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88화.
대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내 최대의 업체를 가지고 있는 나였기에 당연히 주변인들의 관심사는 이런 것이리라.
그런데 주변인이 극도로 적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
그녀는 그 적은 주변인 중 하나였으니 이런 것이 궁금했겠지.
“해야죠, 뭐. 딱히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계속, 이대로?”
잠깐 대답을 미뤄 두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계속 이대로 S 아카데미를 운영할 수 있을까, 나는?’이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서.
일이란 것이 원래 내가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흘러가는 급류에 몸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느껴 왔다.
전생에 학교에서 근무를 할 때도 그랬고, 지금은 사교육 시장에 있지만 마찬가지고.
그런데 만약, 그 급류에서 의식적으로 빠져나온다면, 그러면 그 앞에는 뭐가 있을까.
수십 년간 일을 해 온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퇴직서를 내고는 가족과 함께 세계 일주를 떠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변화를 주고 싶긴 한데, 글쎄요. 막상 시작하고 나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이 모든 일이 흘러가요.”
“그렇지. 나도 그랬어. 지금도 그런 것 같고.”
“이제 좋은 일만 있겠죠. 한 사람이 겪을 힘든 일들을 짧은 시간 동안 몰아서 겪으셨으니까요.”
“그러면 좋겠지. 그래도 기다리기만 하기 보다는 내가 뭔가를 스스로 바꿔 보면 어떨까 싶어.”
“그래서 인수를 물어보신 거예요?”
그녀는 나에게 성공 대입학원 인수를 제의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학원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S 아카데미도 최근 사고가 있었고, 벌린 일도 많았다.
거기에 요즘은 조금 뜸했지만 한성 에듀의 무료 강의 서비스 사업에도 참여 중이고.
크게 보자면 내가 일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맥스스쿨의 일들과 교육방송까지.
너무 벌린 일들이 많았다.
내가 벌렸으니 내가 마무리 짓고 싶은 욕심.
“응. 모든 것을 다 떠안으려 하지 마.”
뭐야, 인수해 달라는 말은 일거리 하나를 더 던져 주겠다는 건데, 그런 사람이 나에게 모든 일을 떠안으려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다니.
앞뒤가 안 맞았다.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이런 사소한 것을 짚어 말하기도 그랬기에 그냥 들었다.
“나는 한동안 조금 쉴까 해. 학원계를 떠나서.”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인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뭔가 많이 지쳤으리라.
자세한 가족 관계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있더라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규만은 일적인 관계와 가족 관계 모두 얽혀 있었는데, 그에게 납치를 당하지를 않나, 그리고 그가 죽어 버리질 않나,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
나도 그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해요. 도와드릴 건 없어요?”
“인수.”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나.
인수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건물 구입비로 몇백억을 쓰기는 했지만, 아직 수중에 그만한 돈이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들어오는 중이고.
하지만 내가 성공 대입학원을 인수하고, 그녀는 학원계를 떠나는 것으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그건 필요하면 할 수 있어요. 근데 그렇게 하고, 누나가 학원 일을 그만두고 뭘 하실지가 문제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은 변화를…….”
끽! 끼기긱!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나와 그녀는 산장 앞 테이블에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쪽은 그 숲길 쪽이었다.
나와 그녀는 갑작스런 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다른 소리가 들려올까 싶었지만 그게 전부였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쪽에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었지.
“네. 그냥 숲인데요? 사람 다니는 길도 아닌 것 같았는데…….”
끼기긱…….
이번에는 우리가 그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소리가 났다.
처음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이건 분명 스피커, 아니면 앰프에서 나는 소리였다.
앰프를 켠 상태로 잭을 꽂을 때 들을 수 있는 잡음.
학원에서 강의할 때는 종종 앰프를 써서 했기 때문에 자주 들어봤던 것이다.
“뭐야? 또?”
그녀는 겁도 없이 그 숲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고.
내가 먼저 앞장서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긴 했지만, 아까 저 길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이상한 기분은 걸음걸이를 자꾸만 늦췄다.
어느새 숲길 입구까지 다다랐지만, 그녀는 곧바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거기는 그렇게 확인을 해야 할 정도로 이게 길인가 싶은 길이었다.) 내 쪽을 보고 이렇게 말했고.
“네가 먼저 들어가 봐. 계속 소리 들리면 밤에 불안할 것 같아.”
“제가요? 별것 없다니까요? 그건 그렇고 이런 곳에 기계음이 들릴 만한 것이 있을까요?”
왠지 찜찜한 기분이 계속 들었기에 나는 선뜻 아까 그 길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여자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는 좀 소심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녀는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잠시 보더니 이내 숲길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참…….”
나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고.
역시나 아까처럼 들어가자마자 바깥의 햇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어두워졌다.
이런 숲이 우리나라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인 것 같았는데, 두 번째 들어오다 보니 처음 들어왔을 때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산속은 나무들에게서 나오는 습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는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야 할 것 같은 숲속인데 의외로 너무 말라 있었다.
그것도 바닥만…….
낙엽들이 수분을 머금고 있지 않고, 발에 밟히는 대로 족족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소리만 공간 속에 가득했다.
“이래서 다시 안 들어오려고 했나 보네?”
5분 정도 아무 말 없이 길을 따라 걸어갔을까?
아까 내가 들어왔을 때처럼 옷에는 땀이 젖어 들었다.
유독 이곳이 밖보다 더운 것도 아닌데도 긴장감 때문인지 땀이 많이 났다.
신기한 건 김윤지는 그다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일까?
나보다도 빠른 걸음걸이로 계속 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아까와 같은 소음은 나지 않았지만 물이 흐르는 소리는 커졌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물이요?”
“응. 그나저나 땀을 왜 그렇게 흘려?”
“이상하게 땀이 많이 나요. 더운 것도 아닌데…….”
“조금만 더 들어가 보고 돌아가자. 미로 같네, 여기는.”
길이 있기는 했지만 미로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막상 다시 보니 산짐승이 다니는 길 같지는 않고, 사람이 다녔던 길 같은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낙엽들이 바삭거렸고.
그리고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다시 5분쯤 들어갔을까?
계곡을 찾기를 기대했던 우리 둘의 눈앞에 뜬금없이 웬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물소리의 진원지는 이곳인데 바위라니.
“현덕아, 저 바위 좀 들어 봐.”
조금 친해지니 자꾸 뭘 시키네.
하긴, 궁금하긴 한데 막상 바위 크기가 커서 직접 들기는 어려웠겠지.
근데 나도 썩 이 바위에 손을 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끼로 뒤덮여 있어 미끄러울 것 같이 보이는데다, 이런 산속의 바위 아래에 어떤 벌레가 튀어나올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들까, 그러면?”
그러더니 바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가 할게요. 대신 뒤에서 뭐가 나올지 모릅니다.”
“뒤는 나에게 맡겨!”
말이야 쉽지.
자주 보는 생물이 나오면 걱정이 없지만, 처음 보는 벌레면 하나도 위험하지 않더라도 모르기에 두려운 법.
하긴, 나는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는데, 이런 걸 두려워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놀라는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좋은 것으로 놀란다면 모르지만, 벌레 같은 것으로 놀라면…….
조심스레 바위 쪽으로 걸어가 한 바퀴 돌면서 살펴봤다.
바위는 그냥 평범한 큰 바위.
아래 뭐가 특별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단지 조금 꺼림칙한 점이 있기는 했다.
주변에 다른 돌 같은 것이 거의 없는 곳인데 이 바위가 덩그러니 있는 기분?
누군가가 이걸 여기에다가 들어다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왜? 모르지, 그거야.
손을 바지에 문질러 땀을 조금 닦아내고 바위에 가져다 대었다.
이끼의 감촉이 느껴졌으나, 생각만큼 미끄럽진 않았다.
오히려 폭신하고 건조한 감촉이 색다른…….
변태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냥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니.
바위는 무거웠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을 들어내자, 흙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곳에 웬 구멍 하나가 있었다.
작은 구멍이 아니고 큰 구멍.
A4용지 한 장 넓이 정도일까?
바위는 마치 맨홀 뚜껑처럼 그 구멍을 막고 있었고.
그리고 물소리가 훨씬 크게 들렸다.
“뭐야? 무슨 맨홀 같은 건가?”
“와, 이거 무거운데요?”
“계곡을 찾아 들어왔더니만 무슨 하수구가 있네.”
짐짓 아쉬워하는 표정.
이상하긴 했다. 굳이 왜 이런 곳에 산장이 있나 싶기도 했고. 산길이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고르긴 했지만 나는 또 왜 이런 곳을 골랐는지…….
그리고 이런 산속에 하수구라고?
보통 그냥 개울로 흘려보내거나 하는 거 아니었나?
하수구를 여기까지 뚫으려면 굉장히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딱히 물어볼 사람도 없었기에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가자.”
“아까 그 끼긱 거리는 소리는 뭐였을까요?”
“모르지 뭐. 물소리는 이거 들은 것 같은데, 그건 모르겠네. 더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죠. 돌아가시죠.”
“응.”
우리는 그렇게 다시 들어온 길로 나가 산장까지 돌아갔다.
* * *
산속의 밤은 도시보다 빨리 찾아온다.
주변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비탈들이기에 해가 산기슭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숲속에 들어갔을 때의 그 찝찝한 기분은 공터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숲이 우거진 산속에서는 원래 산불의 위험이 있어 바비큐 같은 것을 해 먹기가 그렇다.
하지만 여기 산장은 좁지 않은 공터를 가지고 있어 가능했고.
나는 사 온 고기를 구우며 김윤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물론 둘 다 숲속에서 발견한, 바위로 덮여져 있던 그 구멍은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일 그만두고 학원 처리하는 건 걱정하지 마세요. 결정만 내리시면 그냥 제가 운영해도 괜찮으니까요. 거기에 뭐, 유환 선생님께 운영 맡긴다고 하시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신성 학원 수학과 유환.
내가 신성 학원에 처음 들어가기 전부터 주현필 다음으로 오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같이 있는 김윤지와 내가 만나도록 주선해 준 사람이기도 했고.
사람이 나쁘거나 하진 않은데, 주현필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다.
주현필이 조금 거친,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를 챙겨 주는 츤데레 느낌이라면, 유환 선생님은 평소에 너무 좋은 사람이지만 정작 어려운 일에 빠지면 과연 나를 도와줄까 싶은 그런 사람.
둘 다 장단점이 있긴 했다.
그러니 S 아카데미 론칭 강사진에도 유환을 포함시켰던 것이었고.
아무튼 그라면 성공 대입학원에 분명 눈독을 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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