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109화.
그건 그렇고 이제 내 차례였다.
“전 현덕이라고 합니다. 근데 발음이 조금 어려울 테니 ‘현’이라고 불러 주세요. 한국에서 사교육 업체를 하나 운영했고, 이곳에는 한성 에듀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보신 동영상 같은 것 말이죠.”
내 소개는 이걸로 끝.
그리고 김준현 대리를 쳐다봤다.
그는 어떻게 소개를 하려나 궁금했다.
“아, 저는 김이라고 불러 주세요. 하하. 반갑습니다.”
뭐야? 이게 끝?
나보다 훨씬 오래 미국에 와 있던 사람이라 이 사람이 미국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궁금했지만 의외로 굉장히 빠르게 소개를 끝냈다.
황당해하는 표정까지 짓지는 않았지만 내심 조금은 당황했을까?
다시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번 정적을 조금 전의 나처럼 어색하게 깨기 전에, 맥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기는 하지만, 바로 업무로 넘어가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미국 오신 지는 얼마나 됐죠? 아까 보여 주신 동영상이 준비하고 계시는 프로젝트라면, 언제부터 학생들이나 우리가 접속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까?”
이 사람, 마치 교사가 아니라 사업가처럼 말을 하고 있다.
교사라고 사업가 같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색하기는 했다.
“이제 일주일……. 아직 안 됐습니다. 이번 사업은 순전히 공익 및 그룹 홍보를 위한 것이기에 사실 공립학교 선생님들께서 사용할 수 있으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아까 확인하신 대로 인터넷에 업로드는 전부 된 상태입니다.”
“내용이 좋으면 사용 못 할 건 없어요. 그리고 내용도 괜찮은 것 같지만 아직 전부 확인한 건 아니니깐…….”
제인이 말했다.
그러고는 맥스를 슬쩍 쳐다봤다.
무슨 의미였을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문제되는 부분은 없죠. 공개된 영상을 쓰는 거니깐요.”
“그렇죠? 호호. 근데 조금 길어요.”
하나의 강의는 우리나라에서처럼 한 시간 단위로 제작된다.
이건 순전히 강의를 볼 학생들 입장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는데 교사의 입장은 조금 다를 것 같기는 했다.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
이걸 만약 학교에서 사용한다면 이제까지 맥스스쿨, S 아카데미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도입해야 했다.
뭐, 사실 이번 홍보에서 교사들의 반응이 학생들보다 더 좋을 줄은 생각을 못했지.
그런데 어떻게 줄여 달라는 의미일까?
우리나라 교육방송 프로그램을 수업 시간에 틀어 주는 것과는 다르게 사용하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단순히 시간만 짧게 끊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고.
머릿속에서 갑자기 두 단어가 떠올랐다.
‘테마’ 와 ‘스토리’.
“긴 건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께서는 단순히 시간만 짧은 걸 원하시는 건 아니시란 생각이 드네요?”
“똑같은 방식으로 짧게 진행하는 거요? 그건 아니죠. 물론 아까 영상은 조금 길어 보이기는 했어요. 전부 다 듣는 학생들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제기랄.
내가 봐도 그랬다.
초반 부분만 흥미를 잠시 가지더니 곧바로 아주 극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각자 떠들기 시작했다.
집중력 문제.
이건 우리나라 학생들도 똑같이 겪고 있는 상황이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은 50분.
그리고 그 50분 내내 집중해서 수업을 듣는 학생은 거의 없다.
수업이 재미있고 재미없고를 떠나서 피교육자, 즉 교육을 받는 사람이 한 시간 동안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집중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강의의 질만 괜찮고, 팔리기만 잘 팔린다면 망하지 않는다.
아주 낮은 비율이라도 제대로 집중하고 성적을 올린 학생이 있으면 파이는 커진다.
이게 다 교육에 엄청난 관심을 쏟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여기는 다르다.
“생각 자체는 좋았어요. 그리고 초반만큼은 우리 학생들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았고요. 다만…….”
“피자 나왔습니다.”
중요한 시점에 주문했던 피자와 맥주가 나와 흐름이 끊겼다.
“술이나 먹어요, 맥스. 또 지루한 이야기만 하려고 그러네.”
“맞아, 맞아. 호호. 미스터 김? 당신은 왜 별말이 없어요? 원래 말이 적은 사람이에요?”
“에? 아뇨, 원래 말 엄청 많습니다. 하하. 저, 대표님, 한 잔 해도 될까요?”
그리고 같이 와 있던 여자 선생님들은 술이 나오자 더욱 내가 원하던 흐름의 반대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김준현 대리까지도 거기에 완전히 말려 버린 것 같았다.
이거,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분위기 반전인데…….
“마음껏 드세요. 여기는 제가 선생님들 모시고 온 자리니 제가 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죠!”
“화끈하네요!”
“좋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내가 분위기를 조금 띄웠다.
그러니 시종일관 차분했던 맥스도 맥주잔을 들고는 원 샷으로 한 잔을 다 마셨다.
지금 당장 일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었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기회가 또 있겠지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고.
“우하하하. 이 친구 재밌는데?”
‘재밌기는…….’
딱 세 잔.
그것이 이 진중해 보였던 친구의 주량이었다.
세 잔이 뱃속으로 들어간 것은 단지 10분 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내 등을 계속해서 때려 대며 웃고, 떠들고, 소리를 질러 댔다.
나도 웃고는 있는데 이 친구가 운동을 많이 해 왔는지 상당히 아픈 손이었다.
앞에 앉아 있던 여자 선생님 세 명은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고, 맥스의 반대쪽에 앉아 있는 김준현 대리는 당황스러워하는 모습.
하지만 어쩌겠는가. 술 취한 사람에게 뭐라고 해 봐야 기억도 못 할 것이고.
기억을 못 해?
단지 맥주 세 잔에?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대학을 다닐 때도 본 적이 있었고.
엄청나게 약한 주량으로 인해 정신 줄을 빠르게 놓는, 그런 사람들.
하지만 기분이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어제 처음 본 사람들이었고, 오늘 이런 술자리를 처음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마치 예전부터 내가 알고 지내 온 사람들같이 행동했다.
이때가 오히려 기회였다.
“크크. 그만 좀 때려, 맥스. 나도 같이 때려 버린다?”
“오우~ 코리안은 무섭지. 무슨 무술 같은 걸 어릴 때 전부 배운다면서?”
“무술? 태권도?”
“맞아! 그런 거.”
태권도를 대부분 배우기는 하지만 딱히 무섭거나 할 정도로 실전용은 아닌데.
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물론 술에 취한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겠냐마는, 그래도 실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어떻게 알아? 다들 배우기는 하는데…….”
“내가 외국인 학생 담당이잖아. 한 번은 한국 학생이 온 적이 있었어. 아! 물론 가끔 한국인들이 전학을 오고 가곤 해. 그래도 그 친구는 기억에 남지.”
도대체 그 한국인은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또 그 얘기네, 맥스. 이거 자주 하는 소리야, 우린 다섯 번도 넘게 들었어.”
“난 열 번도 넘게! 호호.”
정신이 하나도 없는 술자리.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처음인지라 자연스럽게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긴데?”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정말로 별것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가 예전에 한국에서 온 학생 한 명을 담당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하더라도 데이비스 고등학교에 인종 차별이 있을 때였기에 그 학생은 알게 모르게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차별을 받아왔던 것 같았고.
한국인들 숫자가 적었다.
그렇기에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어느 날 한 백인 소년들 무리가 이 학생에게 여느 때처럼 다가와 동양인 비하 발언을 했다.
거기까지는 다른 날과 동일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이 백인 친구들이 아주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새로 전학 와 이들 무리에 낀 학생 한 명이 한국 학생에게 먹고 있던 햄버거 종이를 집어던진 것이었다.
이 학생은 겉보기에 상당히 왜소했다.
사실 덩치 있는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동양인들이 체격적으로 우위에 서 있기는 어렵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얕잡아 본 것 같은데, 이 한국 학생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욕을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고 한다.
아무튼 그 백인 학생은 전학 온 지 사흘 만에 병원에 한 달을 입원하게 되었고, 한국 학생은 퇴학을 당한다.
별로 재미도 없는 이야기지?
나도 그리 생각했다.
테이블 건너편의 여자 선생님들은 한두 번 들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으니 아예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맥스는 혀가 꼬인 채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생각 좀 해 보라고. 한국에서 비슷한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면서? 여기는 여기만의 룰이 있는 거야.”
그리고?
이건 이야기의 흐름이 전혀 안 맞지 않은가.
한국 학생 이야기 하다가 갑작스럽게 또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또 저러네. 자주 저래요. 취했다는 거지. 호호.”
우리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귀는 열어 뒀던 것 같다.
호기심일까? 먼 나라에서 온 사업가들에 대한 호기심?
그나저나 룰은 무슨 룰.
하지만 생각을 할 필요는 있었다.
이미 성공한 모델을 그대로 해외에 가져 나와 똑같이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단순히 나의 착각이었다.
아까 떠올랐던 단어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수업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파트를 세분화해 달란 말이잖아요?”
“그렇지!”
별로 먹지도 않은 술에 얼굴이 이미 붉게 변해 버린 맥스.
붉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10분 정도 단위로?”
“좋지!”
“한 영상에 서너 개 이내의 개념 설명만?”
“굿!”
어쩌겠는가.
취객을 상대할 때는 어느 정도 장단에 맞춰 주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사실 별 관계도 없는 이야기보단 일 이야기가 편했다.
그런데 이 사람, 왜 이리 갑자기 업된 것처럼 보이지?
그제야 건너편에 앉아 자기들끼리 떠들던 여자 선생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대화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어느새 맥스와 나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
사실 이 자리에서 내게 필요한 내용들은 맥스가 전해 주고 있었지만, 학교에서 홍보 영상이 돌아갈 때만 하더라도 그가 가장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아예 눈에 띄질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튼 내 생각에는 평소에도 맥스란 이 사람은 그들의 스피커 역할을 해 왔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깐, 여자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가 내용을 정리하고 교감이나 교장 선생님께 전달하는 역할?
뭐, 이건 순전히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내가 필요한 사항들이 그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사실이다.
“실험 같은 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개념 설명이 많이 필요한 과목이야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실험을 하는 과목 같은 건…….”
맥스보다는 이건 화학이나 생물 교사가 더 잘 알 것이다.
건너편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던 선생님들에게 물었다.
“실험 영상도 있어요?”
“준비 많이 했나 보네요? 이게 운영이 가능하긴 해요? 수강료를 받아서 운영하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사이트 들어가 보시면 있을 겁니다. 하하. 운영이야 뭐……. 제가 돈 조달하는 건 아니니깐요.”
운영비는 내가 내는 게 아니라 한성에서.
슬쩍 김준현 대리를 쳐다봤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무서운 여자들.
여자들은 때때로 남자들이 전혀 캐치하지 못하는 순간을 캐치한다.
“돈은 미스터 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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