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104화.
“저는 한성 에듀 이사급 아닌가요? 그럼 저를 생각해 주셔야죠.”
“하하. 이거 이거.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만, 지원재 실장이 미국 현지 사업 총괄인 건 김미연 부회장님 지시라 서요. 실질적으로 이쪽 권한은 두 분이 비슷비슷하십니다. 하하.”
김미연 부회장이 교통정리를 이리 해 두다니.
하긴, 한성 에듀에서는 나라고 하더라도 이사급이다.
그 말은, 내 위에 사람들이 잔뜩 있다는 의미지.
물론 위보다는 아래에 많지만, 해외 지사는 원체 인원이 적기에 이런 따짐에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참관 허가 기간이 일주일이니 그동안 머리 좀 식히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유현덕 대표님도 실제로 뵈니 사람이군요.”
사람이라니? 이건 또 무슨…….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리는 없고.
가만히 대답 없이 앉아 있는 내 표정을 보던 김준현 대리가 한마디 덧붙였다.
“로봇 아닌가 했습니다. 나이도 그렇고 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신 분 같아서요. 그래도 푸글에서는 안 되시네요, 아직.”
“협력 얻어 낼 겁니다. 기다려 보세요.”
“암요. 그러셔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차로 2시간을 냅다 달렸다.
내가 태어나서 살아 본 곳은 한국.
도시가 중심이며, 도시 밖을 나가면 산들만 빼곡하다.
그나마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산보다도 평야가 나오기는 하지만, 거대하다는 인상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확실히 땅이 넓어서인지, 평야도 넓고 산도 큰 것 같다.
아직 제대로 된 산을 보진 못했지만,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달려오며 멀찍이서 봤던 산들은 거대했고, 거기에 샌프란시스코의 지형적 특색이 더해져 뭐든 거대하단 이미지가 생긴 듯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빠져나와 달리는 길은 거의 사막이었다.
처음에만 무슨 텔레토비 동산 같은 구릉 지역이 있었고.
듬성듬성 있는 버카빌 등의 마을을 지나 계속 달리니 멀리 우리의 목적지인 데이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에 오래 계신 분도 아니신데 나름 선택이 좋으시네요, 지 실장님은.”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학교 괜찮다고 소문난 곳입니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분교 중 하나가 여기에 있고, 그 대학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캘리포니아치고 백인 비율도 높고요.”
“백인 비율이 높으면 좋은 건가요?”
“그래도 대도시 지역 무슨 닭장 같은 곳보다는 살기 좋다는 의미죠, 뭐.”
나도 미리 살짝 조사해 둔 내용.
우리나라야 거의 무조건 대도시 지역의 학교들이 명문이지만, 미국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도심 지역 내의 거주지는 오히려 슬럼화 상태라 위험하고 생활 수준이 썩 좋지 않다.
도심 외곽의 조금 떨어진 교외 지역이 생활 수준이 훨씬 쾌적하고 경제력도 높은 가구들이 거주한다는 사실.
그렇다고 너무 시골로 들어가면 그것대로 좋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사이에 위치한 이곳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스 표지판을 지나자마자 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마을 내부로 들어갔다.
1, 2층 건물이 대다수인 곳이라 한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차들도 표지판에 따라 천천히 서행하는 이곳.
“저도 딱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이라 잘은 모릅니다. 하하.”
“그렇군요. 일단 학교 먼저 들러 보죠?”
“지금요? 시간이…….”
“내일 바로 가면 어디가 어딘지 헤맬 수도 있잖아요.”
동네는 굉장히 조용했다.
지나가는 차들도 많지 않을 정도.
하지만 가끔씩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미국인 특유의 여유가 느껴지는 듯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다시 5분 정도 갔을까?
넓은 공원이 나오고 그 공원을 한 바퀴 도니 큰 실내 체육관 건물이 보였다.
“여기는 애들도 차를 끌고 다니나 보네요?”
체육관 앞에 있는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지금 시각이 5시가 다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와 다르게 고등학생 나이부터 면허를 딸 수 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실제로 보면 조금 어색한 장면일 듯 했다.
‘애들이 차를 끌고 다닌다.’라…….
“여기에 주차하지는 않을 겁니다. 학교를 가로질러 가야 해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 하하.”
우리는 체육관 앞에서 잠시 서행을 하다가 좌회전을 한 뒤, 학교 본부로 보이는 자그마한 건물 앞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역시나 우리를 반겨 준 건 보안 요원.
2001년 9월 11일 있었던 테러 이후, 미국은 각종 테러 위협에 시달리는 중이다.
세계 최강대국의 입장에서 겪어야 할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지만, 조금 안되기는 했다.
학교에 칼도 들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는 ‘그럼 미술 시간이나 이럴 때는 어떡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것도 다 확인할 수 있겠지?
“안녕하세요. 저희는 참관 허가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관만 잠깐 들어갔다 올게요.”
“이거 내일부터잖아요? 오늘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만…….”
“본관만 들어갔다 온다니까요?”
보안 요원이라 해 봐야 우리나라 학교 지킴이 선생님들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쪽은 확실히 상황이 다르긴 한 것 같다.
이 아저씨, 운동으로 몸을 다져 놨는지 무슨 레슬링 선수 같네.
“본관이야 관계없습니다만, 참관은 내일 부터라고 되어 있으니 아마 내일부터 학교 교정에 들어올 수 있으실 겁니다. 본관은 이쪽 문으로 들어가셔야 하고요.”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본관 입구를 찾느라 교정 안으로 들어와서 제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처음 와 보는 학교인데 입구를 어떻게 알아?
본관은 상당히 작아 보였다.
‘이게 본관이라고?’라고 생각할 정도로.
밀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느껴졌다.
이놈의 지역은 어딜 가나 후덥지근.
지금이 한겨울인데도 무슨 남반구 날씨인 양 더웠다.
LA에서 위쪽으로 꽤나 올라왔기에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Hello. Can I help you? (안녕하세요. 뭐 도와드릴까요?)”
“Hello. I want to meet Mr. Hernandez. (안녕하세요. 에르난데스 씨를 만나길 원합니다.)”
“Kenny Hernandez? Just a second. (케니 에르난데스요? 잠시 만요.)”
직원으로 보기에는 조금 젊은 듯한 백인 여성이었다.
학생인가?
여기 학교에서는 종종 학생을 봉사 활동 대신 이런 역할에 투입한다는 걸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직업 교육도 되고 나쁘지 않겠지.
김준현 대리는 능숙하게 그녀에게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 주고는 참관 허가서를 같이 내어 놓았다.
그녀는 잠시 허가서의 내용을 읽어 보더니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와 김준현 대리가 아무것도 할 일도 없이 잠시 멍 때리고 있는 사이, 안으로 들어갔던 그 여성이 다시 나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지라 케니는 이 자리에 없네요. 내일 아침 다시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우리가 조금 늦기는 했으니 말이지.
아니, 늦은 게 아니라 하루 일찍 온 거라 케니가 있다고 하더라도 참관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닙니다. 원래 날짜가 내일이었으니 미리 인사라도 해 둘까 싶어 왔던 거예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만, 출입증은 두 장 미리 주실 수 있을까요?”
센스 있는데?
학교 교정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가고 싶었다.
어차피 내일 참관은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다니는 일일 테니 미리 어디가 어딘지 알아 두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외형적으로도 우리나라와 다른 부분을 조금 보고 싶었다.
비슷한 부분 찾는 것이 더 어려울 것 같긴 하지만…….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은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5분쯤 뒤, 출입증 두 장을 들고 나왔다.
* * *
“한국에서 온 친구들이 재미있는 제안을 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네, 지금 괜찮습니다. 그렇잖아도 직접 만나 보고 싶기는 했는데 이쪽 일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요. 무슨 제안이었던가요?
스미스는 서랍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전날 한국의 대기업에서 온 두 사람이 제안한 내용을 그 자리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적어 두고는 브린에게 연락을 해 두었던 것이었다.
거절은 했으나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들이 준비하는 프로젝트에 있어서 가장 큰 경쟁자인 제플의 동향을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자신들도 거금을 들여 빼 온 정보였는데, 이 사람들은 미리 알고 있다는 듯 말을 했고, 이것이 오히려 스미스의 흥미를 돋운 것이었다.
“교육용 어플리케이션을 안드로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해 달라더군요.”
-음……. 그게 전부입니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브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건 좋지 않은 신호라고 느낀 스미스는 빠르게 다음 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리도 교육용 어플리케이션을 넣을 생각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종안에서 탈락되긴 했지만요. 근데 어제 처음 본 유현덕이라는 사람은 제플이 아마 미국 공교육 시장을 노리고 진출할 거라고 하더군요.”
아직 중요한 정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윤곽만 나온 상황이었으나, 경쟁 업체의 동향은 언제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흥미를 잃은 듯 했던 브린의 목소리도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정말인가요? 제플이?
“네. 물론 이들보다 우리가 정보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기에 확실한 것은 다시 알아봐야 하겠지만, 일단 그 사람은 그것을 사실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플이라…….
이때만이 아니라 푸글은 제플의 동향에 항상 총력을 기울여 왔다.
본격적인 스마트폰 시대는 제플이 시작했지만, 푸글은 자신들의 운영체제를 공개해 버려 최대한 다수의 하드웨어 업체가 그것을 운영체제로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이었다.
이건 앞으로 몇 달 뒤, 안드로이드가 시장에 공개된 후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 시점에서 푸글은 이미 공개된 제플의 제이폰, 그리고 그것의 운영체제인 jOS를 심도 있게 분석하는 중이었다.
-조건은 어떻던가요? 그리고 스미스 생각은 어떤가요?
“단순히 기본 어플 구성에 자신들의 어플을 넣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드로이드를 공개하지 않았으니 시제품은 당연히 있을 수 없었고요. 다만…….”
-다만?
수화기에서 얼굴을 잠시 떼고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걸 어찌 브린이 받아들일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푸글이라는 거대 기업에서 스미스도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도박을 할 때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현재 운영하고 있다는 프로그램을 확인하기는 했습니다.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한 교육용 강의 동영상들이더군요.”
-괜찮던가요?
“깔끔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노선과 맞지는 않는 것 같아 거절은 했고요. 그들은 일단 우리가 작년 인수한 쥬튜브를 통해 그 영상들을 공개해 놓은 것 같은데, 이게 혹시나 제플로 먼저 넘어가면 어떨지 생각이 들더군요.”
-흠…….
다시 이어지는 침묵.
스미스는 둘 중 하나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성 그룹의 제안을 받아들여 안드로이드의 기본 어플에 그들의 교육용 어플을 포함하는 것, 또는 제플의 동향을 전해 들었으니 자신들도 그 시장에 직접 뛰어드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다시 목이 탔으나, 이번에는 참았다.
통화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물만 계속 마시면 나중에 화장실 갈 일이 두려웠다.
대략 2~3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브린이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이 보내 준 영상 주소 좀 보내 주시죠.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브린이 이러기를 바라고 연락을 했던지라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 알겠습니다. 결정은 빠를수록 안드로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에서도 좋아할 겁니다. 지금 바로 이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스미스는 브린이 내릴 결정을 이미 알 것 같았다.
브린의 성향상 남이 만든 것을 그냥 넣지는 않는다.
마음에 든다면 대대적인 수정 요구를 하거나, 아니면 직접 푸글에서 어플 제작과 운영을 시작할 것이다.
전자라고 한다면 한국에서 온 친구들도 원하는 것을 얻겠으나, 만약 후자라면 안타깝지만 그들은 울분을 삼키며 자기네들의 나라로 돌아가야 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