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100화.
사실 내 입장에서는 지원재 실장이 강재훈 대표를 배신한 것이었지만, 그들 둘은 그다지 크게 마음 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걱정은 기우로 끝나고, 나는 순간 긴장감이 풀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최근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그가 배신한 건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그 일 때문에 결과적으로 강민호를 붙잡아 둔 끈이 풀렸겠지만, 그것까지 생각하고 사람이 움직일 수는 없다.
맥스스쿨을 잡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일이 정신병자를 만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할 수는 없잖은가.
“성공 대입학원으로 가시는군요.”
“그렇게 됐네. 여기 유현덕 대표님이 신경을 많이 써 주셨어.”
“일단 조의를 표합니다. 미리 찾아 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자네도 바빴겠지, 게다가 불편한 자리가 아닌가. 아내도 있고 하니……. 그래도 한동안 기자들이 쓰는 소설 때문에 좋지 않은 연락도 많이 받고 했는데 거기에서는 풀려나겠어.”
예상했던 대로다.
강민호 본인보다도 맥스스쿨을 내가 가져가면서 피해를 본 건 강재훈 대표였기에 언론에서는 이미 강재훈 전 맥스스쿨 대표가 복수심에 불타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아들을 부추겨 나를 죽이려 했다는 글을 올려 대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오히려 내가 성공 대입학원 운영을 강재훈 대표에게 맡긴다면 그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계산이었다.
강민호…….
그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을 죽인 살인자다.
정신이 온전하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그나저나 지원재 실장이 오니 확실히 말이 많아졌다.
그들 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운 사이였나?
그랬겠지.
그랬으니 자신의 바로 옆에 두고 실질적인 2인자로 지원재 실장을 기용했던 것 아닌가.
다행이다.
내가 없는 동안 과거 불편했던 사람들끼리 한솥밥을 먹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솥밥은 아니지만, 현재 S 아카데미와 맥스스쿨, 그리고 한성 에듀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발생된 시장 과점 형태에 금이 간다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리라.
도박이지만, 그래도 이들 중 몇이 연결고리 역할을 잘해 준다면 내가 다녀오는 동안 더욱 더 성장할 수도 있겠지.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대표님?”
“말씀 편하게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원재 형?”
“네? 형이라니요…….”
“이제 곧 대표 직함도 내려놓을 텐데요. 하하.”
“대표는 대표시죠. 일을 잠시 쉬시는 것일 뿐입니다.”
딱딱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럼, 강재훈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리죠, 유현덕 대표님. 그리고 대표 직함은 빼 주시죠. 예전 일인데…….”
“대표님이 편합니다. 달리 불러 드릴 호칭도 없고요. 다시 한 번 힘을 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은 분위기였다.
그와 이미도 원장이 함께 만나는 자리를 보고 싶었지만, 그건 그 둘이 준비되고 알아서 할 부분이겠지.
부디 둘의 사이가 이전보다는 편해지기를…….
* * *
“정말로 제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요? 하하. 저도 사범대 출신이에요. 그리고 저도 여기까지 오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의 외모는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실제로 그의 나이는 아직 30대가 채 되지 않았고.
나, 그리고 앞으로 S 아카데미를 맡게 될 준서와 한두 살 차이였다.
그리고 그 두 살은 군 생활 2년.
아, 군대가 남았구나.
평소에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데, 유독 나이 또래의 강사들을 만나면 군대 걱정이 든다.
아직 갈 생각은 없는데,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마치 장벽처럼 내 앞 어딘가에 있는 군대.
이건 사실 준서도 마찬가지니깐…….
“아무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저는 한동안 못 보실 겁니다.”
“네? 왜요? 어디 가시나요?”
“멀리 좀 다녀오려고요. 일단 실강 위주로 근무하실 테니 주현필 부원장님과 이야기 나누시면서 하시면 될 겁니다. S 아카데미 인강 부분은 이준서 선생님이 맡아 주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가끔 신성 학원 이야기만 들었는데, 확실히 크긴 크네요.”
“예전에는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많이 커졌죠. 기회는 많으나 기회를 잡으시는 건 선생님이십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학교와 학원.
학생을 가르치는 부분은 동일하나, 운영이나 조건 면에서 너무도 다른 두 공간이다.
떠나기 전 인사 개편으로 새로운 강사들을 대거 초빙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일단 신성 학원 소속으로 실강을 하고, 검증된 몇 명은 S 아카데미 인강 촬영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검증은 주현필이 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 사람 기준을 잘 통과할 수 있을지…….
그런데 그의 검증을 통과만 한다면 어느 정도 실력에 대한 보증은 될 것이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겠지.
그리고 나는 학교 수업 경력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들을 믿는다.
현생에서는 전혀 아니지만, 나도 사실 학교에서 가진 경험들이 학원에서 성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컨텍한 현지훈 선생님이 신성 학원에 들어온 이날, 나는 부모님 댁에서 하루를 쉰 뒤 다음 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준서와 주현필, 오광필 할아버지까지 공항으로 함께 가기로 했고, 서울에서는 이미도 원장이 직접 나오기로 했다.
기대도 크고 걱정도 컸다.
놀러만 가는 건 아니라서 처음 가는 미국에서 사업을 진행해야 했고, 이미 지원재 실장이 어느 정도 정리는 하고 온 상태지만 계약한 사항들이 잘 이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한성 에듀와 S 아카데미의 미국 시장 진출.
한성이 먼저 론칭을 한 상태였고, 우리도 곧 개별 사업을 진행할 예정.
하나는 기업 이미지 재고를 위한 무료 복지 사업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영리 사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과연 이 시장은 어떨 것인가.
내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
하지만 나는 이미 미국의 2000년대 이후 시장 상황은 대충 기억했다.
온라인 사업을 위한 주요 업체들 몇 군데.
내가 이번에 가서 접촉할 곳들이다.
과연 내가 그들을 설득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엄마!”
“아들! 잘 지낸 거야? 뜬금없이 온다고 하더니만 멀리 간다고나 하고.”
서운하신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집에 오는 건 거의 몇 년 만이니.
자주 들러야겠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막상 독립을 완전히 하고 나니 생각처럼 쉽게 되지가 않았다.
세상일에 치이고, 이런저런 새로운 일들에 치이면서 가족이 멀어진다는 것.
그것만큼 씁쓸한 일이 달리 있겠는가.
“미안해요. 하하. 대신 선물을 좀 가져왔어요!”
다 큰 아들이 큰돈을 벌었다는 것까지는 이미 알고 계셨다.
하지만 돈 이야기를 먼저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던 것 같다.
하긴,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들어가는 것이 어디 돈과 시간뿐이겠는가.
돈으로 산정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과 관심, 이건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웬 선물? 그런 거 안 필요해.”
“잠깐 나와 보세요. 아버지!”
“어! 현덕이 왔냐?”
마침 아버지도 집에 계셨고.
딱 좋았다.
나는 두 분의 손을 잡고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큰 거야? 차에 두고 왔어?”
“기다려 보세요.”
내 차를 지나(하지만 이게 내 차인지도 모르신다.) 몇 칸 옆에 있는 차로 갔다.
부모님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열쇠를 빼내 들고 버튼을 눌렀다.
삑삑.
“너 차 샀니?”
“좋은 찬데?”
제 차는 방금 지나왔어요, 부모님.
“선물이에요, 아버지.”
검소하신 분이라 외제차는 오히려 부담스러우시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고른 것은 2007년형 카니발 신형.
물론 내 기억에 2010년 이후 새로 나온 카니발이 훨씬 더 이뻐 보이지만, 이것처럼 실용적인 차도 드물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신 듯 아무런 반응도 없으신 두 분.
나는 아버지 뒤로 다가가 안아 드리며 키를 내밀었다.
“뭐……. 뭐야?”
“제가 버는 돈이 엄청나요. 이건 굉장히 작은 거고요. 선물입니다. 감사해요.”
“감사하기는……. 아들이 이제 다 크긴 컸구나. 미국 갈 때 돈 많이 필요할 텐데…….”
내가 얼마나 버는지 전혀 모르신다.
규모가 너무 크지 않다면 아예 회사를 사 드릴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으시겠지.
엄마가 아버지 쪽으로 다가와 나를 만지셨다.
오랜만에 본 엄마 손에는 주름이 많이 늘어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키를 가지고 있는 반대편 손으로 엄마의 손을 잡았다.
한동안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겠지.
“고맙네. 건강히 다녀와야 해.”
“고맙다. 다 컸네, 이제.”
“집도 얘가 사 준 거잖아요.”
“그랬지, 참. 하하.”
서프라이즈로 인해 생긴 잠시 동안의 긴장이 풀리고 우리 셋은 웃으며 차 안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버지가 가장 흥분하신 것 같았다.
이제 조금은 여행도 다니고 할 여유가 생기셨으니, 앞으로 인생을 즐기며 사시기를…….
* * *
인천국제공항. 16시.
비행기 탑승 수속을 밟기 위해 출발 2시간 전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전날 집에 들렀기 때문에 내 차를 혼자 끌고 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새로 사 드린 차를 타고 오셨고.
준서와 지원재 실장, 주현필, 오광필 할아버지는 전날 미리 올라와 있었다.
이미도 원장은 서울에서 따로 출발하기에 방금 전 도착했고.
준서가 내 차를 받아 쓸 거기 때문에 준서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키를 넘겨주었고, 그는 신이 난 표정이었다.
친구가 멀리 떠난다는데 신이 나다니…….
하지만 몇 년 있다가 돌아올 것이기에 나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막 쓸게!”
“사고만 내지 마. 하하. 그간 감사했습니다. 한동안 못 뵙겠네요.”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나. 건강히 잘 다녀오게.”
“다녀오십쇼, 대표님.”
“준서 잘 좀 부탁드립니다.”
오광필 할아버지와 지원재 실장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미도 원장과 주현필이 다가왔다.
“몇 년이면 그동안 회사 어떻게 될지 궁금하겠어요. 호호.”
“어련히 알아서 신경 써 주시리라 믿습니다.”
“너무 믿지 마. 우리는 우리 일도 바빠.”
“제가 해 드린 게 있는데요. 이 정도는 해 주셔야죠, 주현필 선생님!”
“가서 사고 치지 말고. 여기라면 어떻게 도와줄 수라도 있지만 거기는 완전히 다를 거야. 가끔 연락이나 해. 소식 궁금하면 걱정되니깐.”
오늘은 유난히 그답지 않게 살가웠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살가울 정도니, 평소에는 어땠겠는가.
이미도 원장은 웃고 있었지만 주현필은 말은 저래도 표정은 상당히 경직 되 보였다.
막내 동생 군대 보내는 심정이려나?
태어나서 딱 두 번째로 와 보는 인천공항.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내가 비행기를 타고 출국한다.
이 나이 될 때까지 해외여행 한 번 가지 못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해외여행 못 가본 사람은 많다.
이번에 나가는 것이 여행이 아닌 만큼 더욱 긴장되었다.
가서 할 일들 리스트를 작성하느라 밤잠을 설쳤으니, 아마 11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에는 잠에 빠지겠지.
벌써 졸립다.
“엄마, 아빠, 다녀올게요!”
“건강해! 도착하면 연락하고!”
“네!”
꽤나 성공적이었던 인생 2막은 잠시 멈춤 상태로, 이렇게 2.5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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