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84화.
지난번에는 탁민호 경사를 찾으러 왔다는 내 말에 전화로 확인을 하고 보내 주었는데, 그 사이에 번호를 외워 둔 것인지 오늘은 그대로 패스.
넓지만 차가 거의 차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 내리니, 입구 쪽에서 탁민호 경사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사람과 만나는 건 이번에 두 번째.
“자꾸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죠?”
김윤지는 경찰서에서 별말을 하지 않았다.
경찰서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내가 희한한 거지.
그녀와 탁민호가 인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아 지난번에 갔던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저,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조금 실례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조규만 의원 사건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조금 들어 보고자 연락을 드렸습니다.”
“뭔가 새로운 증거가 나왔나요?”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현직 국회의원이 자살을 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거든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뭔가 굉장히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해서 압박감에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된 건 아닌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근데 그럼 누가 그를 죽였을까?
분명 그는 전화로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고, 사흘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사흘 동안 자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뒤집을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압박감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리되면 우리 쪽에서는 경찰에 김현진이 넘겨준 증거를 넘길 것이고, 조규만의 명예는 사후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추락한다.
죽은 자에게 무슨 명예가 중요하겠나 싶겠지만, 마지막으로 받은 전화에서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러면 증거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김윤지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탁민호 경사는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보여 주었고.
“진술서입니다. 조규만 의원이 발견되기 전 날, 사무실을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그를 본 비서진들의 진술서요.”
원본은 아니고 사본.
그리고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마지막 부분에 형광펜으로 칠해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를 받고는 보통 퇴근 시간인 4시가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았는데 급히 나가셨습니다.]
김현진의 전화였을까?
그리고 탁민호는 서류 한 묶음을 더 꺼냈다.
“통화 내역입니다. 2시 30분 조금 넘어서 그에게 걸려 온 전화번호, 그리고 비서진들이 진술한 3시 이후에 단 한 번의 통화. 번호가 같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게 의아한 점입니다. 대포폰이라 명의자와 사용자가 다릅니다.”
대포폰.
김현진과 통화를 했거나, 아니면 김현진을 찾았다는 사람과 통화를 했을 것이다.
“마지막 통화 발신 위치를 확인을 해 봤는데…….”
그리고 그는 잠시 물을 마셨다.
“사망 추정 시각과 비슷하지만 장소가 산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였죠?”
그는 다시 잠시 뜸을 들이더니 김윤지를 힐끗 쳐다보았고,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궁금해 하고 있는 것 같자 말을 이어 나갔다.
“성공 대입학원 인근이요.”
성공 대입학원.
김윤지가 현재 원장으로 있는 곳.
그리고 조규만이 실질적인 소유주인 학원.
설마 하는 생각에 김윤지를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분명 아니었다.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도 나처럼 입이 떡 벌어져 놀라고 있었으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했느냐가 아니었다.
일단 조규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닐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
죽은 다음에 산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말이겠지?
“그래서 죄송스럽긴 합니다만, 김윤지 씨 동선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알리바이는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건물 안에 계속 계셨던 것이 CCTV에 제대로 찍혀 있었고요.”
다행이다. 이 사람도 그녀를 의심하기는 했었구나.
그래도 덕분에 확실하게 그녀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학원에 폭발물이 설치된 것을 알고도 터질 때까지 알리지 않은 사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고가 난 뒤 챙길 것을 챙겨 사라진 그 사람.
“이게 저희 일이라 기분이 상하셨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만 혹시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지 여쭤 보려고 이렇게 현재까지의 수사 상황을 알려드린 겁니다.”
이해하다마다.
조규만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면, 이제 더 이상 경찰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와 정황증거를 숨길 이유가 없다.
“누나…….”
“……응? 아, 왜?”
그녀는 넋이 나간 모습.
이런 난잡스런 상황에서 무슨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을까.
그녀가 몸을 떨고 있었다.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나는 그대로 그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탁민호 경사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정수기에 가서 물을 두 컵 떠다 주었고.
나름 센스 있는 행동이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도 우리에게서 정보를 최대한 얻어야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겠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쉽사리 정리될 일이 아니기는 했다.
정황증거는 ‘김현진’을 가리키고 있으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로도 부족했다.
그리고 김윤지가 눈을 꽉 감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외삼촌의 비서였던 김현진 씨가 며칠 전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연락을 한 내용만으로는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추론을 한 것인지 설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간 만나고 나눴던 대화들을 모두 털어놓고 있었다.
탁민호 경사는 주의 깊게 들으면서 앞에 놓여 있는 빈 종이에 중요한 참고 사항들을 적어 두는 것 같았고.
나는 나대로 김윤지가 보여 주었던 증거들, 김현진이 그녀에게 건네준 사진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모든 이야기를 끝낸 시간은 거의 30분 이상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니깐, 김윤지 씨 말씀은 조규만 의원의 죽음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에 김현진 전 비서가 개입되어 있다는 의미네요?”
“네, 맞습니다.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은 그 사람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럼 돈을 건네주고 받은 지분은 현재 유현덕 씨 소유로 넘어간 거고요.”
“거래소에서 확인 받고 공시까지 끝낸 상황입니다.”
탁민호는 다시 뭔가를 종이에 끼적였다.
완전히 백지였던 A4 용지는 어느새 꽉 차 있었다.
“알겠습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일단은 저희도 김현진 씨 소재 파악을 한 번 해 볼 테니 혹시 연락을 받거나 하시면 곧바로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당연히 그래야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일인걸요.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는 탁민호 경사.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결국 그는 말을 했지만.
“생각보다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단독으로 그와 만난다거나 하지는 않으시면 좋겠네요. 저희에게 연락을 주세요.”
그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미쳤다고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겠는가.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무섭네요, 이거.”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 조금은 넉살좋게 말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다짐을 받고는 주차장까지 나와 배웅을 해 주었고, 나와 김윤지는 차를 타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그녀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흐느낄 뿐이었다.
그녀에게 이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 * *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들.
경찰서에 다녀온 뒤로 계속 그런 상태였다.
일이라고 해 봐야 지원재 실장이 알아서 처리하는 상황이고, 강의는 일주일간 휴강한 상황이라 책상에 앉아 있는 것뿐.
어찌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 일이 없어진 것도 연달아 터진 사고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착잡했다.
맥스스쿨에 다녀온 것도 어쩌면 이런 기분을 조금 환기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 후에 경찰서에 가서 조규만의 자살이 타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별 효과가 없었고.
하루하루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상태 엄청 안 좋은데? 왜? 사고 때문에 그런 거야?”
매일 얼굴은 보는 주현필이 오늘은 말을 걸어왔다.
하긴, 그야말로 요즘 가장 나와 가깝게 있는 사람이니.
걱정이 되었겠지.
지원재 실장은 요즘 건물 구입과 리모델링 문제로 바빴다.
하루에 한 번, 아침에 전날 상황을 보고하러 얼굴을 보는 일 빼고는 따로 보질 못했다.
“아뇨. 괜찮아요.”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조금 흉했나 보다.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멍해질 지경인데 웃었으니 얼마나 이상한 표정이 나왔겠는가.
주현필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인상을 한 번 푹 쓰더니 나가 버렸다.
매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가 그렇게 나가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어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였겠지만 뭐.
“왜 이리 복잡하게 사냐, 현덕아.”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기분이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외로움은 아니었다.
그냥 뭔가, 너무 평범하다 못해 괴로웠던 전생의 삶과는 180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도 행복하지가 않았던 것.
행복. 그건 어떻게 찾는 것일까.
돈이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 아닌데…….
무심코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지금 생애에서는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하지만 전생부터 계속 기억했던 그 번호.
신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현덕이니?
수만, 수십만 번 들었지만 그래도 그리운 목소리.
역시 사람은 가족이 필요하다.
“네, 엄마. 잘 지내셔요?”
-잘 지내지, 우리는. 너야말로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야?
전화를 할 때마다 밥걱정을 하신다. 엄마 없으면 밥도 못 먹고 다니는 줄 아시나.
하긴, 이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아침 먹은 기억이 오래됐네.
전화도 마지막으로 드렸던 것이 1년이 넘었다. 언제였더라…….
“걱정하지 마세요. 돈도 많이 버는데 밥 거르겠어요?”
거짓말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아침은 못 먹고 다녀요.’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근데 아마 거짓말이라는 것도 아시겠지.
부모님은 항상 자식의 생각을 몇 단계 뛰어넘으신다.
자식이 어른이 될지라도 부모님과의 차이는 그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그래. 돈도 많이 버는데 바쁘면 그냥 주문해서 먹어. 그렇게라도 먹어야 버틴다.
“알겠어요. 아버지는요?”
-아버지? 아버지는 왜?
아버지의 건강이 갑자기 걱정됐다.
나란 사람도 참 구제불능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과 사고에 치여 가족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으면서, 막상 내가 힘들 때는 이렇게 찾고 있다니.
물론 전생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은 내가 서른을 훌쩍 넘긴 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서 내가 죽었었지.
그때 아버지, 어머니의 고생스럽던 삶보단 훨씬 편안하게 살고 계시니 아직은 괜찮지 않으실까?
나의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산다는 건 어마어마한 기억인데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다 보니 자꾸 잊는다.
잊을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아니, 그냥요. 일 나가셨나, 아니면 집에 계시나 궁금하니깐…….”
-일 나가시다가 요즘은 잠깐 쉬고 계셔. 그래도 괜찮겠지?
“그걸 왜 저한테 허락을 받으셔요. 그냥 푹 쉬시면서 여행이나 좀 다니세요. 돈 부족하면 연락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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