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87화.
“허허. 여자가 기가 더 세구먼. 아무튼 열쇠는 여기에 있고, 필요한 것 있으면 아까 연락했던 그 번호로 연락하면 되네. 하긴 근데 필요한 게 있어도 우리도 없는 것이 많아. 허허.”
뭐야, 그럼 연락하란 말은 왜 하는 건가.
이상한 노인이다 싶었다.
하긴 내가 만난 이상한 노인이 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요즘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 흰머리 할아버지도 있고.
오광필 할아버지도 있고.
할아버지가 내려가고 방을 둘러보는데, 방은 총 두 개였다.
화장실은 하나.
씻는 곳도 거기에 다 있어서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네.
땀으로 몸이 절어 있어 씻기는 해야 할 테고, 화장실을 갈 일은 부디 없으면 좋겠다.
음…….
“경치 좋아. 이리와 봐.”
그리고 그녀가 서 있는 베란다로 나갔더니 눈앞에 엄청난 규모의 수풀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응? 나무만 빼곡한데 경치가 좋다니.
‘나무를 좋아하나?’ 하고 생각한 나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쳐다봤는데, 경치가 좋다고 한 말은 반어법이 분명했다.
그녀는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그 경치냐?’ 하는 표정으로.
나는 급히 베란다를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또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내가 막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선반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내가 내려오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방금 전에 여기 있던 관리인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숙소 예약을 할 때 통화를 했던 목소리이기도 했고.
“네, 뭔데요?”
-1층 로비에 있는 것 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다 써도 되네. 별거 없겠지만.
별거 없는데 자꾸 아까부터 뭘 쓰고 뭘 연락하라고 하는 건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 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그리고 저녁 10시 이후에는 산장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멧돼지나 이런 것들이 돌아다녀서 위험할 수도 있어.
“네, 알겠습니다. 10시 이후요?”
-응. 10시 이후.
그러고는 내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뭔가 로비에 있는 것을 쓰라고 할 때와 10시 이후에 밖에 나오지 말라고 할 때의 목소리가 달랐던 것 같았는데, 그건 그냥 기분 탓이겠지.
모르는 동네에 와서 한밤중에 돌아다닐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이런 산골은 도시와는 달라 밤이 되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도시에서처럼 불빛이 많은 것이 아니기에.
“무슨 전화야? 학원이야?”
“아니요. 아까 그 할아버지요.”
“관리인 할아버지? 뭐라시는데?”
“밤에 돌아다니지 말래요. 로비에 있는 건 다 써도 된다고 하고요.”
“로비라고 해 봐야 별것 없겠다만.”
“그러니까요. 누나 먼저 씻으실래요?”
이 말을 하는데 왜 내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혈액순환 문제인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마치 형사가 속마음을 숨기는 범인의 눈을 바라보듯.
나는 본능적으로 복종의 의미로 눈을 내리깔았고.
“응. 근데 나 씻는 동안에 산책이나 좀 하고 와. 여기 오면서 나무밖에 안 보였는데 아까부터 웬 물소리도 들려서. 한 번 어딘지 찾아봐.”
씻으러 들어가기 부담스러웠을까.
그녀는 정말 빈틈없는 여성이다.
나는 바로 방을 나와 산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봤다.
사진에 나온 것과 다르지는 않은데 왠지 분위기가 조금 어두운 것 같았다.
산장은 오래된 통나무 건물로 보였다.
독특했던 건 산장 안에 숙소는 방 두 개짜리 하나지만 입구는 두 군데라는 점.
우리가 들어온 로비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하나 나 있었고, 숙소 밖 베란다 쪽으로 직접 올라가는 계단 하나가 더 있었다.
물론 이쪽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올라가는 입구 쪽으로 철로 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하지만 성인 남성이라면 훌쩍 뛰어 넘을 만한 높이.
뭐 이런 산속에 누가 들어올까 싶어 특별히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물소리.
아까 올라올 때는 가쁜 숨을 내쉬느라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정말로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계곡이 주변에 있는 것인가?
대충 주변을 둘러보아도 특별히 우리가 올라온 길 말고는 길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었다.
사방이 나무로 막혀 있는 구조.
하지만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잘 살펴보니, 정말 작은 오솔길 같은 것이 있긴 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는지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햐, 이런 곳에 길이 있긴 하네. 산짐승들이 사용하는 길인가?”
사람이 통행하는 산길 외에 산짐승들도 주기적으로 이동을 하는 길이 있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물소리가 가깝게 들리는 건 아니라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그 좁은 길로 진입했다.
아직 한낮인데도 숲속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특이한 건 숲에 들어오고 햇볕도 차단되니 조금 시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았다.
등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고, 뭔가 괜히 긴장이 됐다.
어디선가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기도 했고.
대충 30미터를 채 못가 발길을 돌리기로 마음먹었을 때,
스륵.
뒤쪽에서 뭔가 소리가 난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방금 지나온 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자.’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여기로 오자고 한 건 나였지만, 괜히 이런 장소를 골랐나 싶기도 했고.
들어올 때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면, 지금은 거의 뛰다시피 산장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산장이 눈앞에 보이고 내가 그 길을 완전히 빠져나와 공터에 들어오니 시원한 바람이 나를 맞아주 었다.
“어디 갔다 와? 거기 뭐 있어?”
산장 베란다에는 막 씻은 듯한 모습으로 김윤지가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은 저 베란다에서 약간 사선으로 보이는 위치.
“씻었어요, 누나?”
“응. 계곡 찾았어?”
“계곡 같은 것 안 보이던데요?”
사실 물소리의 진원지까지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그냥 이렇게 말했다.
‘혼자 숲길 걸으니 무서워요.’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없어? 물소리가 이렇게 들리는데도?”
“없어요……. 어?”
무심코 우리가 올라온 길 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산장 관리 할아버지가 있었고.
아까 내려갔던 것이 아니었나?
게다가 전화까지…….
하긴 전화는 산장 안에서라도 할 수도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방문을 두드리면 우리도 불편할 테니.
그런데 내가 의아했던 건 그가 이제 막 올라온 모습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인 점이었다.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
“내려가셨던 것 아니셔요?”
그쪽으로 내가 소리쳤다.
그는 내가 그를 인식한 것을 몰랐는지 오히려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어? 허허. 아니, 아니. 내려가다 보니 말을 해 줄 것이 또 생각나서.”
“네?”
“밤에는 나가지 말고, 자다가 좀 추우면 로비 카운터 뒤편으로 보일러 있으니 틀고 자라고. 그리고……. 아니다. 허허.”
“네? 왜요?”
“음……. 가끔 이상한 것 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건 여기 산장 아래 물이 지나가서 그러는 것이니 맘 놓고 쉬게.”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추울까 봐 걱정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는데 굳이 의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그나저나 이상한 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귀신같은 것들?
뭐, 나는 귀신은 안 믿으니깐.
음…….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까지 했는데 귀신을 안 믿는다고?
사실 그거랑 그거는 별 관계는 없지 않은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으니깐.
적어도 저 할아버지는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내 인사를 듣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길을 내려갔다.
추우면 보일러를 틀라는 말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말했던 밤 10시 이후에는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도 우리가 모르는 장소니 충분히 그럴 만했고.
내가 할아버지와 멀리서 소리치며 대화를 하는 동안 김윤지가 산장 건물에서 내려왔다.
“누구야? 관리 할아버지 아직도 계셨어?”
그녀가 서 있던 베란다 위치에서 나는 보였을지 몰라도 산장으로 올라오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딱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랬기에 누군지 궁금했겠지.
여기가 사람들이 자주 오갈 만한 곳도 아니고.
“내려가시다가 다시 올라오셨나 봐요. 그나저나 계곡은 보이지 않아요.”
“희한하네, 그거 참. 너도 얼른 씻고 나오셔. 땀 꽤나 흘렀잖아. 지금도 왜 이렇게 땀이 많이……. 풉.”
“왜요?”
“얼른 씻고나 나와.”
그녀가 왜 웃음이 살짝 터졌는지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알 수 있었다.
숲으로 들어가고 나서 온몸에 흥건히 흘렀던 땀은 산장 공터의 바람으로 웬만큼 마른 상태였는데, 유독 겨드랑이 부분이 덜 말라 있던 것이었다.
겨땀……. 쪽팔리게…….
화장실 물은 의외로 아주 잘 나왔다.
하긴, 산장 건물은 오래되긴 했어도 내부 인테리어는 몇 번 완전히 뜯어고친 것 같았다.
수압도 세게 나왔고, 온수와 냉수 모두 잘 나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물 온도를 맞춰 가며 땀에 젖었던 몸을 씻었다.
신기한 것은 김윤지가 찬물로 씻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부가 답답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보통 뜨뜻한 물로 씻고 나면 더운 습기가 가득 차 버리는데.
화장실에는 따로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없었으니 환풍 장치가 엄청 잘 작동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녀가 거의 찬물로 씻었다는 말이 된다.
의외로 괜찮은 산장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후딱 씻고 나서 문을 살짝 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후다닥 따로 챙겨 온 옷을 입었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아까 내가 들어갔던 바로 그 자리에 김윤지가 서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면서.
“누나!”
“어?”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듯 그녀는 놀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뭐해요? 거기 뭐 있어요?”
내가 막 들어갔다 나왔던 길이었지만 모른 척하면서 물었다.
“아니, 그냥 여기 길이 있는 것 같아 보여서. 그런데 잠깐 보다가 멍 때리고 있었네.”
“길이 있기는 한데 별건 없어 보여요. 저도 아까 조금 들어갔다 나왔어요.”
“분명 이쪽에서 물소리가 들리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산장 쪽으로 걸어오는 그녀.
오랜만에 다시 느끼는 거지만,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전혀 모르는 나였기에 그냥 지금은 이 정도 거리를 두고 보는 거지만.
응? 하긴, 오늘 이렇게 같이 여행을 왔다는 것 자체가 거리가 많이 좁혀진 걸까?
“뭘 그렇게 히죽거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아니에요. 근데 이제 뭐 하죠?”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밤새고 내일 일찍 돌아갈 거니깐.”
“걱정하지 마십쇼.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여기에서 가장 무서운 건 김윤지 원장님이십니다.”
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이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같이 웃었고.
확실히 몸은 머리와는 다르게 스스로 기억을 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지금부터 뭘 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이야기나 하자.”
그녀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시기적절한 생각이었고.
내가 좋자고 놀러 온 것도 아니었고, 이번 여행은 전적으로 최근 있었던 그녀의 힘든 일들을 잊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무슨 이야기요?”
“그냥. 이런저런. 너는 앞으로 계속 S 아카데미 운영할 거야?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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