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103화.
“고려 중입니다. 다른 대안이 나온다면야 우리도 경제성을 따져 봐야 하겠지만, 일단 현재까지는 푸글의 안드로이드가 가장 유력합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 푸글과 스마트폰 업체의 관계에 있어서 푸글이 훨씬 강하다면, 현생에서는 아직까지 안드로이드는 개발 중이기에 균형이 잡힌 상태라는 것이다.
사실 내가 푸글 관계자, 그리고 제플 관계자를 만나서 무슨 협상을 할 능력이 되겠는가.
한성 그룹이라는 거대한 뒷심이 없다면 힘들 것이다.
“제플에서는 별 소식이 없던가요?”
“제플이요?”
“네. 그쪽은 이미 제이폰과 기타 다른 기기들을 교육용으로 쓸 준비를 하는 것 같던데요.”
여기에서 뻥카가 하나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우리가 계획하는 어플과 유사한 것이 Jtunes U.
하지만 이건 2010년 이후에나 제이폰과 제이패드에 기본 설치된다.
아직 2008년이기에 제플 내부에서조차 논의라도 돼 있을까?
그래도 선행 주자에 관한 정보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뭐, 아예 거짓말도 아니니깐.
“저희가 그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주요 기본 어플 중 하나로 저희가 만들 어플을 선정해 주신다면, 제플의 모바일 기기보다도 푸글의 안드로이드가 미국 교육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게서 바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리라고는 여기 올 때까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난 이 사람이 그런 것을 결정 내려 줄 위치에 있으리라고도 생각되지 않았고.
하지만 예상보다 그의 답변은 빠르고 단호했다.
“하하. 잘 들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확실히…….”
“그렇다면…….”
긍정적인 답변 같이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아니요. 아쉽지만 지금 당장은 그 부분에 대해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저희 안드로이드 프로젝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오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개발 단계에 머무르는 수준이고, 안정화 부분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기본 어플 구성을 논의할 단계도 아닙니다.”
단호하네.
“또한 교육 시장에 대한 논의는 이사진에서도 검토가 전혀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검토가 이루어진 적이 있는 것만 해서는 이 시장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IT 업계에서 먼저 출발하는 것은 큰 이점을 가지는 건 사실이지만, 위험 부담을 안고 가는 것보다는 선행 주자를 따라가는 것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만,
“할 일이 있어서 만남은 이것으로 줄이면 좋겠네요.”
라고 말하더니 사무실 문까지 나가 먼저 문을 열어 주었다.
나가라는 소리구만…….
* * *
“뭘 그리 웃으셔요?”
스미스가 열어 놓은 문을 빠져나온 우리는 곧바로 푸글 건물에서 나왔다.
협상이 잘되지 않은 것은 명확했기에 굳이 거기에 오래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번 생애에서 처음 느껴 보는 기분.
이건 굴욕감인가…….
그런데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나를 보면서도 김준현은 옆에서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지, 이 사람은?
“아닙니다. 지원재 실장님이 대표님 이야기를 그리 하셨는데, 실패할 때도 있으시군요?”
“사람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는 거죠.”
“근데 그분은 여기까지도 예상을 했던 것 같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예상을 했다고?
김준현은 차에 먼저 오르자마자 글러브 박스를 열어 서류 봉투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뭡니까?”
“지원재 실장님이 주고 가신 비책입니다. 하하.”
“비책이요?”
뜬금없이 웬 비책?
기분도 좋지 않은데 농담을 하는 건가, 설마?
“뭔데요?”
“열어 보셔요. 저도 열어 본 적은 없습니다. 봉인이 되어 있길래요.”
그러고 보니 서류 봉투 입구에 정말 인장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인장을 지원재 실장이 썼나?
의외로 덕후 기질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인장은 뜯고 안에 내용물을 꺼냈다.
A4 용지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크기의 종이들이 나왔다.
이걸 Letter 사이즈라고 하나?
우리가 A4 사이즈를 쓰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각종 서류 등을 Letter라는 사이즈로 사용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대학 전공 수업 때 언급됐던 내용이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영어가 잔뜩 출력되어 있어 보자마자 머리가 아파 왔다.
하지만 영어 선생이 어찌 영어에 굴복할쏘냐.
빠르게 모든 서류의 제목들을 훑었다.
“하이스쿨……. 고등학교? 이것도고…….”
“고등학교요?”
“네. 아직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고등학교에서 발급한 서류들인 것 같은데요?”
방금 전까지 약간 상했던 마음은 깔끔히 사라졌다.
서류들은 몇 군데의 고등학교에서 발급된 참관 허가서였다.
미국 고등학교 수업을 참관하는 허가서.
* * *
“현덕이한테 미리 말 안 해 놓아도 괜찮을까요?”
S 아카데미 대표실.
대표 자리에 앉아 있는 20대 중후반의 젊은 청년.
하지만 준서는 대표라는 직함에 맞지 않게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원재에게 물었다.
사실 절친한 친구 유현덕에게 부탁을 받고 이 자리에 와 앉아 있기는 하나, 편한 자리는 절대로 아니었다.
친한 친구의 엄청난 성공.
동종 업계에 근무하면서도 옆에서 부러워만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막상 그 부러워했던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되니 그 친구가 가졌던 어려움이 절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잘해 내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지만, 친구만큼이나 가깝게 지내 온 지원재의 이번 계획은 조금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준서의 말을 들은 지원재는 어떤 반응도 없이 그냥 미소만 띤 채 커피만 홀짝일 뿐이었다.
“형. 이번 일이 실패할 수 있을 확률이 훨씬 높은 일인 거는 현덕이도 알겠지만, 그래도 미리 이야기해 줄 수 있었잖아요.”
준서는 다시 한 번 반응 없는 그를 다그쳤다.
그제야 지원재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준서를 보았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유현덕 대표라면 오히려 이걸 좋은 기회로 여기리라 생각해.”
“저보다 형이 현덕이를 더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너는 친한 친구로 오래 지냈지만, 나는 함께 일을 오래 해 왔으니깐.”
준서는 항상 여유 있는 지원재의 모습을 동경했다.
심지어 그가 모시던 맥스스쿨의 전 대표였던 강재훈 대표를 배신할 때조차도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안부를 물어?
이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왜 남자끼리 서로의 안부를 그리 자주 물어보는지.
막상 준서가 먼저 지원재를 찾거나, 그에게 연락을 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항상 지원재가 먼저 준서에게 연락을 하고 찾아왔었고.
전에 한 번은 혹시 성적 지향이 그쪽인가 싶어 돌려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안부를 묻는 것 외에는 절대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이나 그런 건 없었으니.
아무튼 강재훈 전 맥스스쿨 대표를 배신하고 유현덕과 손을 잡을 때도, 그리고 일이 어그러져 유미진 씨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났을 때조차도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했다.
그가 놀랐을 때를 본 기억이 있기는 한가?
한 번 있긴 했었다.
얼마 전 현덕이가 강민호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만큼은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준서만큼 현덕이도 남모르게 챙기는 걸까?
“그리고 선물 하나 남겨 놓고 왔으니깐 괜찮아. 넌 무슨 쉬고 있는 친구 걱정을 그리 하고 있냐. 네 걱정이나 해, 좀. 내일 스케줄 확인해 봤어?”
“저는 알아서 잘하죠. 현덕이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아직 실패를 겪어 본 친구가 아니잖아요.”
지원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패까진 아니더라도 너 이상으로 많은 걸 겪어 본 사람이야. 그러니깐 그쪽 걱정은 안 해도 돼. 너야말로 유현덕 대표가 신경 쓰지 않았던 구조조정을 해야 하니깐 그것만 챙겨.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연락 올 거야. 나한테 고맙다고 말이지. 하하.”
* * *
총 세 군대의 고등학교.
그리고 허가 기간은 전부 동일했다.
내가 푸글에 가 퇴짜를 맞고 돌아온 다음 날부터 딱 일주일 간 학교를 방문해 수업을 참관할 수 있다는 허가서.
이걸 봤던 그 순간은 잠시 ‘이게 뭐야?’ 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바로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교육제도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쪽 시장에서 원하는 온라인 교육 서비스는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걸 지원재 실장,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 낸 거지?
일반적으로 미국 고등학교는 보안에 철저해서 외부인에게 공개를 잘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래쪽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교육부’.
정부 부처 표시가 달려 있었다.
이건 또 어떻게 협조를 받은 건지……. 참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정하셨습니까?”
전날 푸글에서 당한 굴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김준현 대리.
오늘 일정은 원래 제플에 가는 것이었으나, 현재의 제플과 푸글은 그 격이 다르다.
그런데 푸글에서도 퇴짜 맞은 아이디어를 제플에 내놓는다고 뭔가 나은 결과가 있을까.
다행히도 이쪽은 따로 예약을 잡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일정만 바꾸면 될 일이었다.
“데이비스로 가죠. 여기서 먼가요?”
“데이비스요? 아뇨. 2시간 거리입니다. 출발할까요, 바로?”
“네.”
내가 정한 곳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중간쯤에 위치한 데이비스 고등학교.
전날 숙소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결과, 다른 두 곳은 나름 명문인 사립 고등학교였다.
허가서가 있는 곳 중 여기만 공립 고등학교.
내가 만약 학교 교사였다면 명문 사립 고등학교의 수업을 보며 배울 수 있는 게 많겠지만, 사교육이 필요한 절대다수는 공립 고등학교 학생들일 것이기에 이곳을 선택했다.
배울 수 있는 건 무엇이며, 경험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멘탈은 좀 회복되셨나요? 흐흐.”
이 사람이, 멘탈이라니…….
하긴, 어제는 조금 멘탈이 나가기는 했었다.
현생 들어와서는 실패란 걸 겪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말이다. 누구에게서 거절당한 적도 없었고.
하지만 전생에는 허구한 날 겪었던 실패들.
시험에 실패하고, 면접에 실패하고…….
기대감이 컸기에 그만큼 실망감도 컸지만, 그것 가지고 무너질 나는 아니다.
“괜찮아요. 어젠 조금 충격 받은 것처럼 보였나요?”
“조금이 아니던 걸요? 숙소 들어오실 때까지 계속 아무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뭔가 생각에 잠기신 것 같기도 했고…….”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죠. 하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김준현 대리라는 이 사람은 나름 밝은 성격인 것 같다.
그리고 낯선 외지에선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힘이 돼지.
“그나저나 준비해 두신 프레젠테이션이 효과가 없어서 조금 죄송합니다. 오래 준비하신 것 같은데…….”
“아뇨. 그거 금방 합니다. 그리고 사실 지원재 실장님과 같이 스미스란 사람 만나 본 적이 있어요, 전에. 지원재 실장님도 조금 어렵겠다고 하셨고요.”
“어렵겠다고 하고 저를 만나라고 보낸 거예요?”
“뭔가 다른 방안이 유현덕 대표님께는 있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지만 말입니다.”
알고 호랑이 굴로 들여보낸 거구나.
“너무하신 걸요? 미리 말씀 좀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실장님이 절대로 미리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헐……. 제가 위입니까, 지원재 실장님이 위입니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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