많았겠지.
재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그룹 회장 딸이니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닐 만했지만 그녀는 거의 보통 사람들처럼 다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두세 명의 경호원만을 대동하고 다니는 그녀.
내가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그리고 그간 준비했던 계획에 많은 수정이 있었다.
내 회사였다면 내가 수정을 하고 진행을 하면 되겠으나, 이 사업은 그녀가 주축이 되기에 여기까지 멀더라도 오기를 바라고 연락을 했다.
그녀는 흔쾌히 수락하고 바로 왔고.
우리가 만난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아니고 시 외곽 실리콘밸리 주변에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그녀는 ‘한성 에듀 미국 지사(Hansung Edu. Inc. USA)’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잠시 보고는 실내로 들어왔다.
“수정 계획은 들었어요. 괜찮게 진행될 것 같아요?”
“성공시켜야죠. 그리고 상의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죠?”
S 아카데미의 미국 진출 건.
미리 이야기는 해 두었던 부분이나, 자칫 시장이 겹칠 수도 있어 다시 확인을 받아야 했다.
겹칠 수 있어서 확인을 받기 보다는 사실 겹치지 않는 것을 설득시키는 자리.
그동안 한성 에듀의 사업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쥬튜브 조회 수는 강의당 평균 10만을 조금 넘긴 상황이었고, 총 강의 종류는 서른 개를 넘겼다.
그중 절반은 기존 방식대로 한 시간 분량 분절, 나머지 절반은 학교 수업 보조용으로 10분 분량으로 분절했다.
열두 곳의 학교에 홍보 활동을 할 때도 학생 홍보와 교사 홍보를 병행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생들보다 교사들의 반응이 더 좋았다.
“S 아카데미가 미국 홈스쿨링 시장에 진출할 예정입니다.”
“그건 이미 들은 내용이잖아요? 홈스쿨링 이야기는 처음 듣기는 하네요?”
“동일한 시장에 진출을 하면 쓸데없이 과열될 수가 있으니까요. 대입 시장과 학교 시장은 한성 에듀 중심으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쪽 사람들도 공짜는 좋아하더라고요. 게다가 우리나라보다도 PPL(간접 광고)에도 관대하고요. 애초 한성 에듀의 목적이 그룹 홍보인 만큼 촬영실에 와서 촬영하는 경우에 세팅을 전부 한성 그룹 제품으로 했습니다.”
“호호. 모니터링 하는데 봤어요. 웃기던데요, 그거? TV 드라마에서 광고하는 줄? 호호.”
“그만큼 한성 그룹 홍보를 위해 제가 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하. 그러니 홈스쿨링 시장은 S 아카데미 통해서 진행하도록 해 주세요.”
“그건 유현덕 대표님 판단하에 하셔요. 제 회사도 아닌데요.”
허락을 구하고 말고 할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 시장에서의 불필요한 오해나 경쟁은 피하려는 것.
“그나저나 푸글은 어떻게 되셨어요? 아직 동일한 상황?”
“네. 연락은 따로 없었습니다.”
“여기 제가 온 이유가 그거에요 사실. 푸글에서 교육 사업에 진출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요.”
뭐? 내 제안은 거절해 놓고 따로 진행한다고?
불안했던 부분이기는 했다.
그래도 따로 진행하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담당자 이름이 뭐였더라? 스미스?
그녀는 김준현 대리가 가져온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종이 한 뭉텅이.
또 일이구나.
그건 한성 그룹의 타 회사 동향 보고서 같은 것이었다.
나야 그런 것을 만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었으니 모르지만, 대기업들 사이에서는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이 치열하기에 서로 상대방 회사의 전략이나 향후 계획 등의 자료를 조사해 예측하고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다.
사실 한성 에듀가 공익사업을 표방하기에 경쟁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일은 없다.
다만 그룹 홍보 목적이 있어 너무 인기가 없을 경우 홍보 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면 들인 돈은 그냥 날아가는 것.
보고서 내용으로는 분명 푸글에서 교육용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운영할 업체를 선정하고 협의 중이었다.
우리가 아니라 다른 업체.
조건상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업체를 찾았을까?
이건 내 전생에도 없던 일이었다.
“다 읽었어요?”
“네.”
“대응은?”
“이걸 만든 사람은 뭐랬어요?”
“보고서요? 보고서 쓰는 사람은 보고서 쓰는 일만 하죠. 호호. 이걸 기반으로 정책팀이나 기획팀에서 대응 방안을 논의할 수는 있지만, 그쪽은 아버지가 전부 관할하시는 부분이라서요.”
생각을 좀 해 봐야 했다.
내가 미국에 온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
한성 에듀 타이틀로 쥬튜브에 올라가 있는 영상들의 인기는 오르는 중이지만, 앞으로 스마트 기기, 또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시장으로의 진입 없이는 한계가 따를 것이다.
애초에 그걸 위해 푸글과 접촉한 것이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듯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계획으로 밀고 나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더 빠르게…….
스미스, 이 사람…….
“대대적으로 또 한판 떠야 하겠는걸요?”
옆에서 내가 내려놓은 보고서 내용을 훑어보던 김준현 대리가 말했다.
말은 저리 편하게 할 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두려움이 앞섰다.
아니,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막막함일까.
푸글과 경쟁을 해야 하다니…….
“일단 스미스 이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의미가 있겠어요? 그쪽에서 거절하고 우리 뒤통수를 친 건데요?”
“의미가 있도록 만들어야죠. 대리님, 지금 우리 조회 수와 구독자 수가 어느 정도 되죠? 한 달간 결과는 나와 있죠?”
“매일매일 나옵니다. 통계 자료야 쥬튜브 자체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거 정리 좀 해 주세요. 스미스에게 연락해서 미팅 최대한 빨리 잡아 주시고요.”
“우리를 만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관계없어요. 우리가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고,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준비 중이라는 뉘앙스만 주면 되요.”
뉘앙스만 주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를 얻으면 일석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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