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98화.
경찰의 발표는 나에게 일기장을 보여 준 다음 날 이미 이뤄졌다.
오랜만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언론에서는 연일 조사 상황을 대서특필했고, 벌써 이런 저런 썰들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아마 이 중에서도 그 기사들을 읽은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그분이 그 일을 맡으신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제의를 받는다는 보장도…….”
이번에는 김미연 부회장이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계속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강재훈 그 사람이 내 제의에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했겠지.
그리고 적을 자꾸 아군으로 만들려는 내 성향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현재 동업 관계이나,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고, 그간 내 주변에 일어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본다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아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성 에듀까지 집어삼킬지도 모르니?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맥스스쿨 경영권을 뺏어 온 이후로 나에게도 사냥개의 습성이 있는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단 일들을 정리하고 준서에게 깔끔하게 넘겨주겠다는 것뿐.
“제의는 이미 수락하셨습니다.”
“생각 중이라고 하셨는데요?”
이미 수락까지는 듣지 못했나 보다.
하긴, 수락이라고 하기도 조금 어렵긴 했다.
그냥 자리에만 앉아 계셔도 된다고 했고, 그는 알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만약 거절한다면, 그는 정말로 한 톨 남은 명예까지 날려 버리는 것이다.
아니, 유명한 기업가였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옥죌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볼게요. 아무튼 저는 강재훈 전 대표님이 강민호의 일련의 악행들과는 무관하고, 이번에 그의 능력을 S 아카데미에서 먼저 받아들이면 든든한 아군 하나가 늘어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강한 적을 아군으로 만든다?
적어도 지금의 강재훈은 강한 적은 아니리라.
하지만 강민호 사건으로 나도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내가 한 행동들이 의외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클 수도 있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강재훈이 딴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가 강민호와 무관하나, 매스컴에서 이렇게 계속 이런 저런 소설들을 쓴다면 그 또한 변할 수 있다.
나의 제의는 나를 죽이려 한 사람의 아버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될 것이고, 이는 곧 내가 그의 결백을 믿음으로 매스컴의 소설을 잠재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뭐, 네 회사니깐 어떻게 하든 네 결정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은 결정 같네요.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많으시네요, 유현덕 대표님?”
주현필에 이어 김미연 부회장이 평을 내놓았다.
“저도 유현덕 선생님 결정에 동의합니다.”
이미도 원장도 동의를 해 주었다.
사실 가장 불편했던 사람이 그녀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강재훈은 그녀의 친아버지.
생각하긴 싫겠지만 강민호는 배다른 남매였으니.
“김윤지 원장은 알고 있어? 자기 학원을 강재훈 전 대표가 운영하게 된다는 거?”
다시 주현필.
그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이사회 같은 분위기로 보이겠지만, 막상 결정 권한은 전부 나에게 있는 것이었다.
비공식적으로 내가 조언을 구하는 자리일 뿐.
다만 이들 중 누구라도 반대를 한다면 내 입장에서도 진행하기 불편한 것은 사실이리라.
아직까지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진 않았지만.
“물론이죠. 떠나기 전 이야기를 해 두었습니다. 알아서 하라고 하던데요?”
“아예 돌아올 생각이 없나 보구먼…….”
그건 아니길 바라지만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녀의 선택이었으니.
“사업적으로도 그분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도 어찌 보면 피해자인 만큼 이해해 주세요. 인수인계하고 떠나기 전 여기 계신 분들과 자리 한 번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여기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도 원장이 과연 괜찮을지 모를 일이니.
그리고 이 부분은 강재훈 전 대표에게도 아직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들 둘의 관계가 약간은 복잡하기에, 당사자들에게 판단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서 머뭇거린 것이었다.
내 생각은 이야기하되.
“나 때문에 그런가요?”
의외로 쿨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인가?
“그분이 괜찮으시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그분 와이프는 어떻게 지내는지 혹시 아시나요?”
유미진…….
몇 년 전 맥스스쿨을 나와 이미도 원장이 장악할 당시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녀의 과도한 아들 사랑에 강재훈만 모든 것을 잃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말이다.
당시에도 이미도 원장에게 일부 지분을 넘기려는 강재훈 전 대표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사람인데 이런 만남을 허락할지…….
미지수이기는 했다.
다만 그건 강재훈 그 사람이 맞닥뜨려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좋지는 않겠죠. 그런 이야기까지는 모릅니다.”
“나도 괜찮아요. 일부러 막 만나고 싶은 사람은 더 이상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신경 쓰지 말고 유현덕 선생 뜻대로 해요. 불편해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뭐, 자주 볼 일은 없겠지.”
미소를 지어 보이기에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런 분위기의 모임으로 그간 일을 해 오셨던 것이군요?”
갑자기 김미연 부회장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 자리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우리 주축 멤버들이 모여 일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
신기한 것은 그녀도 그 자리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는 것이었다.
처음 참여한 사람이 있으면 아무래도 서로 불편해서 논의가 잘 진행되지 않기 마련이다.
실제로 지원재 실장이 처음 이 모임에 함께 왔을 때 상당히 어색해했다.
그렇게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사교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아니, 지금 다시 보니 그가 사교성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 모임이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70대의 오광필 할아버지, 이제 30대 후반의 성공한 학원 경영자 이미도 원장, 마치 기사라도 되는 양 그녀의 곁을 지키는 주현필 부원장, 그리고 젊은 사업가인 나까지…….
다들 나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한 명이 비었다.
그 빈 공간을 과연 김미연 부회장이 채워 줄 수 있을까.
아니, 아마 누구라도 그 자리는 채울 수 없을 것이다.
* * *
인천국제공항.
실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공항이다.
그리고 나는 영어 강사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이곳에 와 봤다.
하지만 비행기는 내가 타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귀국하는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서 나온 것.
친구‘들’이구나 참.
“여기에요?”
“뭐야? 처음 와 봐?”
경호로 주현필을 데리고 왔다.
말이 많고 무섭고 건방진 경호원.
“처음 온 건데요? 선생님은 와 보셨어요?”
“당연히 와 봤지. 나는 김포공항 세대야, 그리고.”
“김포공항이요? 확실히 오래되셨군요. 이제 슬슬 녹이 슬……. 으악! 자꾸 때리지 좀 마세요.”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왠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건물에 가려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투닥거리며 걸어갔고,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엄청나게 긴 무빙 워크가 있어 신기했다.
신기했다고?
그래, 나 엄청 촌스럽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학 갈 때까지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해외 나갈 일이 없었고, 일을 하면서부터는 돈은 충분한데 시간이 없어 나갈 수가 없었다.
나도 몇 달 뒤에 미국으로 나갈 예정이었기에(그것도 혼자!)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고 여기저기를 유심히 봐 두었다.
“미국 갈 때도 이 길로 가는 건가요?”
“너 갈 때? 응. 여기로 쭉 나가다 보면 2층인가? 3층인가로 나와. 다른 건물이지. 여기는 통로 같은 거야.”
친절하게 알려 주는 주현필.
굉장히 많이 어색했다.
생각해 보면 그도 아무 때나 흥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꼭 필요할 때만 과격해지는 건 아니지만.
가만히 들으면서 그의 뒤를 따라가는 나.
만약 내가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면, 마치 형의 뒤를 졸졸 따르는 동생 같아 보였을 것이다.
“왜 멍하니 그러고 서 있어?”
“네?”
“무빙 워크라서 멈춰 있는 거야? 시간 다 되지 않았어? 이러다간 그 친한 친구 공항에서 나오는 것도 못 본다.”
“아! 알겠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갈 길을 가는 그를 빠른 발걸음으로 따라가고는 이제 나란히 걸었다.
무서운 사람이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지.
‘형’이라고 부르면 또 한 대 맞겠지?
길고 긴 무빙 워크가 끝나고 횡 하니 뚫린 공간이 나왔다.
사람들로 가득 찬 그 공간.
하지만 여기는 아닐 것이다.
공항 건물과 주차장의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건물인 것 같아 보였고, 건너편 멀찍이 공항 안쪽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하나 더 있었다.
이미 이 정도 거리에서는 전면이 유리로 된 공항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공간을 빙 둘러 있는 길을 따라 공항 내부와 연결되는 출입구에 들어섰다.
엄청나게 넓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딱히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이라고 해도 이렇게 넓게 뚫린 공간이 건물 안에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주현필은 아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딱 맞은 시각.
아주 약간 늦은 걸까?
1층에는 여러 곳의 게이트가 있었고, 그중 한 곳에서 사람들이 각기 크고 작은 캐리어를 끌면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 눈에 준서의 모습이 들어왔다.
“준서야!”
“깜짝이야! 야! 귀 아파! 여기서 소리 지르지 말고 그냥 가서 불러. 왜 이렇게 멀리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이젠 그의 안내가 필요 없으니 나는 그를 앞질러 빠르게 걸어갔다.
굳이 뛰지는 않았다.
왠지 동성의 친구를 마중 나왔는데 뛰어가면서까지 반가워하면 조금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였다.
“현덕아!”
“유 대표님.”
내가 그곳으로 갔을 때, 준서와 지원재는 게이트를 완전히 빠져나와 서 있었다.
몇 주 전, 지원재는 한성 에듀 사업 겸 준서의 귀국 준비를 돕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리고 오늘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이야~ 미국 물 좀 먹더니만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하하. 달라지기는. 머리 자르는 비용이 비싸서 직접 잘라서 거지같을 거다.”
듣고 보니 머리 스타일이 정말 거지같았다.
확실히 우리랑 물가가 다르구나.
준서는 그래도 맥스스쿨 소속으로 한동안 근무를 했기에 돈은 충분히 있었을 텐데, 고작 머리 자르는 것도 비싸다 할 정도라면…….
“비싸? 머리 자르는 게?”
“사람이 뭐 해 주는 건 다 비싸. 먹는 건 그냥 약간 비싼 정도인데 노동비가 비싸지. 치과 한 번 가면 몇십, 몇백이 깨져.”
“헐. 그 정도야?”
“응. 너는 그대로네. 아닌가? 옷 새로 샀네?”
“새로 샀지. 그리고 놀랄 만한 것도 있지. 하하.”
“엥?”
차를 보여 주면 아마 까무러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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