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105화.
학교는 생각보다 컸다.
아니, 크다고 표현하기보다는 넓다고 해야 할까?
건물 안에 모든 교실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교와는 다르게, 각 교실들은 중앙에 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빙 둘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학 교과들이 모여 있는 건물, 사회 교과들이 있는 건물, 미술 교과들이 있는 건물 등, 건물별로 교과를 나누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외관적인 차이점들.
내일은 아마 수업들을 참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머릿속에는 아직 푸글이 남아 있었다.
이제까지의 경험상 실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랬을까? 타격이 생각보다 컸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뭘 혼잣말을 그리 하십니까?”
임시 숙소로 잡은 모텔에서 나와 김준현 대리는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돈이야 많긴 한데, 이 작은 마을에 별이 달린 호텔이 있을 리 만무했고, 어차피 작은 곳으로 갈 생각이라면 작은 돈이라도 아끼자는 생각으로.
따로 방을 잡으리라 생각했는지 김준현 대리는 약간 입을 삐죽거렸다.
“아니요. 그냥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한 거죠. 그리고 이건 내리막도 아니잖아요, 대표님은. 돈도 짱짱하시고, 무슨 사업이라도 가능할 만한 돈이 있으시면서 뭔 걱정스런 표정이십니까.”
그의 말이 맞긴 했다.
돈이 부족한 건 아니었고, 이번 건은 단순히 욕심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 생각했건만…….
어쩌면 잦은 성공에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리라.
사실 처음 신성 학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꽤나 준비하고 가지 않았는가.
그에 비하면 오히려 더욱 더 준비하고 들어갔어야 할 푸글에는 막상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다.
오만이겠지.
앞으로의 일이라…….
머리를 굴려야 했다.
최근 벌어진 너무 많은 일들로 머리가 멈춰 있었다.
자, 이제 생각하자, 현덕아.
“김준현 대리님? 어차피 내일부터 학교 참관하고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요. 푸글에서 왜 우리 제의를 거절했다고 보시나요?”
교육 쪽 전문가는 나겠지만 이 지역 전문가는 김준현이다.
뭔가 고심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명쾌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거죠.”
“아…….”
“대표님 미국 오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제 일주일도 안 됐잖아요.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푸글이랑 협상이 가능하시리라 생각하셨습니까?”
맞는 말이기는 한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말.
이거, 누구를 닮은 것 같은데, 이 사람?
“돈 안 줘도 되니 넣어 달라고만 하는 거면 가능하리라 생각했죠. 그쪽도 기본 어플이 부족할 테니…….”
“그렇다고 우리가 시제품을 가지고 보여 준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아마 스미스도 지금쯤 바쁘지 않을까요? 제플 정보를 흘렸으니 말이죠.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네? 뭘요?”
“제플에서 교육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란 거요. 기사 검색해 봐도 전혀 언급된 적이 없는 내용인데…….”
‘죽었다 과거로 돌아오면 알 수 있습니다.’
“글쎄요. 그냥 그렇지 않을까 싶었어요.”
애매하게 얼버무렸지만 믿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사업은 정보력에 좌우된다는 말.
나야 사업적인 마인드는 제로에 가까웠지만, 말 그대로 내가 가진 전생의 기억이라는 정보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는데.
김준현 대리의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미국 내에서 한성 에듀를 써먹을 방법은…….”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 한성 에듀 강의가 사라진 것도 아닌데요. 콘텐츠는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영리사업도 아니니 홍보 효과만 제대로 가져오면 되는 거고요.”
“홍보…….”
홍보라.
도대체 플랫폼 중심 사회에서 플랫폼 없이 무슨 홍보를 한단 말인가.
광고판에다가 홍보 하나 올리는 것만 해도 돈인데.
이미 강의 대금으로 다수의 강사들에게 많은 돈이 지불된 상황이니만큼, 뭔가 결과물이 있어야 할 것인데.
“내일 학교 가서 참관이나 편하게 하시고 생각하시죠.”
“학교…….”
그리고 학교라는 단어에서 뭔가 떠올랐다.
이제까지 내가 성공만을 하다 보니 눈이 정말 멀었던 것.
우리나라에서 신성 학원을 홍보할 때를 왜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네.
맨땅에 헤딩으로 이만큼 이뤄 낸 것이 아닌가!
“학교!”
“아이고. 깜짝이야.”
* * *
아침이 밝았다.
몇 년 만에 가 보는 고등학교인지.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겪은 고등학교 생활이 아니라 미국 고등학교다.
전생에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사업차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긴 하다만 흥분되는 기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기분 좋으신가 봐요?”
“네? 그냥 그렇죠. 하하.”
푸글과의 협상(그걸 협상이라고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이 결렬된 후 한껏 우울감을 풍기던 내가 확 달라지니 김준현 대리는 조금 이상한가 보다.
모텔 화장실은 하나였기에 후다닥 대충 씻고 나서 김준현 대리가 뒤를 이어 들어갔다.
그래도 깔끔함을 유지한 모텔이라 다행이지.
가만히 앉아 그를 기다리다 어제 정리한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자, 신성 학원에서나 여기서나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자. 너무 건방떨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면 되는 거야. 푸글이나 제플이나 지금 당장 한성 에듀의 제안을 받아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유는 이쪽에서의 성과가 아직 전혀 없기 때문.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이 정도를 해낼 수 있다는 역량을 보여 준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다. 그쪽에서 돈 싸 들고 찾아올 수도 있고.’
그리고 그와 함께 데이비스 고등학교로 출발했다.
* * *
“수업 참관은 각 과목당 한 시간씩입니다. 우선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순으로 진행하도록 하고, 추가적으로 내일은 체육과 직업 교육을 보도록 하죠.”
이런 일에 능한 사람인지 언변이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우리 안내를 맡은 사람은 어제 우리가 찾았던 케니 에르난데스.
30대 후반의 히스패닉 계 미국인으로 추정된다.
추정?
추정이라고 표현한 건 직접 대고 ‘당신 어디 출신이요?’ 하면서 물어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
이곳에서 그건 실례다.
그를 따라 학교를 돌아다니며 수업을 참관했다.
역시나 수업은 졸리다.
여기는 다를까 싶기도 했지만, 사실 미국 교육 시스템은 우리나라에서 본받을 만한 건 아니다.
경제 시스템이라면 모를까.
신세대의 90% 이상이 고등학교 교육을 이수하는 우리나라에 비해, 미국은 그 비율이 훨씬 낮았다.
그리고 대학 진학률은 더욱 낮았고.
따라서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률이 우리보다 높은 국가이다.
문맹?
이건 조금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이게 사실 글자 자체를 못 읽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글을 읽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맹이고 아니고를 판단하는 기준.
“하암…….”
김준현 대리는 연신 하품을 내뿜었다.
나는 중간 중간 그를 쿡쿡 찌르며 ‘그러지 마세요.’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실 나도 졸려 죽을 지경이었다.
특히나 영어 시간은 정말 절정이었다.
이게 첫 참관 시간이라 다행이지, 만약 마지막 시간이었다면 나도 하품을 엄청나게 했겠지.
“이것으로 영어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죠.”
영어 시간은 우리나라 국어 시간과 유사했다.
다만 특이했던 건,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책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는 것.
우리도 교과서 내에 수많은 문학들이 실려 있고, 그것을 공부하지만, 이들은 그게 아니라 아예 책 자체를 들고 수업을 받았다.
복선을 찾고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신이 읽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다른 친구들과 느낀 점을 토론하는 장면에서는 나름 인상 깊었다.
우리와는 분명 약간 다른 방식의 수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재미는 없었다.
수학 시간은 더 했다. 별로 논할 거리가 없었다.
이런저런 그래프로 뭘 하는데,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놀라웠던 건 그게 대수학 시간에서 복소수 i를 설명하는 방식이라는 것 정도?
그냥 외우면 되는 건데 왜 저리 복잡하게 하나 싶었으나, 이게 원래 방식인데 우리는 너무 단순하게 처리하고 있던 것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준현 대리는 아예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그를 깨우기를 포기했고.
다음은 기다리던 과학 시간.
내가 요즘 관심을 두던 것이, 영어 자체를 가르치는 것보다도 영어를 써서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몰입 교육이었다.
물론 이걸 주장하신 대통령은 실패했지. 하지만 영어만 놓고 보자면 그만큼 좋은 교육 방식이 없다.
그래서 과학 부분은 흥미롭기도 하고, 궁금했다.
“오늘은 우리 예정대로 해부를 실습해 볼 겁니다.”
뭐라고? 해부?
“자, 두 명만 나와서 도와주면 좋겠는데…….”
그리고 내가 손을 들어 버렸다.
참관을 하러 온 사람이 도와준다고 손을 들다니…….
나도 참 어이없는 짓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참여를 제대로 해 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뭘 가지러 가는데 사람이 필요하던 거지?
“하하. 미스터 유. 도와주시겠어요? 참관만 하러 온 분이라고 들었는데.”
“하하하.”
교실은 다들 웃음바다가 되었고, 나도 멋쩍은 웃음을 짓고 앞으로 나갔다.
반면 김준현 대리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케니는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하고 싶었습니다. 해부를 정말 하나요?”
앞으로 나간 내가 살짝 과학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녀는 씩 웃더니 다시 나에게 반문했고.
“한국에서도 하지 않나요? 해부 정도는…….”
“아, 저희도 하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뭘 해부했던 기억은 중학교 때 개구리를 해부한 것 정도?
아! 하나 더 있었다.
조개를 해부해 본 적이 있긴 했다.
조개 해부라니. 매일 된장찌개 끓이면 나오는 조개를 뭣 하러 해부했단 말인가.
그녀를 따라 교실 안쪽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외부에서 보면 창고인데 안에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쾌적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어서인가?
벽을 빙 둘러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책상과 컴퓨터.
개인 교무실 같은 모습이었다.
안쪽의 아이스박스를 가리키기에 내가 먼저 들어가서 그걸 들고 나왔다.
꽤나 무거웠다.
여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뭐가 있는 거죠?”
그녀는 내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실 가운데로 나갔다.
“자, 각 조에서 한 명씩 앞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미스터 유?”
“네?”
“아이스박스에 담긴 비닐봉지를 전달해 주시겠어요?”
나는 조심스레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안쪽에서 냉기가 확 뿜어져 나오고, 약간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허연 김이 나오는 걸 보니 드라이아이스 같은 것으로 온도를 유지했던 것 같았다.
안쪽이 제대로 보이질 않아 입으로 후 불었고, 아이스박스에 들어 있는 것의 정체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돼지…….”
“새끼돼지에요. 살아 있는 걸 막 사용할 수는 없어서 태아 상태의 것을 처리한 후 가져온 거죠.”
돼지를 해부하다니.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먹는 그 돼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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