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92화.
“저……. 저기 뭐 좀 여쭤 봐도 되요?”
내 질문에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죽지 않은 거라면 빨리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는 게 보통인데……. 물어보는 건 자유지. 내가 대답을 해 줄지와는 관계없이.”
“저랑 같이 있던 여자도 살아 있나요?”
“여자? 여자랑 같이 있었어?”
어라.
현실에서의 삶은 전혀 모르는 건가?
단순히 죽은 자에게 기회만 주는 그런 존재?
“네. 김윤지라는 이름의 여자요.”
“글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너랑 동시에 올라온 사람은 없었어. 그리고 이름 말해 봐야 모르지. 네 이름도 모르는데.”
“제 이름도 모르세요?”
나도 어이 상실.
이름도 모르면서 내 외모는 기억하는 건가, 이 존재가?
궁금증만 늘어났다.
“알 필요가 있나. 너는 너고,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인걸. 허허. 그나저나 순탄치 않은 삶인가 보구나. 이번에 돌아가면 이야기나 잘 기억해서 나중에 들려주게.”
“돌아가요? 언제 돌아가나요?”
“지금!”
그리고 갑자기 이 할아버지의 오른손이 번쩍 하며 빛나고, 동시에 공간은 사라졌다.
이번에도 때려서 돌려보내나 싶어 몸이 움찔거렸지만, 그때와 똑같지는 않았다.
또다시 암흑이었다.
* * *
“유현덕 씨! 유현덕 씨!”
“음……. 끙…….”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그 흰 방에 있을 때는 몸이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았는데 갑자기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신음 소리가 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정신 들어요? 말 좀 해 보세요?”
“현덕아! 깨어난 거예요? 왜 아무 반응이 없어요! 흑…….”
김윤지의 목소리.
다행이었다. 그녀는 죽지 않았구나.
“으…….”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리고 약간 몸을 움직이니 누군가가 큰 손으로 나를 다시 짓누르며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일어나지 마세요. 지금 구급 대원들 오고 있으니깐 그대로 계세요.”
목소리가 익숙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니 희미해졌던 시각이 돌아왔고, 눈앞에는 탁민호 경사의 얼굴이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기도 전에 김윤지가 나를 끌어안았다.
정말 말 그대로 끌어안았다.
여자 품에 안기다니…….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도 웃긴 일이었지만, 실로 오랜만이었다.
언제였을까, 마지막이.
이번 생애에서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돈은 이렇게 떼돈을 벌면서도 여자 만날 시간조차 없이 지내 왔던 흑백사진 같은 나날들이었다.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아마 전생에서 학교에 근무할 때 잠시 만났던 친구였던 것 같다.
그때 내 나이가 갓 서른이 되었을 때였으니, 전생 더하기 현생을 하자면 거의 15년 만이었다.
하지만 곧 숨이 막혀 왔다.
그리고 그녀가 내 몸을 꽉 누르자 잠시 진정됐던 통증이 다시 찾아왔고.
참아 보려 했다.
참아 보려 했는데,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누나, 아파요.”
“미안, 미안. 괜찮아?”
“괜찮을 걸요? 모르겠어요. 누나는 괜찮아요? 강민호는요?”
“강민호입니까, 저 사람 이름이? 이거, 저랑 이름이 똑같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는 사람인가요?”
여기에서 탁민호 경사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간 나는 누군가가 흰 천에 덮인 채로 빨간 구급차에 실리는 것을 봤다.
흰 천이라…….
“죽었나요?”
“네. 저희가 여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황이었습니다.”
역시 그는 칼에 찔린 상태로 죽은 것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뜬금없이 이자는 갑자기 왜 튀어나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유현덕 씨와 김윤지 씨를 공격한 건지, 혹시 짚이는 데 없으신가요? 누구죠, 도대체?”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인데.
하긴, 그가 나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이 맞기는 했다.
나도 그 이유를 몰라서 대답을 해 줄 수는 없겠지만.
“전혀요. 음……. 맥스스쿨이라고 아세요?”
“맥스스쿨이요? 거기 모르는 젊은 사람 있나요? 애들 수능 강의 인터넷으로 해 주는 그런 곳이잖아요?”
“네, 맞아요. 맥스스쿨 전 대표가 강재훈이라는 사람인데, 저 사람은 그 사람 아들이에요.”
그의 표정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것 같았다.
뭐, 나도 사실 그와 마찬가지 입장이기는 했다.
내가 그에게 무슨 해를 입혔다고 이렇게 죽이려고까지 했는지…….
“교육업체 대표 아들이 그러면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요?”
“모르겠어요, 그건 저도…….”
그리고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 하나가 있었다.
“참, 경사님도 김현진에 대해선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건가요?”
사실 일련의 상황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조규만이 갑작스레 자살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고, 만약 그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라면 유력한 용의자는 김현진일 것이다.
그가 조규만과 가장 금전적인, 그리고 애증적인 관계가 깊었으니.
그리고 만약 김현진이 조규만을 죽인 거라면, 나나 김윤지에게 찾아와 이런 위협을 가할 사람도 그일 텐데.
강민호는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김현진의 이름을 들은 탁민호 경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놓친 건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김현진 씨도 어제 저녁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조규만 의원님과 비슷한 상태로요.”
제4강 실마리
“민호가…….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습니다.”
“당신, 어떻게 말을 그따위로 하는 거예요?”
“진정해 봐. 일단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당신 책임도 있으니까.”
“뭐라고요? 매일 일만 하느라 가족은 안중에도 없었던 사람이 할 소리에요, 그게?”
경찰서 안은 시끄러웠다.
원래 이곳이 조용한 날이 별로 없기는 했지만, 이날은 특히나 어둡고 시끄러운 분위기.
딱히 대화를 이어가는 남성 한 명과 여성 한 명이 툭하면 싸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건과도 겹쳐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오갔다.
탁민호는 머리가 아팠지만 일단 배정된 일이기에 머리를 꾹꾹 눌러 대며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있었다.
“자자, 싸우지들 마시고요. 어떤 부분이 이상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강재훈 씨?”
물론 처음부터 강재훈이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사건의 전후 관계에 연결고리가 부족했기에 탁민호와 다른 형사들은 산장 주인부터 조사를 했다.
산장 주인은 거의 60대 중반의 장년층이었는데, 이곳에서 평생을 산장을 관리하며 지냈다고 했고.
그가 죽은 강민호의 사진을 보고 바로 알아봤던 건 그를 통해서 유현덕과 김윤지가 방을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 시기에는 손님이 극히 드물고, 성수기라 하더라도 산이 험하고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며칠에 한 번 정도씩만 손님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유현덕과 김윤지가 오기 사흘 전(그러니깐 이 날짜는 유현덕이 인터넷을 통해 산장을 알아보고 결제한 그날이었다.) 강민호가 직접 산장으로 와서 그들의 인적 사항과 비용을 지불하고 갔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들이 도착하면 전화만 한 통 달라고 했고.
여기에서 죽은 강민호가 유현덕을 노리고 함정을 파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묻지 마 범행인데 일면식이 있었던 유현덕이 얻어걸린 것이 아니라.
그런데 도대체 ‘왜?’에 대한 답이 없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부모인 강재훈과 유미진을 경찰서로 부른 것이었다.
“소유욕이 굉장히 강했어요. 본인 것을 건드리면 워낙 심하게 반응을 해서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것이고요.”
“쓸데없는 소리. 애들 때는 다 그러지. 당신이 그 아이를 키운 것도 아니잖아!”
“조용히 좀 계셔요, 아주머니.”
“사고에요, 그냥. 우리 애가 먼저 그랬을 리가 없다니까요?”
강재훈은 그대로 난감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컸지만 아내의 말마따나 자신과 강민호 사이에 부자지간의 정이 있는 건 아니었고.
슬픔은 분명 존재하나, 자신이 본 유현덕이란 사내와 자신의 어려웠던 아들을 보자면 아마도 아들 강민호가 뭔가를 저지른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경찰에 협조하려고 마음먹고서도 난감하긴 했다.
‘내 아들이 좀 무섭고 그런 아이였소.’라고 어느 부모가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정은 없었더라도.
“칼! 맞아. 그 사람, 유현덕, 그 사람과 같이 있던 여자가 칼로 찌른 것이라면서……. 그런데 왜 민호를 자꾸 들먹이는 거예요. 흑흑…….”
이미 며칠간의 장례 절차로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탁민호는 그녀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했다.
만약 눈앞에서 이 사고가 일어났을지라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무서운 아이였어요…….”
강재훈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게 그들 둘의 조사가 끝나고 며칠간 강도 높은 조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냥 단순히 원한 관계로 인한 살인미수에 정당방위 사건으로 봤었는데, 강재훈의 저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찾아본 것은 대개 강민호의 행적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의외의 내용이 발견됐다.
“경사님, CCTV 추적 조회에서 조금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
“여기요. 이날 강민호가 카페에서 만난 사람이…….”
탁민호는 유현덕과 김윤지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 * *
“그래서 저희가 찾아본 것이 바로 조규만 의원의 행적이었습니다.”
탁민호 경사가 몇 장의 사진들을 서류 봉투에서 꺼내 큰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순서를 맞추느라 사진들을 정리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어떻게 조규만 의원이 강민호란 사람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조규만 의원이 사무실을 나가 도로에서 찍힌 CCTV, 그리고 여기 길가를 이동하여 이 모텔로 들어가는 장면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럼 사건 장소가 나온 건가요?”
김윤지가 물었다.
사고 이후 며칠이 지나고 그녀는 조금 진정된 상태로 보였다.
물론 나도 너무 자주 만나는 건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매일 두 번씩 전화로 연락만 주고받았다.
조규만 의원이 죽고 나서 기분 좀 환기시켜 주려고 갔던 여행에서 또다시 사고가 생겼으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건가, 내가?
“네. 이렇게 들어간 이후 그가 다시 나오는 장면은 찍힌 적이 없었습니다.”
“강민호가 찍혔나요, 그러면 혹시?”
“강민호 씨요? 그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 남자가 찍혔어요.”
참, 탁민호 경사는 아직 사고 전에 김윤지가 받은 사진을 모르고 있구나.
그리고 그가 가리킨 사진의 인물을 보자마자 확신이 들었다.
이건 증거였다.
나와 그녀는 그날 산장에서 내려온 뒤 경찰서에 잠깐 들르고는 그녀의 집에 갔다.
그리고 확인했던 것이 바로 김윤지가 김현진에게 전해 받은 그 사진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누군지 확인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강민호의 얼굴을 몇 년 만에 보고 나니 한 번만 더 사진을 보면 확실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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