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96화.
“꼭 이래야 하겠어요?”
“왜 이제 와서 또 다시 물어봐? 이미 이렇게 하기로 결정해 놓고. 설마 발 빼는 건 아니지? 도장 얼른 찍어!”
나는 대답 없이 그녀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서류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각각의 변호사까지 대동한 상황이라 평소처럼 편한 말을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류만 끝내면 밥이라도 같이 먹을 생각이었다.
“입금은…….”
“알아서 해 줄 거예요, 여기 유현덕 대표님께서. 호호.”
“오, 무기한입니까?”
“너?”
사실 변호사까지 필요할까 싶었으나, 워낙 금액이 큰 규모의 계약이라 명확하게 해 두는 것이 좋았다.
아무리 가족사이라 하더라도 돈 문제는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래도 기분은 무거웠다.
말은 편히 한다고 하더라도 한동안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가 될까.
과연 한동안 보지 못하는 것일지, 아니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들과의 헤어짐 때문이라는데, 멀쩡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도 수많은 헤어짐을 우리는 경험한다.
“뭘 그리 쳐다봐?”
“그냥요.”
“저희 이제 끝났으니깐 서류 챙겨서 가셔도 될 것 같아요. 고생하셨어요, 변호사님들.”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의 얼굴.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났다.
이미 전생에서 30 중반까지 살아 봤기에 내가 나를 잊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었지.
어쩌면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정보를 더 얻기 위해 그 자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던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평생 안 볼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슬퍼 보여? 내가 그리 좋았어?”
분위기 깨는 소리 하고는…….
“언제 돌아올 건데요?”
“아직 모르겠어.”
그러면서 그녀의 웃음 띤 표정도 사라졌다.
나랑 비슷한 감정이면서 아닌 척 버티기는…….
“그나저나 너는 왜 그만두는 거야? 지금 그만둘 타이밍이 아닌데, 아직.”
“그 이야기를 이제 하십니까? 하하. 누나처럼 저도 좀 쉬려고요. 같이 쉬고 싶은데 그건 누나가 반대할 것 같고…….”
“맞아. 그냥 조금 떨어져 있자, 우리.”
같이 있었던 적이 언제 있기는 했나.
서운했을까. 표정에 그대로 그 감정이 드러났을까.
그녀는 재밌는 듯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너무 길게 숨어 계시진 마세요.”
“누가 숨는다고 그래? 너야말로 이젠 번 돈으로 제대로 좀 살아 봐. 옷도 좀 사고. 지금 입고 있는 정장 나 처음 봤을 때 그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나서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상태였고.
그사이 나에게 다가온 그녀.
“밥은 나중에 같이 먹자. 시간이 없네. 건강해야 해.”
그녀가 나에게 가벼운 키스를 하고 강의실을 나가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목석처럼 그대로 멈춰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5강 새 출발을 하려면 정리를 해야 한다.
“와, 선생님 돈 많이 벌었어요?”
“완전 달라졌어!”
그래! 쇼핑 좀 했다, 이 녀석들아!
그렇게 홀연히 김윤지가 떠나고 한동안은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러 사건들이 터지고 한꺼번에 매듭지어졌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라진 느낌.
버는 만큼 좀 쓰고 살라고 했던 건 그녀였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때는 막상 쓸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떠나고 나니 허전한 마음을 채울 거리가 필요했다.
책? 책 좋지.
하지만 그건 보통 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특수한 경우에는 특수한 방법을 동원해야지.
다행히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은 아마 내 손으로는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있었다.
“선생님 원래 부자야! 이것들이!”
“하나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요?”
“거지같았어, 정말.”
하, 이 새끼들…….
하긴, 애들이 뭘 알겠는가.
지들이 수업 받는 이 건물이 내 것이고, 전국에 이런 건물이 몇 개가 있는지 애들이 알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건 욕 같잖나. 차도 구경할래?”
“차요? 선생님 차도 바꿨어요?”
“그럼. 나 돈 많다니깐? 너희들 점수 올려 주고 받은 돈이야.”
“나쁜 사람이네.”
“야!”
아이들의 사고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따라가기가 참 힘들다.
악감정이 있어서 저렇게 말하는 건 분명 아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시기라 그런 것일 뿐.
음,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다. 나의 정신 건강에…….
아이들을 데리고 강의실을 나와 건물 주차장으로 이동하던 중, 주현필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 일그러졌는데, 이것 또한 분명 놀람의 표정일 것이다.
그는 어떤 감정이 생길 때마다 나타나는 일관된 표정이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비호감인 사람이 애들한테는 인기가 있는 거지?
“뭐야? 너……. 아니, 선생님 옷이 왜 그러십니까?”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는 반말을 막 내 뱉지는 않는다.
다행이려나?
“저는 이렇게 입고 오면 안 됩니까? 하하. 오랜만에 돈 좀 썼어요.”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인 것 같은데요? 그럼 혹시 주차장에 그 차도…….”
“차 구경하러 가실래요?”
또다시 한 번 확 일그러진…….
이번에는 주먹이 날아올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애들 앞인지라 참는 것으로 보였다.
확실히 이 사람은 단순한 직장 동료는 아니었다.
큰 형의 이미지랄까.
“걱정 마세요. 오늘까지만 이렇게 쓸 겁니다. 그간 무슨 거지처럼 살았잖아요, 애들 표현으로 하자면요.”
조금 안심을 시켜 줘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덧붙이고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나저나 거지라니…….
그 정도로 내가 나를 꾸미지 않고 살았던 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니 곧바로 주현필도 따라 들어왔다.
“오, 선생님도 차에 관심 있으셨어요?”
“운전석에 한 번 태워 주기나 하시죠.”
내가 능글맞게 웃자 그가 내 가슴팍을 팔꿈치로 툭 쳤다.
‘운전석에 한 번만 태워 드리겠습니까.’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주차 관리실이 정면으로 보였다.
“어? 다시 내려오셨어요, 대표님?”
“대표님?”
“누가 대표님이야?”
관리 아저씨는 나에게 항상 저 호칭을 붙여 주었다.
한성 그룹에서 일하시던 분이기에 상하 관계가 굉장히 뚜렷하신 분.
하지만 가끔 부담스럽기도 했다.
입출차 시 항상 관리실에서 나와 거의 90도로 인사를 하시는데, 저분의 나이가 우리 부모님 정도 되신다.
몇 번이고 차에서 내려서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그게 편하다고 하시는 분.
아무튼 ‘대표’라는 호칭에 아이들이 동요했다.
“네. 대표님께서 제가 새로 산 차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하하.”
애들은 계속 몇 달 더 가르쳐야 하는데 괜히 일이 복잡해질까 봐 나는 빠르게 주차장으로 나가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관리 아저씨께 윙크를 했다.
내 사인을 바로 알아들으시려나?
“아! 네, 대표님.”
확실히 대기업에서 오래 계신 분이라 센스가 좋으셨다.
곧바로 그는 뒤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주현필에게 이렇게 말하며 인사를 했고, 주현필은 다시 한 번 똥 씹은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주현필에게로 쏠렸다
“선생님이 대표였어요?”
“대표였어요? 그건 반말이잖아, 녀석아!”
“아, 대표님이셨어요? 이게 맞나?”
하여간 애들이란 정말 시끄럽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대는 애들로 평소에는 완전히 적막이 흐르는 주차장이 시끌벅적해졌다.
주차장 구석에 세워진 거대한 내 차.
혼자 타고 다니기에는 너무 큰 차.
하지만 전생부터 꼭 한 번 타고 싶었던 차였다.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2007년형이었다.
“미쳤구먼…….”
“헐, 대표님 어떻게 애들 앞에서 그런…….”
“아!”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겠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내가 가족이 있고, 애들도 둘 정도 있으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그래도 미친 건 미친 것이겠지, 하지만 이건 커도 너무 컸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반들반들한 새 차 위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며 흠집을 내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굳이 막을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 덩치의 차를 산 건 깨끗하게 관리하고 타려고 산 것보다는 그냥 내키기에 산 이유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외제차라고 내 입장에서 더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고.
나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생각보다 돈이 꽤나 많다는 것이었다.
근 5년 간 어마어마하게 벌기만 했지 쓴 적이 뭐 있었는가.
오죽했으면 김윤지가 뭐라고 할 정도로.
집이 비싸다고 해 봐야 서울에 살 것 아니니 지방 집값은 크게 부담이 되진 않았고, 차도 비싸다고 해봐야 집값보단 싸다.
그리고 오죽하면 정장 하나 사 입었다고 애들이 바로 반응을 하겠는가.
보통 때 어떻게 입고 수업을 했냐고?
그냥 티에 청바지지…….
중요한 것은 수업이지 외모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다.
가끔씩 주주총회나 공식 행사 때만 정장을 입었었고.
“얼마야?”
“저거요? 비밀입니다. 관심 있으세요?”
“싸게 굴던 녀석이 갑자기 비싸게 구네.”
애들이 듣지 못하도록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로 주현필이 말했다.
내가 저리 대답한 것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기 위한 것.
아무래도 주현필은 툴툴거리는 모습이 어울린다.
“끝나고 회식 한 번 하시죠?”
“회식? 너랑 나 둘이서?”
“아뇨. 하하. 정확히 말하자면 회식은 아니고……. 이미도 원장님께 연락 드렸습니다. 주요 멤버들끼리 오랜만에 모이자고요. 김미연 부회장님께도 연락을 드렸는데 오실지는 모르겠어요.”
“뭐? 한성 그룹 김미연?”
“네. 선생님은 오실 거죠? 흐흐.”
돈을 쓰다 보니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자리를 모아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싶었다.
나와 함께해 준 사람들.
김미연 부회장은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은 아니다.
사실 와 달라고 해서 올 사람인지도 모르고.
사업적 이유 외에서는 만났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에게도 연락을 했던 건 우리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미국행.
떠나는 시점은 확실히 누가 보더라도 갑자기 정해진 날짜였다.
하지만 언젠가 변화를 한 번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해 오던 일이었다.
가기 전에 확인을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제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어느 정도는 이루고 있는지를.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네 차는 대리 기사들도 잘 끌려고 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든 되겠죠.”
그러고 나서 나와 그는 지방에서 보기 힘든 차를 신기한 눈으로 만져 보고 지들끼리 수군수군 대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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