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110화.
“오.”
“아, 아닙니다. 대표님!”
“왜요? 하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맥스가 나를 툭툭 쳤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런가…….
“일 이야기……. 그러니깐! 내 생각엔!”
쿵!
“헐…….”
“시간이 됐네!”
“신데렐라 맥스.”
“맥스 타임이에요. 호호.”
말을 이어갈 것처럼 말하던 그가 갑자기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술이 굉장히 약한 친구구나.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마치 그럴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건너편 여자 선생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주 있는 일이에요.”
“술을 잘 못하나요, 이 친구?”
“잘 못해요. 호호. 숙소는 이 근처에요?”
여기 지리가 머릿속에 들어가 있지 않기에 어디로 가야 우리 숙소가 나오는지도 모르는 상황.
다행히도 김준현 대리는 알고 있다는 듯 “멀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은 알아서 잘 들어가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말했다.
“그럼요. 우린 다 근처에 살아요.”
“이 친구는 그럼 어떻게 하죠?”
“놔두고 가면 되요. 내일도 학교 오시는 거죠? 맥스가 하지 못한 일 이야기는 내일 학교에서 하셔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알아야 할 내용들은 거의 다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영상의 세분화.
수업 중간 중간 활용할 수 있도록 짧게 만들되 시간 단위로 끊기보다는 내용 단위로 끊어서 만들어야 할 거라는 생각.
그리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아이디어 하나가 더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뭐였더라?
* * *
의미 있던 고등학교 탐방.
그것도 첫 학교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건진 것 같았다.
우리나라보다 여기 학생들은 더 공부에 관심이 없다.
아무리 시장 자체가 크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숫자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당초 예상보다 이 사업의 효과가 적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인 부분은 바로 교사들의 관심이었다.
“강사들께 연락 다 하셨나요?”
“네…….”
“싫어하죠?”
“허허. 뭐, 일을 새로 다시 해야 하니 좋아하진 않죠. 그래도 어차피 강의료 지급되는 부분이니 설득은 했습니다.”
그나마 이게 다행이었다.
애초 학생 대상의 강의 제작을 목표로 했으나 소비자가 달라졌다.
학생 대상 기존 강의는 그대로 놔두되 교사들이 수업 중 사용할 수 있는 테마별 강의를 새로 제작하는 만큼 비용 소모는 거의 두 배가 될 것이다.
“비용은…….”
한참을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김준현 대리의 표정이 내심 썩 좋지 않았던 이유.
바로 수십 억 정도가 더 소요될 예정인 예산 초과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해결책.
“이건 제가 부담할 생각입니다.”
“네? 이걸…….”
“시장 조사 부족했고 강의 제작 방향을 완전히 잘못 짚었잖아요. 대신 너무 빠르게 진행하진 말고 두 군데 정도 학교 돌아본 뒤 결정하죠.”
수십억의 비용.
지원재 실장에게 약간 부담하라고 해야겠다.
미리 좀 방향 설정해 놓고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면 좋았을 것 아닌가.
가끔 보면 일부러 생고생을 시키는 것 같기도…….
이럴 때는 전화지!
“어? 한성 에듀에 전화하시는 겁니까?”
내가 밤늦은 시각에 전화기를 드니 긴장했나?
“아뇨. 지원재 실장님이요. 돈 좀 보내 달라고 하게요. 흐흐.”
“아, 돈이군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네, 지원재 입니다.
“실장님, 저 유현덕이에요.”
-네, 대표님. 잘 지내시나요? 거기 날씨 좋죠?
날씨 이야기로 돌리다니.
하지만 나는 할 말을 할 거다.
“날씨는 날씨고, 미리 좀 이쪽 전략 수정이 필요하다고 언질을 주셨어야죠.”
-하하. 아시다시피 저는 수정 권한이 없어서요. 그래서, 학교 탐방은 잘하셨습니까?
이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오광필 할아버지의 능글맞음을 닮아 가는 것 같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서인가?
내가 둘을 만나게 했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긴 했다.
생각해보면 학교 탐방도 지원재 실장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미 우리가 수정해야 할 것들이 뭔지 알고 있던 것 아냐?
치밀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역할만 딱 충실히 하고 과도한 개입은 피하는 사람인지 헷갈렸다.
“돈이 좀 필요합니다. 제 계좌에서 송금 좀 해 주세요.”
-방향이 잡혔나 보군요. 얼마나 송금해 드릴까요?
“일단 500만 달러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한화로 대략 60억 정도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깔끔하지?
내 돈이니깐 그런 거다.
게다가 어느 정도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할 때는 내가 내 계좌에서 돈을 빼다 쓸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 뒀던 이유도 있었고.
-방안이 뭔지 혹시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왜요? 비밀인데요?”
-알려 주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하. 준서와도 이야기를 해 보려고 했거든요. 이쪽 사업에도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푸글과의 협상은 완전 실패했고, 일단은 한국에서처럼 각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홍보 활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교사들로부터 먼저 오더군요. 그래서 이쪽은 아예 학교 수업에서 짬짬이 활용할 수 있도록 강의를 소단위로 쪼개서 진행하려고 해요. 쥬튜브를 통한 완전 공개로…….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장님은?”
-…….
수화기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도 내 계획에 대해 나름대로 계산중이리라.
나도 내 말이 끝난 뒤로 잠시 기다렸다.
잠시 뒤, 지원재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저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니 판단을 믿고 따라야 하겠죠. 참고 말씀만 드리자면…….
그렇지. 이게 내가 지원재 실장으로부터 기대했던 부분이다.
그의 가차 없는 직언.
물론 완전한 직언을 한 적은 없었다.
한 번도 내 계획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 동료라고 하니 갑자기 마음이 찡해지네.
어쨌든 이미도 원장, 주현필, 오광필 할아버지, 그리고 윤지 누나와 같은 다른 동료들이 나의 계획에 별다른 첨언 없이 동조하고 힘을 실어 준다면, 지원재 실장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키는데 거침이 없었다.
-현재 미국 교육 시장은 우리와 비슷한 공교육, 그리고 홈스쿨링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습니다. 물론 홈스쿨링의 비중은 훨씬 작긴 하죠. 다만, 홈스쿨링을 통해서도 고등학교 졸업 인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쪽 시장 조사도 한 번 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공교육 시스템에 들어가는 건 홍보 효과는 크고 경제적 효과는 보장할 수가 없으니 한성 에듀 중심으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고, 홈스쿨링과 조금 더 전문적인 강의를 제공하는 것은 S 아카데미 중심으로 진행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육 인증 허가를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더 학교처럼 체계적으로 커리큘럼을 짜 놓아야 하거든요.
사업의 이원화.
물론 애초부터 한성 에듀와 S 아카데미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그룹 홍보를 위한 공인 사업인 한성 에듀, 그리고 완전하게 영리적 사업을 추구하는 S 아카데미.
둘의 시스템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지원재 실장은 하나만 뚫지 말고 시장이 두 개 있으니 두 개를 각각 다른 업체로 뚫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양쪽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는 상황.
잘만 된다면 ‘일타쌍피’.
아니, 잘되게 만들어야 했다.
“가능……할까요?”
-왜 이러십니까.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하하. 이제까지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이뤄 낸 분이 아니십니까.
‘그건 내가 한 번 살았던 시대를 다시 사니깐 그랬던 것이고, 미국은 전혀 알지 못하는 신세계다, 이 사람아…….’
응? 그런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뛰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할 때와는 다른 어떤 느낌.
뭐라 표현해야 할까.
치트키를 써 가며 플레이하던 게임이 조금 익숙해지고 이제 치트키 없이 제대로 플레이하는 기분일까?
실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희열이 느껴졌다.
내 사업.
내 계획.
전생에는 내가 꿈도 못 꿀 일들이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
해 볼 수 있다.
모든 기반을 내가 만들어 놓았고, 이제 익숙해진 상태로 진정한 도전을 시작할 수 있다.
방금 전 통화를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루고 싶었던 일들을 모두 이룬 상태.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왔지만, 막상 목표에 도달하고 나니 그 다음 목표를 찾을 수가 없어 정처 없이 방황하던 나.
물론 방황까지는 아니지.
새로운 일을 벌이려 미국까지 넘어온 사람으로서 할 소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 느끼고 계획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며칠 간, 나는 내 사업이 아닌 일로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온전히 내 일, 나의 목표, 나의 꿈을 위해 달려도 먼 길인데 나는 남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뭐, 까짓 거 성공해 보죠, 여기서도.”
-그게 대표님 본모습이죠. 기대해 보겠습니다.
통화는 끝났다.
김준현 대리는 왔다 갔다 하면서 내 통화하는 모습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대리님.”
자, 미국에서의 첫 번째 내 일이다.
“네?”
“아까 만났던 선생님들 중, 맥스라고 기억하시죠?”
“아, 그 술 취해서 놔두고 온 친구요?”
“네. 그 친구 좀 데리러 가야 하겠습니다.”
“네? 지금요?”
지금 시각은 이미 11시를 넘겼다.
우리나라에서 11시는 술자리가 시작될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여기는 달랐다.
술집들도 대부분 닫는 시간.
“네. 산책 겸 나갔다 오죠. 흐흐.”
제3강 인생의 목표는 뭘까
“이걸 그만두고 같이 일하자고?”
우리의 제안을 들은 맥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당연히 그럴 만하지.
우리나라에서 한성 그룹은 지나가는 애를 붙잡고 물어봐도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한국 하면 미국인도 떠올리는 한성 그룹.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내 전생의 일이다. 그리고 아직 그 시점이 오지도 않았고.
물론 피처폰 업계에서는 한성 전자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스마트폰으로 넘어간 뒤의 그룹 명성에 비하면 아직이다.
그런데 한성 그룹이라니.
“네. 함께하시죠.”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는 거야?”
그의 표정에 거절은 아니지만 의아함이 잔뜩 묻어났다.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몇 년을 근무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럴 때는 반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시키기에 유리했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제안을 갑자기 나에게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하지만 그도 역시 쉽게 내가 흐름을 잡도록 놔두진 않았다.
나는 그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
‘당신은 내 거야.’ 하고.
“휴, 평생은 아니겠지. 나는 한성 그룹이란 회사에 대해 알지도 못해. 그리고 당신들도 잘 모르고. 게다가 당신 말대로 그 회사가 그만큼 크고, 이 사업이 훌륭하다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를 한 건지 모르겠어.”
거절이든 동의든 그의 속마음이 드러났다.
“누가 하든 중요한가요? 만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저의 사업에 흥미를 보여 준 것은 사실이잖아요?”
“흥미롭기는 하지. 구체적인 계획 없이 공부에 도움 되는 영상을 올리는 사람들은 많았어도 당신들처럼 ‘무료 공익사업입니다!’ 하면서 학교까지 찾아온 적은 없었거든.”
“어제 보여 드린 영상의 목적은 공익입니다. 그리고 여러 의견들을 받아들여 곧바로 영상 수정도 할 예정이고요.”
가만히 기다릴 시간.
“좋아. 그럼 내가 뭘 하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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