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95화.
강재훈은 이것을 가져와 탁민호에게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자식 잘못 키운 것은 부모 책임이라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 과하군요…….”
아직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약간은 그가 안쓰러웠다.
아이들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나 주지 않는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에는 부모의 역할이 지대하나, 똑같이 잘해 준다고 하더라도 자라난 아이의 진로는 결국 아이의 결정에 따르게 된다.
쉽게 말해,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지만 두렵기도 한 일.
앞에 놓인 찰흙처럼 마음대로 빚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는 단지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해 준 일들이 아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기를 기대하면서…….
“유현덕 씨에게는 연락을 해 줘도 괜찮겠죠?”
“필적 감정만 끝나면 그래도 될 것 같아. 뉴스에서 보는 것보다야 기분이라도 낫겠지.”
“선배라면……. 어떻게 말을 해 줄 것 같으세요?”
“글쎄……. 나라면 그냥 조용히 있다가 뉴스에서 보도록 하겠지. 피해자들 일일이 상대하다가는 일에 집중하기 힘들어. 하하.”
웃기는 하지만 웃는 것이 아니리라.
경찰이라는 직업.
탁민호는 자신의 직업이 사회를 안전하게 유지한다는 자부심을 뺀다면 정말 오래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체도 허구한 날 봐야 하고, 막상 그것보다도 더 힘든 일은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파다 보면 별의 별일들이 다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는가?
동물 사회도 이렇지 않은데 만물의 영장이 이렇다면, 과연 세상에 신은 있는 것일까.
종교란 것에 특별한 거부감은 없었지만, 의심은 드는 것이 요즘 탁민호의 현실이었다.
선배가 가만히 생각에 잠긴 탁민호를 보면서 한마디 던졌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런 일들 매번 터지는 것이니. 익숙해져 조금 있으면.”
* * *
[강민호의 일기장]
이하 내용은 조규만, 김현진의 살해 용의자 고 강민호 씨의 일기장에서 관련 내용만을 추린 것입니다.
-아빠의 학원, 그리고 내 차지가 될 학원이 결국 유현덕이라는 애송이에게 넘어가다니. 물론 내 잘못이 크다는 것은 안다. 이제까지 물심양면으로 나를 지원해 준 엄마한테 미안했다. 내가 되도 않는 사업에 욕심만 내지 않았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엄마라면 나를 말렸어야지. 멀리서 주주총회를 지켜보며, 아빠와 엄마의 표정을 봤다. 엄마는 담담했다. 그렇겠지. 애초부터 아빠의 회사는 그녀에게 있어 단순하게 돈일 뿐이었으니. 하지만 아빠는 모든 것을 잃은 모습이었다.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제 나에게 줄 것도 없어진 사람이 되었다. (맥스스쿨 주주총회 당일: 안건은 운영진 교체에 관한 건)
-유현덕…….
-엄마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준다는 돈이 무슨 용돈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네. 돈이 부족한 건 아니다. 하지만 집에만 있으면 미칠 것 같다. 답답하다. 속이 너무 답답하다. 의사 선생님은 이럴 때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하겠지. 하지만 해 봤는데 영 아니다.
-새로운 경험. 오늘도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러 나갔는데 그만 새끼 고양이를 쳤다. 갑자기 길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피할 새도 없이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느껴진 그 감각. 직접 느낀 건 아니지만 정말……. 끔찍하지 않았다. 뭉클하게 바퀴에 뭔가 걸리는 기분이 들었을 때,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뭐랄까? 이상한 느낌이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슬퍼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고. 이거 정상인가?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사장이란 새끼가 머리를 때리더라고. 바로 옆에 달궈진 숯이 있었는데, 순간 그걸 들었거든. 그런데 내가 생각한 걸 그 사장 새끼도 느꼈나 봐. 움찔거리더니만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하여간 인간이란 자신보다 쎈 놈한테는 한없이 작아지면서 약한 놈만 괴롭힌단 말이야. 어쨌든 일이 끊겨 버린 것 같네. 집에 가면 엄마가 또 소리 지를 테고. 어떡하지…….
-인터넷에 폭발물 만드는 사이트를 들어가 봤는데 생각보다 신기한 것들이 많네. 흔히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약품만으로도 꽤 강한 위력을 가지는 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내 노트에 적어 두어야겠다. 뭣 하러 적어 두냐고? 혹시 모르지. 쓸 일이 있을지도.
-잠을 자는데 계속 어제 본 폭탄 제조법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약국에 가서 그대로 따라 만들어 공터에서 터뜨려 보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굉장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레시피를 수정하면 더 강해지지 않을까? 다른 약품들을 조금 섞어 봐야겠다.
-덧. 이거 재미있는데? 아주 산산조각이 나네.
-좋은 것을 발견하면 공유를 해야지. 애초에 그 비실비실한 폭탄 제조법을 찾아냈던 사이트에 내가 수정한 레시피를 올렸다. 이게 바로 소셜 네트워크지!
(중략)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의 레시피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오늘 폭탄을 제조해 달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돈도 꽤 준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젠장. 요즘도 꿈에서 계속 유현덕 그 새끼가 나온다. 그놈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빠 회사 물려받고 가끔씩 밑에서 일하는 강사 놈들 불러 놓고 떵떵거리면서 지낼 텐데. 유학할 때 친구들이 물어본다. 뭐 하고 지내냐고. 할 말이 없어서 짜증난다. 짜증이 난다. 심하게……. 유현덕.
-오늘 그 사람을 만나고 제의하는 것을 듣고 왔다. 그리고 놀라운 일. 오호라. 우연의 일치라고 해도 이런 일이 있을까. 기대된다. 유현덕.
-완전범죄라는 것. 어떤 것이 완전범죄이려나.
-갑자기 의뢰를 맡긴 사람이 발을 빼려는 모습이다. 자기가 유현덕을 죽여 달라고 했으면서 왜 책임을 지지는 않으려는 거지? 달라지는 건 없다. 그도 유현덕, 그 새끼랑 똑같은 놈이다. 자기들의 성공을 위해 남을 짓밟는. 이제 내가 밟아 줄 거다. 밟을 곳도 보고 밟았어야지.
-신은 없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했다면 나 같은 것은 태어나지 않았겠지.
-이 모든 일이 유현덕, 그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냥 편안하게 내 갈 길 가고 있는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그 녀석이 아빠 일에 끼어든 것 때문이고. 사람들은 모를 거야.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중 살아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시작은 내일이지만 하나씩 전부 끝까지 해결하려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를 무시해 온 그자들……. 모두 처리하면 전처럼 친구들도 편하게 만날 수 있을 거다. 준비는 끝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이다. (S 아카데미 폭발 사고 하루 전)
-운이 좋은 녀석이네. 이 정도로 크게 만든 적이 없던 폭탄은 생각보다 강하게 터지더라고. 하지만 유현덕은 멀쩡히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괜찮아. 이렇게 끝낼 것은 아니었으니. 순서상으로 네가 끝판 왕이니 마지막을 장식해 줘야겠어.
* * *
손에 들려 있는 종이 한 장.
압축, 요약본이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 실린 내용만으로도 그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분노?
굳이 이유가 정당하고 합당해야만 분노가 일어나는 건 아니지.
그는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간에 그가 가진 분노는 나를 향해 표출되기 시작했고, 그리고 실현시키려고 했다.
일부는 실현이 되었고, 최종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구나.
“괜찮으세요?”
종이를 건네주었던 탁민호 경사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 사람은 어차피 죽었는데.
“이걸로 윤지 누나가 칼을 쓴 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실한 살해 동기가 강민호에게 있었다는 증거가 되거든요, 이 일기장 내용이.”
그럼 된 거지.
일단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화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나로 인해 발생된 일이었다.
나도 나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재훈 전 대표가 운영하던 회사를 내가 날름 먹었던 것은 사실이니…….
이미도 원장이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의사에 반해 움직인 것은 사실이었다.
“강재훈 씨는 괜찮은가요?”
“너무 담담하신데요? 괜찮지 않으시죠. 뭐, 자식 일이 마음대로 된답니까.”
“안 키워 봐서 모르지만 청소년들 상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종종 보기는 했습니다.”
사교육보다도 공교육에서 아이들의 상태를 파악하기는 더 쉽다.
반 강제적으로 가정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가끔씩 학생들의 상태를 물어보시는 학부모님들의 전화를 받고 나면, 이게 정상인가 싶으면서도 안타깝기도 했다.
그들이 어쩌겠는가.
자기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세상인데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까지…….
물론 모든 학생들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가끔 보면 정말 부모 입장에서도 힘들 법한 상황들도 있었다.
“형사님께서 잘 다독여 주십쇼. 그분, 힘드실 겁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지셔야 하겠죠. 하지만 전해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당장 그는 지옥 속에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괴물을 만들지 않으려면 나도 역할을 해야 했다.
“저도 연락을 한 번 드려 볼게요.”
“굳이 안 그러셔도…….”
“원래 알던 분이라 그렇습니다. 이게 문제되지는 않겠죠?”
“뭐 개인적으로 연락 하신다는데 저희가 막고 자시고 할 문제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요. 이걸로 더 뵐 일은 없겠죠?”
“하하. 저를 보실 일이 있으시겠습니까. 없으면 좋은 거죠. 여기 커피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일의 처음부터 계속해서 신경을 써 준 이 사람에게 뭔가 보답을 하고는 싶었지만, 막상 그러려니 방법이 문제였다.
공무원이라.
굳이 다른 무언가를 바랄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커피값까지 자신이 내겠다고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맞기는 하지.
아직 내가 그에게 뭘 사 준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시기는 오지 않았지만, 이게 맞는 일이기는 했다.
아무튼 이 일은 이것으로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탁민호 경사는 내가 너무 침착해 보여 이상해하는 눈치였으나,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더 성공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을 나로서는 더 놀라기도 어려웠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난 것의 또 다른 영향이려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돈을 이리 벌어 놓고 이렇게 죽어 버리면 너무 허무하지. 암!
그나저나 의문은 아직 많이 남아 있기는 했지.
그 산장에서 내 목을 조르던 조규만은 뭐였을까.
단순한 허상이었을까?
아니면 산장 관리 할아버지의 말처럼 귀신이 나오는 자리라 그랬을까…….
잠깐 들여다 본 물소리가 들리는 구멍도 귀신에 한 표를 던지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곳은 귀신이 많이 있다는 말도 있잖은가.
혹시 그대로 있었다면 김윤지 먼저 죽었을 것이기에 죽은 조규만이 나를 깨운 것은 아니었을까?
이건 탁민호 경사가 죽어라 증거를 찾아 댄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 놓고 가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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