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108화.
방금 전 내 입에서 나온 ‘울상’이란 단어의 여파인지, 그는 표정으로 ‘그걸 아시는 분이 푸글에서 그리 깨지고 오셨습니까.’ 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푸글의 거절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당황스럽긴 했다.
하지만 내가 그간 성공한 이유는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남들이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을 기억으로 조금 가지고 있고, 그것을 써먹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 컸다.
그리고 그 동분서주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번의 실패는 내가 나의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었고, 이제 다시 나의 스타일대로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죠, 대리님. 두 번은 안 합니다.”
마치 신성 학원 입사 면접 때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의 앞에서 보여 줬던 것과 같은 자신감.
이것이 내 힘이다.
앞으로의 미래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리고 어쩌면 크게 성공할 회사의 주식 몇 개를 더 사 두는 것이 돈은 더 많이 벌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 내가 직접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은 다르다.
김준현 대리가 나와 함께 갈 수 있을까?
아직 모른다.
사람 일은 누구도 모르는 일.
지원재 실장이 강재훈 대표를 배신했고(내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지만), 내가 무너뜨린 강재훈 대표를 내가 다시 학원장으로 채용했다.
강재훈 대표의 사생아였던 이미도 원장이 그가 평생 이뤄 낸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한때 내가 근무하던 신성 학원과 적대 관계였던 성공 대입학원을 내가 가지고 있다.
김준현 대리가 어떤 사람인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나와 함께하는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기에, 나의 계획에 동의를 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겠지.
“여기는 S 아카데미의 대표로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쪽 일은 저보다 더 훌륭하게 운영해 줄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긴 상황이고, 지금 저는 한성 에듀의 이사로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제 머릿속에는 한성 에듀의 미국 시장 진출 성공 여부밖에는 없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왜 굳이 믿어 달라는 말을 했을까.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에게는 한 번도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내 계획을 듣고 내가 마음껏 움직이도록 놔둔 채로 지원만 해 줬으니.
뜬금없이 튀어나온 ‘믿어 달라’는 말, 이걸 김준현 대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에는 내가 자신의 회사인 한성 에듀 규모의 다른 사교육 업체 대표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그에 대한 신뢰가 아직 없는 것처럼, 그도 나에 대한 신뢰가 없고, 만약 그렇다면 직원 몇밖에 없는 이곳에서의 사업은 성공하기 어렵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간 그게 약간 걱정됐었는데……. 앞으로는 이사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는 나에게 줄 곳 ‘대표님’이라고 불러 왔다.
그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아마 자신의 회사 이사 역할을 할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내가 무심했다.
내 잘못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간 맘고생 좀 하셨나요?”
사실 이건 긴가민가한 부분.
김준현 대리가 오늘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어두운 모습을 보였던 적이 없었기에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그가 나에게 말을 했다는 것은 이전에도 그 생각을 했다는 것이고, 며칠 되진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이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예측이 맞았다.
이미 다 정황이 나온 상황에서 예측이라 표현하기도 민망하지만.
“사실 아직도 이만큼 성공하고 돈도 많은 분이 여기에 와서 이 일을 하시는지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뭔가 다른 일을 위해 이력에 이사 직함 하나 더 넣으려고 하시는 건 아니라고 하시니, 믿고 한 번 해 보죠!”
다른 일?
어떤 일 말인가?
“다른 일이요?”
“크…….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이사님께서 적극적으로 끌고 나가 주신다면 저도 이사님께 한 번 걸어 보렵니다.”
“네. 저에게 걸지 마시고 의견 있으시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이쪽 지역 전문가는 제가 아니라 대리님이시니깐요.”
여기까지가 바로 몇 시간 전 그와 내가 나눈 대화였다.
밤을 꼬박 새워서인지 몸이 막 뻐근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졸리지는 않았다.
영상을 보는 학생들의 반응은 가지각색.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긴장한 내 표정을 보고 김준현 대리도 긴장하는 것 같았다.
“Not bad. I can use that site for my class. (나쁘지 않은걸. 내 수업을 위해 저거 써 먹을 수 있겠는데.)”
“Right. If I can modify it a little. (맞아. 약간만 개선할 수 있으면.)”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앉아 있는 곳은 체육관의 좌석.
그리고 교사들과 우리는 아래쪽 경기장 안에 있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를 듣고 그쪽을 쳐다보자, 교사 두 명이 나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슬쩍 그들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You think so? (그렇게 생각하세요?)”
“Yes. As I said, if there’s a little modification. (네.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만약 약간의 수정만 된다면요.)”
“What modification?(무슨 수정이요?)”
“I think the lecture should be parted into smaller fragments. (내 생각엔 저 강의가 조금 더 작은 요소로 분할되면 좋을 것 같아요)”
“parted? (분할이요?)”
“Yes. Divided, in other words. (네. 나뉘는 거요, 다른 말로 하자면요.)”
세분화라.
확실히 우리나라와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학교 수업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방식의 강의를 추구했던 것이 S 아카데미와 맥스스쿨의 전략.
그렇기에 각 강의는 한 시간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방금 내가 들은 이야기로는, 이들은 세분화시켜 수업 자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영상을 원한다.
이들이 원하는 건 단순히 짧은 시간으로 쪼개진 부분들이 아니라, 내용별로 간단하게 참고할 수 있도록 분할된 영상일 것이다.
자세한 건 더 들어 봐야 알겠지.
“끝나고 인사 자리가 있습니다. 그거 마치고 퇴근 후 맥주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요?”
“끝나고요? 좋아요. 그런데 둘이서만?”
젊은 백인 여성 교사.
따로 보자면 아마 조금 불편하겠지.
나는 김준현 대리를 슬쩍 보고는 다시 그에게 대답했다.
“아뇨.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저 친구 데리고 갈 거예요.”
“아하. 순간 기대했는데. 호호. 알겠어요.”
뭘 기대했다는 거지?
그리고 우리고 이런저런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20분짜리 데모 강의 동영상은 끝이 났다.
박수 소리는 들렸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반응보다는 작았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마음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마찬가지인가 보다.
* * *
술집으로의 안내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선생님들이 했다.
나와 김준현 대리는 쫄래쫄래 그들을 따라갔고.
이곳에선 우리가 이방인이다.
그들이 Downtown, 즉 시내라고 부르는 곳은 단어답지 않게 굉장히 한적했다.
학교 주변보다 사람들도 많고 영화관도 한 곳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바로 옆 UC Davis 대학 내에 주차를 하고 나서, 입구 쪽에 있는 서점과 음식점 몇 개를 지나자 메인 스트리트가 나왔다.
메인 스트리트라고 해 봐야 왕복 4차선 도로가 끝.
4차선이라고 해 봐야 양 사이드 한 줄은 주차된 차들로 꽉 차 있어 결국 2차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다 이래요?”
앞서 가는 네 명의 교사들을 뒤따르던 나는 조용히 김준현 대리에게 물었다.
“네? 뭐가요?”
“시내라고 했는데 여기는…….”
“에이, 참. 여기 도시 크기 보셔요. 들어올 때 소똥 냄새 못 맡으셨어요? 작은 동네니깐 이 정도 시내도 감지덕지해야죠.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요. 위험하거나 밤 되면 밖에 못 나오는 곳은 아니니까요.”
하긴, 그의 말이 맞기는 한 것 같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대부분도 대학생들로 보였고, 그 말은 곧 삶의 수준이 낮지는 않다는 의미였다.
우리와 다르게 미국은 대학 진학률이 상당히 낮다.
고등학생의 학력 수준도 우리보다 낮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도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각하기 쉬운 것이 바로 고등교육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가인데, 그건 아니다.
일단 대학 등록금을 부담할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하고, 애초에 대학 교육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는 가정에서 초중고를 다닌 사람들이다.
아무튼 그의 말대로 동네 자체는 매력이 있었다.
딱히 뭐라 표현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사람들 표정에 드러나는 ‘여유’가 아닐까?
“여기요.”
앞서 걷던 여자 선생님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피자 가게.
피자 가게에서 술을? 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피자와 술의 조합은 괜찮을 것 같다.
느끼한 치즈에 속이 조금 더부룩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의외로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고?
모르지.
내부는 아담했다.
작은 시골 마을의 테이블 네 개가 전부인 작은 피자 가게.
가장 안쪽의 테이블이 우리 여섯이 앉기에 적절해 보였다.
“조그만 피자 가게네요?”
“여기요? 여기가 유일한 피자 가게에요. 호호.”
동네에 있는 유일한 피자 가게라…….
“아! 여기 말고 마트에서도 피자를 팔기는 하죠. 편하게 맥주랑 같이 먹을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
같이 온 다른 남자 선생님이 말했다.
사회 선생님이었나?
일단 우리는 자리에 앉았고, 갑자기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사실 이렇게 자리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지.
한국에서 온 사교육 사업가 한 명, 한국 대기업 계열사 직원 한 명, 그리고 미국 공립 고등학교 교사 넷…….
“우리 소개부터 할까요?”
“네?”
젠장.
정적을 깨고 꺼낸 내 첫마디였다.
어색해서 말을 하긴 했는데 이게 무슨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내 옆에 앉은 김준현의 표정을 보니 실수가 확실해 보였다.
“소개? 호호.”
“하하. 저는 윌리엄입니다. 빌이라고 불러 주세요.”
‘다행이다. 다행이 어색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다.’
“저, 과목은 어떤 걸 맡고 계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내가 소개라고 굳이 표현한 건 각각 어떤 과목을 가르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이들의 제안, 아니면 이들의 생각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 세계사 가르칩니다.”
“전 제인이에요. 생물 가르치고요. 나이는 스물아홉? 호호.”
“응? 나이도 말해야 해?”
“내가 초등학교에서 애들 가르쳤잖아. 호호. 한국에서 온 아이들은 자기 소개할 때 나이를 꼭 말하더라고?”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놀리려고 말한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보이기로는 우리 중 가장 젊은 백인 여성, 그리고 분명히 미인이라 할 만했다.
“나이는……. 괜찮아요. 하하. 아……. 이거 어색하네요.”
“괜찮아요. 저는 줄리입니다. 화학 가르치고요.”
“맥스입니다. 물리와 외국인 학생 담당이죠.”
‘두 개를 한꺼번에 맡는다’라…….
우리나라 학교라면 과목은 물리고 담당 업무는 외국인 학생 담당이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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