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91화.
아직 칼을 완전히 손에 쥐지 못한 상태인데…….
그렇게 우리는 주방에서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나뒹굴었다.
칼은 날아가 버렸다.
동시에 내 유일했던 희망도 사라지는 듯했다.
“아…….”
그가 덮쳐 왔을 때 열려 있던 싱크대 모서리에 부딪혔던 것 같다.
머리 한쪽이 꽤나 아팠으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을 잃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잠에서 깨 정신없는 상태에서 온몸의 세포에 전기 충격을 가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상대였다.
나는 정신이 들기는 하면서도 그 자세 그대로 내 위에 올라온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뭔가를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이게 머리에 온 충격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
그가 내 위로 올라타더니 옆에 떨어진 둔기를 더듬거리면서 집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쉽게 가자, 유현덕.”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분명 목소리는 익숙했다.
하지만 어둠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누구일까.
그가 둔기를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꼭대기에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인 둔기가 내 머리를 향해 곧바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때,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콰직!
소름끼치는 소리가 귀를 스치며 울려 퍼졌다.
굳이 버둥거리지 않았던 건 상대가 가장 방심할 때를 노리라는 주현필의 말이 그 순간 어떻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밑에 깔린 상태에서 내가 아무리 버둥거려 봤자 상대방은 나를 제압한 후 정확하게 공격할 것이다.
그렇다면 체념한 척하고는 마지막 순간에 흔들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적중했다.
단순히 공격을 피한 것뿐이 아니라 중심이 흐트러졌다.
호신술의 기본, 몸의 중심.
공격에 집중한 그의 몸을 두 번 정도 흔들어 튕겨 낸 나는 엎드린 자세로 몸을 빼며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무엇인가가 번쩍였다.
아까 놓친 칼.
그 칼을 잡고는 냅다 베란다로 뛰었다.
이걸 굳이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인데, 일단 달빛이라도 있는 밖에서는 상대에게 이 칼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단 이제까지처럼 무지막지하게 덤비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베란다를 통해 2층에서 거의 뛰어내리듯 밖으로 몸을 던졌고, 무릎이 깨지는 듯했지만 다행히도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김윤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부르기 전 먼저 내가 뛰어내린 베란다를 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나!”
암흑 속에서의 외침.
이건 마치 검은 물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이자는 아직 산장 안에 그대로 있는 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 * *
그렇게 밖에서 건물 안을 노려보기를 몇 분 정도 했을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론 주변을 둘러보며 김윤지를 찾는 것도 동시에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신경은 건물 안으로 향해 있었다.
이 산장은 입구가 둘이었다.
방금 내가 뛰어내린 베란다 쪽 외부 계단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산장 입구였다.
둘이 서로 보이지 않는 위치라 쉴 새 없이 둘의 사이를 오가며 확인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무의미한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아니,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지.
김윤지가 경찰에 전화를 했을 것이고, 경찰은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끼이익.
산장 입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김윤지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활짝 열려 있었기에 몰랐지만, 나중에 관리인 할아버지가 닫을 때 났던 소리를 들었었다.
산장 입구가 보이는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반쯤 열린 문.
하지만 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꺼림칙한 기분에 베란다가 보이는 쪽으로 몸을 옮기려고 하다가 문득 산장에 있는 수많은 창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산장을 한 바퀴 돌면서 창문들을 봤는데, 하나의 창문이 완전히 활짝 열려 있었고,
훅.
그 순간 다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지만, 머리 위쪽에 무엇인가가 맞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헉.”
다행히 정타는 아니었으나 머리 위통이 완전히 날아갈 뻔했다.
몸을 굴리면서 움직이고는 재빨리 다시 일어나 자세를 잡았는데, 이제야 그가 내 손에 들린 칼을 발견한 것 같았다.
“햐, 이제는 칼도 쓰시네, 선생님이.”
“다, 당신이 왜?”
“기억도 하고. 맷집도 좋은데?”
강민호…….
맥스스쿨 전 대표 강재훈, 그리고 그의 아내 유미진의 아들 강민호였다.
“왜 이런 일을…….”
“몰라서 물어? 대화하려고 온 건 아닌데, 나름 강단도 있는 사람이구먼?”
확실히 몇 년 전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강재훈 대표와는 다르게 상당히 건장한 체격, 그리고 머리는 쓸 것 같지 않은 외모.
그런데 도대체 그가 왜 이런 시점에 나를 공격하려는 거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이 오고 있어요. 여기서 그만하시죠.”
“그래서 빨리 처리하고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나에게 아까처럼 다시 돌진했다.
다만 상황은 나에게 그리 불리하진 않았다.
달빛이 그와 나의 위치를 희미하게나마 보여 주고 있었고, 여긴 공터였다.
그의 덩치를 생각하면 이런 곳에서 빠른 움직임은 못 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매우 재빨랐다.
나는 손에 들린 칼을 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의 돌진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 버렸다.
“흡.”
곧바로 아까처럼 다시 깔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젠장, 주현필.
호신술을 가르쳐 주려면 얻어맞는 것 말고 좀 쓸 만한 걸 가르쳐 줘야지.
나중에 뭐라고 좀 해야겠다.
물론 여기서 살아 나가는 것이 먼저지만…….
“내가 미식축구를 조금 했거든.”
손에 칼…….
휘둘러야 하나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는지 잠시 머뭇거렸고, 그대로 칼을 쥐었던 손이 눌리며 다시 놓쳐 버렸다.
좁은 공간 안에서도 잘 피해 왔는데, 오히려 공터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나 싶었다.
그의 거대한 손이 내 목을 감쌌다.
“윽……. 윽액.”
몸을 마구 튕겨 보았지만 아까처럼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다시 끝나는 것인지…….
이 와중에 조금 우스운 이야기를 하자면, 상황이 전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목이 졸리는 건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숨이 가빠지고 양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소변이 마려운 것 같기도 하고…….
이 상황에 무슨 소린지.
그리고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거 또 다시 흰머리 할아버지를 보게 되는 건가…….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리고 아마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내 목을 꽉 쥐고 숨통을 막고 있던 그의 손이 갑자기 풀렸다.
“캑……. 큭……. 엑……. 컥컥.”
힘만 빠진 것이 아니라 아예 그가 내 목을 놓은 것이었다.
기침이 심하게 나왔다.
그리고 내 눈에 그가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 완전히 등을 보이면서.
그의 등 뒤에는 칼 한 자루가 꽂혀 있는 상태였다.
“뭐야, 도망가질 않았네, 이 아가씨…….”
칼에 맞았으면 쓰러져야 하는 거 아닌가?
이자는 몸이 어떻게 된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두 발자국 내딛더니 시야에서 벗어났다.
소리만 들렸다.
끔찍한,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소리.
“꺄악!”
김윤지의 비명 소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강민호가 그녀에게 손을 댄 것이리라.
눈앞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누운 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괴물 같은 덩치와 힘.
두려워야 정상이겠지만 갑자기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까지 목이 졸렸던 상태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야이, 나쁜 자식아!”
이번에는 내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가 쓰러지며 내 몸을 차 뒤로 넘겼고, 나는 어디인지도 모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상황이었다.
* * *
흰 방.
또다시 이곳에 오다니…….
“넌 자꾸 왜 여길 오는 거야. 조금 안전하게 살 수는 없는 거니?”
나도 여기 자꾸 오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닌데.
하지만 어쨌건 이 할아버지가 나를 끌고 오는 것도 아니니 할 말은 없었다.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건가요.”
“어쭈구리? 이 녀석 이제 말도 편하게 하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정말 또 죽은 건가요?”
어쭈구리라니. 이건 무슨 과거의 유물 같은 말투인가.
하긴 이 할아버지,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오래 살았겠지? 인간이 아닐 테니 말이다.
지난 번 밤중에 기습을 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도 여기까지 다시 왔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고 했고.
그대로 돌아갔더니 3개월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만약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또 얼마만큼 뻗어 있게 될는지 조금 걱정이 됐다.
그나저나 강민호는 도대체 왜 날 공격한 건지.
거기에 나만이 대상이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김윤지까지 위험할 뻔했다.
그녀는 어떻게 된 거지?
나처럼 어디선가 이 할아버지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마 그녀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은 아니리라.
나 때문에 시작된 일.
“죽기는……. 이번이 너 마지막 삶이잖아? 그러면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야. 게다가 넌 명부에 이렇게 죽게 되어 있지는 않고.”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흰 방.
몇 번 왔던 기억이 있는 곳이라 익숙해서 나쁘지 않았는데.
그나저나 이렇게 죽지는 않는다고?
무슨 말일까, 이건 또.
지난번에도 여기에 올라왔다가 바로 돌아갔다.
적어도 지난번과 이번처럼 얻어맞아 죽지는 않는다는 의미인가?
“명부에 어떻게 죽는지도 나와 있어요?”
“나와 있기는 해. 하지만 계속 달라지기도 하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게 죽는다고 되어 있진 않아.”
“어떻게 죽는데요?”
“알려 줄 수 없어.”
뭐야, 이 할아버지.
알려 줄 것처럼 다 말해 놓고 이제 와서 발뺌이라니.
하지만, 이걸 굳이 내가 알아야 할까 싶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게 된다면, 달리 말해 나의 마지막 순간을 알게 되면 세상 참 재미없어지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죽지는 않았구나, 다행히도.
그러면 김윤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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