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107화.
“잘된 거죠?”
전화가 끝나고 나서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나에게 김준현 대리가 지나가며 물었다.
“네. 준비되는 대로 바로 영상들 공개하시고, 그리고 혹시 인쇄 업체 아는 곳 있으셔요?”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단지 내일 학교에 인쇄물을 돌리는 건…….”
“그건 어렵겠죠. 내일은 그냥 양해 구하고 PPT로 홍보만 하는 것으로 계획 잡읍시다. 인쇄물이라도 있으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 바빠지실 겁니다.”
그치.
일단 캘리포니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한반도 면적이다.
인구수야 우리보다 적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학교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곧, 홍보 기회도, 그리고 홍보 효과도 무궁무진할 거라는 의미였다.
애초 계획대로 푸글과 제플의 기본 어플에 한성 에듀와 S 아카데미를 집어넣는 건 일단 무리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멈추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물건은 나와 있고, 팔아 줄 가게가 없다면 직접 팔면 되지.’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있었다.
일단 돈을 받고 팔 계획이 아니었기에.
공짜를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아무리 시장이 미국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나와 김준현 대리는 둘 다 다음 날 아침까지 밤을 꼬박 샜다.
갑작스런 계획 변동에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조금이나마 나오면 좋겠는데.
“아흑. 해가 뜹니다. 아함…….”
“고생 많으셔요. 조금만 더 힘냅시다!”
김준현 대리는 새로 들어와 있던 동영상 편집과 사이트 홍보 문구 수정을, 그리고 나는 오후에 학교에서 참관이 끝난 뒤 홍보 발표를 할 내용을 만들었다.
해가 뜰 때까지 우리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이제 학교로 출발해야 할 시각이었다.
하지만 몸이 마음도 상당히 지친 상태.
그는 소파에 드러누워 뻗어 있었고, 나는 밤새 마신 커피 덕분인지 아직 정신은 괜찮았다.
실로 오랜만에 이렇게 죽자고 달리느라 힘은 드는데, 뭔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런 생활을 그리워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숙소 밖으로 나와 아직은 낯선 풍경을 눈에 담았다.
건물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답답한 모습이 아닌,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넓은 땅과 나무, 그리고 멀찍이 숲에 반쯤 가려 지붕만 보이는 3층짜리 집들.
‘여유’란 이런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 봐야 같은 풍경만 계속되는 도시에서 살다 보니, 주변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일’이라는 것에, 그리고 ‘삶’이라는 것에 지긋이 담가 놓고 없는 것인 양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 * *
성공 대입학원을 유현덕에게 넘긴 뒤, 김윤지는 곧바로 살던 집까지 정리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현덕은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당장 그의 곁에 있기가 힘들었다.
곁에 있으며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마치 좋지 않은 신호처럼 그녀에게 다가왔고, 마음이 잡힌 김에 서둘러 떠나야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연락할 가족도 이젠 없었다.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조규만은 자신의 유일한 혈육 같은 사람이었고, 이제 그마저 죽은 지금은 그녀가 마음을 놓고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었다.
유현덕?
소중한 사람이나 아직 그에게 자신의 문제를 놓고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티켓 보여 주세요.”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윤지는 미리 손에 들고 있던 티켓을 그녀에게 보여주었고, 그녀는 탑승 일시와 탑승구를 확인하고는 다시 돌려줬다.
유현덕과는 다르게 그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자라와 몇 번은 와 봤던 공항이었다.
사실 그를 만나기 바로 전, 그러니깐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니던 대학도 미국에 있었고.
외삼촌 조규만의 일을 도와주기 시작하면서는 외국에 나갈 일이 없었기에 몇 년 만에 온 공항이었지만, 그래도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다고 해야 할까?
김포공항은 여러 번 가 봤으나, 인천국제공항은 두 번 정도밖에 온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비행기를 탄다는 것, 그 자체는 익숙한 일이었다.
“하아……. 결국 다시 가는 거네. 5년 만인가?”
성공 대입학원을 유현덕에게 넘기며 받은 돈, 그리고 그간 벌어 놓은 돈은 많았지만, 비즈니스 석은 딱 한 번 타 봤는데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뭔가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어보고, 가격은 쓸데없이 비쌌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생각하면 조금 넓다는 것은 확실히 큰 이점이겠으나, 사업상 가는 것도 아닌데 비즈니스 석을 타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누가 이걸 평가하랴.
놀러 가는 데도 돈만 많으면 편한 곳 선택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이코노미 석을 선택했다.
좁고 불편하나,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꿈을 가지고 타는 곳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은 날씬한 백인 남성이었다.
만약 덩치 있는 남성이었으면 조금 불편했을 수도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Sorry. That is my seat. (미안해요. 저쪽에 제 자리에요.)”
“No problem. (괜찮습니다.)”
그 남자는 몸을 비틀어 가며 그녀를 피해 창가 쪽 자리로 들어갔다.
체형이 딱 유현덕 정도, 그리고 어찌 보면 생김새도 조금 닮은 듯했다.
지금쯤 한참 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후련했던 마음이 조금은 답답해졌다.
앞쪽에 꽂혀 있는 면세품 홍보 책자를 꺼내 아무 생각 없이 몇 페이지 넘겼다.
사고 싶은 것.
특별히 그런 것도 없기에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기가 어색해 한 행동이었다.
그냥 페이지에는 새로 나온 휴대폰과 MP3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리고,
“Ms., That would be a good choice. (여성분, 그건 괜찮은 선택일 거예요.)”
방금 전 창가 쪽으로 들어가 앉은 백인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 *
“이건 저희가 지금 준비 중인 교육 동영상 사이트입니다.”
말을 마치고 김준현 대리를 바라봤다.
그는 곧바로 내 신호에 맞춰 익스플로러 창의 띄우고 저장해 둔 쥬튜브 페이지에 접속했다.
잠시 뒤, 노트북 화면과 학생들의 앞에 있는 스크린에 동시에 생물학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한 강사, 그러니깐 우리 입장에서는 강사지만 UCLA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이 강의를 진행하는 모습이 나왔다.
물론 새벽 내내 작업한 한성 그룹 로고와 홍보 영상이 짤막하게 들어가 있는 영상이었다.
전날, 나와 김준현 대리는 현재 보유한 강의들을 거의 다 틀어 보며 어떤 것을 선택해 홍보에 사용할지를 논의했다.
중요한 건 일단 강의 내용 자체보다도 학생들의 흥미를 확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임팩트가 있는가였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영어 전공이다 보니 영문학 강의가 볼 만했으나, 자칫 지루해질 거라 생각해 홍보에는 쓰지 않기로 결정.
결국 두 개의 강의가 선택되었다.
우선 다양한 플라스크에 화학 약품들을 이리저리 섞어 보는 화학 강의, 그리고 살아 있는 기니피그가 나오는 생물 강의였다.
“어떤 게 더 낫겠어요?”
“글쎄요. 화학 강의가 신기하기는 한데 관심이 없으면 이것조차도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용액 섞어서 반응 보는 건 좋은데 일단 확 와닿지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하긴, 공부 안 하는 애들한테 용액 섞는 것 보여 줘 봤자지.
그런데 그런 학생들에게는 뭘 보여 줘도 반응은 같다.
우리는 그쪽을 노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할 녀석들에게 홍보하는 것이 목적.
하지만 화학 강의는 호불호가 너무 분명할 것 같았다.
딱 봤을 때, 이렇게 말하자면 남녀 차별이니 뭐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강의는 남학생들 중 화학 좋아하는 학생들, 또는 호기심 많은 학생들만 찾아 볼 스타일.
그리고 어느 나라나 남학생보다는 여학생이 공부에 관심이 높다.
물론 게임을 제외한다면 여학생들은 대부분의 분류에서 남학생들보다는 관심이 많지만…….
“그럼 생물로?”
“콜!”
“콜이라니. 이거 준비는 결국 대리님께서 하셔야 하는데요.”
“아, 네. 알겠습니다.”
회의 때는 상당히 밝은 사람이다.
자기 의견도 적극적으로 내는 편이고, 대부분 타당한 것들이다.
그런데 일을 진행할 때는 조금 버거워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이건 미국 생활을 오래 해서일까?
아니, 나도 약간 그런 걸 생각하면, 나와 비슷한 부류일까?
아무튼 그는 다시 시무룩해져 자신의 노트북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걸로 갖다 주면 저 사람이 조금 힘을 내려나…….’
일단 쥬스는 한 통 있고, 커피는 내가 많이 마시지 김준현 대리는 거의 입에 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쥬스 한 잔 갖다 주면?
“이거 좀 드시고 열 식히면서 하세요, 대리님. 고생 많으세요.”
그는 잔을 받아 들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타지에서 아직 새파란 녀석 뒷바라지해 주시느라 고생이십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조금만 힘내 주세요.”
고맙다는 말 한 번 듣기 힘들구나.
그런데 그는 끝까지 고맙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와 만난 이후 한 번도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고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뭔가 그 속에 끓는 무엇인가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고 있는 듯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답답한 나머지 내가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표님.” 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조금 특이한 사람인가?’
이럴 때는 차라리 주현필이 그리운데.
그 사람은 거칠어도 반응이 재깍재깍 와서 오히려 편했다.
생각이 많은 사람, 또는 신중한 사람은 실수를 잘 하지 않지만, 반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 것 같다.
잠깐, 이건 누구 이야기인데…….
내 이야기였다.
지원재 실장은 몰라도, 이 사람, 나랑 조금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럼 이제 생각을 마친 그에게서 뭔가 말이 쏟아져 나올 시점인데?
“대표님.”
역시나, 내 말이 맞지?
“네?”
“푸글이나 제플과는 같이 안 하는 걸로 결정하신 겁니까?”
“아뇨. 근데 그건 왜요?”
“갑자기 노선을 완전히 바꾸신 듯해서 말입니다. 강의 동영상도 다 공개해 버리면 나중에라도 쓸 것들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이거 만드느라 그간 어떤 고생을 했는지 모르시잖아요.”
이 사람, 그걸 걱정하고 있었구나.
그럴 만도 했다.
사실 지원재 실장이 기업들과의 협의는 대부분 도맡아서 했을 것이고, 방금 그가 한 말로 미루어 보았을 때 강사들 구하고 강의 촬영해서 모아 둔 건 김준현 대리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렇게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사정하면서 모은 자료들을 확 푼다는 사실이 불편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한성 에듀에서도 노리는 것은 기본 어플에 한성을 집어넣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푸글과 제플의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모든 스마트폰으로 한성을 홍보할 수 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으니 이러고 있는 거지.
“그것 때문에 계속 울상이셨던 거예요?”
“네? 울상……. 아닙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에게 듣는 ‘울상이었냐’는 말은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전생의 내 나이로 따지자면 그는 나보다 아직 젊은 친구였다.
뭐, 이 사실을 그가 알 리는 없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걱정하지 마세요. 강의는 계속 추가시켜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수량은 한국에서 한성 에듀가 진행하는 강의 개수의 10분의 1도 안 돼요. 일단 중요한 건 성과입니다. 이쪽에서 보여 줄 성과가 나와야 푸글이나 제플과 협상할 여지가 생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