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97화.
“김윤지 원장은? 어디 가 있는다고 하지 않았어?”
“할아버지가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저는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 주더라고요.”
“자네에게 대답을 안 하는데 나한테는 할까. 쯧쯧. 일이 너무 꼬여 들어갔네.”
좋은 사람들, 믿을 수 있는 사람들, 함께 해 온 사람들과 다 같이 모여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면 뭔가 채워지거나 잊힐 것 같았지만 주제는 자꾸 그쪽으로 흘렀다.
일련의 사고와 김윤지의 떠남.
결국 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그녀는 함께해 왔던 동료였기에 우리의 대화 주제는 서로 겹치는 부분으로 갔던 것이었다.
“그나저나 조규만, 그 사람 인생도 참 기구하구먼…….”
“자업자득이죠. 유현덕을 죽이려고까지 한 사람이잖아요.”
주현필이 삐딱하게 말은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평소의 힘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냥 말투만 저럴 뿐, 속마음은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동종 업계에서 경쟁을 했던 사람이고, 잘 아는 사람의 죽음이니 말이다.
이미도 원장은 이런 대화에서는 거의 웬만해서는 듣고만 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허무하네요. 그렇게 아등바등 남 밟으면서 살아온 사람인데 말이죠.”
“끝은 다 허무한 거지. 그래도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갔을까 모르겠네.”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라면서요.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준비를 할 여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불쌍하긴 하네요.”
“자네도 조심하게. 허허. 적이 많지 않은가.”
“저요? 제가 무슨 적이 많아요?”
“여기 바로 옆에 한 명 있고.”
오광필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쳐다본다.
하긴, 그와 내가 투닥거린 것이 벌써 반 십 년이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의 주현필을 보고는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김윤지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덜컥.
“깜짝이야!”
이 술집은 가끔씩 회식용으로 통째로 빌려 사용하는 곳이기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확 열린 문에 입구로 시선이 집중되었고, 검은 양복의 아저씨 한 명이 들어왔다.
“김미연 부회장님 들어오십니다.”
“이건 뭐여?”
“그러게요.”
말은 저리 하면서도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현필.
나도 얼떨결에 같이 일어났다.
우리 둘을 본 오광필 할아버지와 이미도 원장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나저나 무슨 술집 하나 오는데 이리 격식을 차리며 들어올까?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 실장님! 이런 데서 그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아이 참……. 늦어서 죄송해요.”
뭔가 되게 웃긴 장면이었다.
진짜 동네 술집에 경호원까지 대동한 대기업 회장 딸이 들어오는 모습.
거기에 나름 격식을 갖추려던 경호원의 행동을 만류하며 후다닥 뛰어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라니.
보통은 어디 나가서 행사에 참여할 때 저렇게 하겠구나.
확실히 일반인과는 달랐다.
그리고 여기는 일반 술집.
바닥도 깔끔하지 못하고 저렇게 뛰어 들어오면 위험할…….
“으악!”
“어이쿠!”
“부회장님!”
다들 경악에 찬 소리를 각자 내뱉으며 각자의 행동을 했다.
급히 달려오던 그녀의 하이힐이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쓰러지려 했다.
찰나의 순간.
그녀가 미끄러진 곳은 경호원보다 주현필이 가까웠고, 그는 확실히 운동신경이 좋았다.
어느새 뒤로 넘어지려던 김미연의 등을 받치고 일으키는데 급히 달려온 경호원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으십니까?”
주현필, 이 사람은 왜 목소리는 깔고 그러시나.
“아, 네. 감사합니다. 누구…….”
“주현필이라고 합니다. 신성 학원 부원장이죠.”
이건 또 무슨 상황이냐.
주현필의 팔에 안긴 그녀, 그녀를 보며 당황하는 경호원, 그리고 그들 둘의 대화를 들으며 경악한 나머지 셋.
다들 무슨 콩트에나 나올 법한 그런 모습으로 멈춰 있었다.
“저기……. 이제 일으키셔도 될 것 같은데요?”
내가 말하는데 그 순간 이미도 원장의 표정을 나도 모르게 봐 버렸다.
5년 동안 그녀의 표정은 거의 한 결같이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에서 불이 나오는 듯했다.
멍청한 주현필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둘 사이가 확실히……. 내가 예상했던 것이 맞을까?
“실례했습니다. 이 실장님, 퇴근하셔도 돼요. 저 여기서 조금 있다 갈 겁니다.”
“하지만…….”
“들어가 주세요.”
“근처에서 쉬고 있겠습니다. 자리 끝나시면 연락 주십쇼.”
그로서는 이 정도가 타협선이었겠지?
재벌 그룹 경호 부분은 개인이 판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녀도 이를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곧 술집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이 자리에 초대된 사람은 모두 모인 셈이 되었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을 수 있겠지.
지원재…….
그는 분명 이 자리에 초대될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은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미연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직함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미 다들 알고 있었다.
이미도 원장을 시작으로 오광필 할아버지, 주현필까지 각각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나는 공식적으로 그녀가 운영하는 한성 에듀 소속이기도 했기에 목례로 악수를 대신했고.
다행히 이미도 원장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그녀가 오기 전과 같은 분위기는 사라졌다.
다들 어색해하는 눈치였고, 그걸 깨려면 내가 뭔가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뭔지는 나도 모르지.
오광필 할아버지가 어색한 정적을 깨고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연장자다운 여유였다.
“말씀은 여기 유현덕, 이 친구를 통해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정말 미인이시군요.”
70대가 다 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소리 같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부조화가 분위기를 살렸다.
내가 평소처럼 편안하게 대응할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징그러워요, 할아버지.”
“뭐? 이 녀석아!”
“호호. 감사합니다.”
호통 소리와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무겁게 깔린 분위기를 웃음이 흔들어 놓았고, 한결 편해졌다.
이런 분위기를 조금 더 자주 느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우리의 기대보다 빠르고 예상치 못하게 흘러간다.
이야기의 주제는 곧 최근 나에게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로 넘어갔다.
“몸은 괜찮나요, 이제?”
“얼마 전에 뵙지 않았습니까. 하하. 괜찮아요. 보기엔 이래도 나름 튼튼합니다!”
“튼튼하기는……. 그래도 다행이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격투 쪽도 가르쳐 주는 건데.”
주현필의 격투 기술을 조금 배워 뒀더라면 훨씬 수월하게, 강민호의 죽음까지 보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격투에 있어서 사망 사고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한순간의 실수에 의해서 발생하는 법이니.
압도적인, 아니면 적어도 한편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는 최악의 사고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나의 요청으로 가르쳤던 건 단순히 ‘제대로 맞는 법’과 ‘충격을 줄이는 법’ 정도였고, 그것이 분명 나의 생존에 있어 큰 영향을 주긴 했지만 강민호가 죽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뭐, 사실 이건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강민호는 나를 죽이려 들었고,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주현필이라 할지라도 제압에 실패했을 수도 있겠지.
“뭐, 다행히 덕분에 죽지는 않았잖아요. 하하.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누굴 때리고 싶거나 하진 않아요.”
“네가 죽어, 잘못하면.”
이 사람, 오늘따라 말이 많다.
“이런 일이 어디 흔한가요?”
어께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흔하진 않은 일이지.
하지만 나의 상황도 흔한 일은 아니려나?
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나저나 놀랐어요. 확실히 대인배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유현덕 대표님은?”
김미연의 갑작스런 화재 전환.
“네? 뭘요?”
“아니, 성공 대입학원 인수 후에 그쪽 부원장직을 강재훈 전 대표님께 제의하셨다고 들어서요.”
이걸 그녀가 어떻게 알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성공 대입학원 원장이었던 김윤지에게만 말했던 것인데.
그럼 설마 그녀가 개인적으로 김미연 부회장과 친분이?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다들 처음 듣는 폭탄 발언이었기에 ‘뜨악’ 하는 표정이 되어 나를 쳐다봤다.
뭔가 말을 하고는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정리가 안 된 모습이었고, 이때가 아마 나에게 있어서 내 생각을 설득시키기 위한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자……잠깐. 이건 아직 공개한 내용이 아니에요, 부회장님. 그나저나 어떻게 아신 거예요?”
“호호. 미안해요. 실수했네. 강재훈 전 대표님과는 인연이 있어서요.”
난처한 표정의 나를 보는 김미연.
하지만 정말로 표정처럼 난처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기는 했는데…….
“강재훈? 맥스스쿨? 강민호 부친?”
“말 나온 김에 설명 드릴게요.”
“설명할 것이 뭐가 있어? 그 자리 앉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 만한 분도 없으시죠.”
주현필이 또다시 흥분하는 듯해서 오히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에게 큰 형 같은 존재이지만 S 아카데미는 그의 소관이 아니라 내 소관이고 내 책임이다.
그에게도 나 다음으로 S 아카데미를 운영하게 될 준서를 도와 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철저히 보수적인 접근 방식의 그에게는 경영에 있어 조언과 과도한 개입의 선을 확실히 그어 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같지 않은 단호함에 그도 입을 다물었다.
내 의지를 읽었겠지.
그리고 이제 그가 나에게 요구하는 건 타당한 해명이리라.
아니, 조금 억울하긴 하네.
내가 내 회사 운영하는데 무슨 해명을 해야 하는가.
횡령을 하거나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일단, 일전에 조규만 의원에게 S 아카데미 지분을 넘길 때도 작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고 모르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이 자리에 없으신 김윤지 원장님 약점이 잡힌 상태였어요.”
“무슨 약점?”
오광필 할아버지가 눈을 밝히며 물었다.
무슨 약점인지 궁금하겠지.
조규만은 김윤지의 외삼촌이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외삼촌이란 사람이 사업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외조카의 약점을 잡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가 입을 삐죽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말을 할 만한 내용이면 해 주겠는데, 그건 그렇게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때 했던 일이 조규만 의원이 요구했던 지분보다 오히려 조금 더 얹어서 줌으로써 불만을 잠재우고 향후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악행을 막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폭탄 테러는 그가 기획한 것이었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그만둘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강재훈 전 대표님은 그럴 만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확신하죠?”
이번에는 이미도 원장이었다.
다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들이었다.
주현필이 처음 그렇게 거세게 반응했던 것도, 이미도 원장이 지금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도 말이다.
나도 확신은 없었다.
조규만과 강민호 때문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는 사라졌으니.
아니, 현실적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상에서 현실로 오는 길?
“강민호의 일기장을 경찰에 직접 제출한 것은 강재훈 전 대표님이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두 명을 살인하고 또 다른 살인미수까지 저질렀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요.”
내가 강재훈이란 사람에 대해 잘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는 스스로 나를 해코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죽은 강민호와 강재훈이 부자지간이기에 그들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커넥션이 존재했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믿고 싶지는 않았고.
“이 일로 강재훈 전 대표도 완전히 끝이 나 버립니다. 온갖 매스컴에서 다 달려들어 물어뜯을 테니까요. 심지어 약간 모자란 아들을 획책해서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겁니다.”
이미 나오고 있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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