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83화.
“원장님이든, 여기 유현덕 선생님이든, 누군가는 애초에 이 사업이 시작될 때 그쪽과 협의를 하셨을 것 아닙니까. 조건이야 바꾸면 되는 것 아닌가요?”
협의 조건을 바꾼다.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우리가 이걸 원하고는 있을까? 누구 좋으라고.
“계약 기간 중 실강, 인강, 과외 할 수 있도록 말씀이세요?”
“네, 그 부분 말씀입니다만…….”
내 표정이 좋지 않았을까. 그가 말의 뒤를 흐렸다.
시작한 지 1년이 채 넘지 않은 사업 조건을 다시 바꾼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강사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요구할 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선생님들의 뜻을 전할 수는 있겠지만 요구할 만한 입장은 아닙니다. 만약 협의 후 저쪽에서 수용하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지금 조건 그대로라도 하시겠습니까?”
“그건…….”
“저희도 말을 맞춰야 할 부분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라도 하겠습니다. 기회가 필요한 거니까요.”
조병태가 말을 다시 흐리려 하자, 우지훈이 나섰다.
동일 조건에서도 해 보겠다는 말이라…….
자신들도 도박을 한 번 걸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일단 무조건 교육방송 강의 진입을 밀어붙였을 것이고.
하지만 다른 강사들의 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왜였을까?
국내 최대 온라인 교육업체 맥스스쿨의 인터넷 사이트 메인을 차지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1년간의 공백기는 뼈아픈 타격이 될 수 있으리라.
교육방송 진출은 조금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줄 수는 있지만, 혹시라도 원하는 만큼의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공백은 곧바로 수십억의 손해로 이어진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의 골자는 이미도 원장이 교육방송과 재협의를 통해 양쪽 모두 강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큰 상을 받으려면 그만큼 큰 것을 내놓아야 한다.
“협의를 해 보시든, 아니면 개별적으로 오시든 하세요. 이미도 원장님과 저도 따로 이야기를 한 번 해 봐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지금 조건에서 교육방송에 추천을 해 달라는 부탁은 들어드리고 싶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일단 말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봤을 때, 그녀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일 조건에서 1타 강사들을 교육방송에 진출시킨다.’라…….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효과는 같지 않을까?
신규 강사들을 키우는 효과.
강사를 맥스스쿨이나 교육방송에서 독점으로 활용하는 것이기에 1타 강사들이 교육방송과 계약을 하면 맥스스쿨 내 인터넷 강의를 새로운 강사로 넣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이 부분에는 조금 유연할 수 있었던 것이고.
사실 이미도 원장이 나를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겠지.
그녀 혼자였다면 이 강사들이 계속 재협의를 요청했을 것이다.
“선생님들 뜻은 잘 알겠습니다. 일단 교육방송과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쪽에서는 강사들 홍보하기 위해 그 사업 진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설득을 시킬까도 고민이고요. 일단 같은 조건이라면 추천을 원하시는 경우 추천해 드리는 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미도 원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네 명의 강사가 각기 다른 얼굴로 원장실을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이 푹 나왔다.
한숨이 나왔다고? 내쉰 것이 아니라?
맞다.
한숨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나와 버렸다.
“어휴…….”
“긴장 좀 했나 보네요? 호호.”
긴장? 당연히 긴장되지.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경험은 비슷할 수도 있겠구나.
어쨌든.
강의로만 치면 훨씬 큰물에서 활동해 온 사람들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쉬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S 아카데미는 중계 역할이 크기 때문에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강사들과 논의할 일은 별로 없었다.
잘하면 계속 계약 연장하면서 가는 거고,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계약 연장은 없는 거고 하니.
“저도 모르게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말은 그냥 긴장했다고 했다.
저렇게 물어보는데 ‘저 긴장 전혀 안 했는데요?’ 이러고 대답하는 것도 웃길 것 같아서.
“그리고 우지훈 강사 어때? 괜찮죠?”
“예? 또 뭘 말씀이십니까?”
아까부터 이 여자 왜 이렇게 우지훈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건지.
어? 관심?
혹시…….
“원장님, 혹시 아까 그 선생님한테 흑심을 품고 계신 건…….”
“뭐라고요?”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지. 이런 걸 공수 전환이라고 하는 거다.
하지만 예상은 예상일 뿐. 이번에는 확실하게 빗나간 것 같다.
곧바로 그녀가 책상 서랍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던져 주었으니.
“이상한 생각 말고, 이거나 좀 읽어 봐요.”
원래 이미도 원장이 이런 말장난에는 완전 선수다. 내가 처음 신성 학원에 들어가려고 면접을 볼 때부터 알아봤지.
“이건 뭡니까?”
그건 퓨처 금융투자에서 온 이메일 내용이었다.
퓨처 금융투자라.
여기는 강재훈 전 맥스스쿨 대표 시절부터 상당수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회사.
이름은 금융투자이지만 실상 대부업체다.
내가 여기 지분을 확보할 때 확인한 내용이지만 맥스스쿨의 현금 동원력이 매출액에 비해 약한 이유가 바로 여기로 지출되는 이자 때문이었고.
“그쪽에서 지분을 매각한다는 내용이에요. 우선 매수 청구권을 설정해 둬서 우리에게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고요.”
우선 매수 청구권은 보통 회사가 매각될 때 같은 조건으로 먼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라고 아는데.
이런 것도 나보다도 지원재 실장이 잘 알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강사들 상대할 때도 그렇고 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뭘까.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기는 하면서도 스스로 느끼는 불안감.
“이걸 저에게 보여 주시는 건…….”
“내가 이쪽 지분 절반을 가져오려고 해요.”
“절반이면…….”
자꾸 뒷말이 흐려지는데 이건 내가 문과라 수에 약해서.
아무튼 머리는 급히 계산을 하던 중이었다.
지금 기준 맥스스쿨의 시총이 1조 정도.
조……. 어마어마하지?
물론 내가 생각해도 거품이 있긴 했다.
다만 전생에도 시총 1조가 넘은 시기가 있었고, 그때는 경쟁사들도 즐비했던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실상 S 아카데미를 제외하고는 경쟁업체가 전무한 사실상의 독점 기업.
퓨처에서 가지고 있는 지분이 30% 정도.
그러면 액수로 15%는 무려 1500억이다.
“그만한 돈이 있으세요?”
그녀는 또 다시 특유의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대답은 하지 않고.
설마 나한테 빌려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만한 현금은 없다. 현금으로 그 정도는 재벌에서도 급히 융통하기 부담스럽지 않을까?
아무튼 이게 가능하긴 한 건지…….
“그 정도 돈은 저도 없어요. 게다가 며칠 전 사고 때문에 뒤처리 중이라서…….”
“돈 빌려 달란 거 아니에요. 호호. 유현덕 선생도 지분 아직 5% 있죠? 경영 관련 주요 사안이라 이야기한 거예요. 그리고 혹시 이번에도 신박한 아이디어 생각해 낼 수 있을까 기대도 됐고요.”
내가 무슨 아이디어 뱅크냐.
하지만 이번 건은 정말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퓨처 금융투자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상대였기에.
그리고 사실 어떤 회사인지도 모른다. 이제 알아봐야 하겠네.
일이 하나가 더 늘어난 건가?
“일단은 전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시간을…….”
“역시 조금 자극제 될 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필요한 건가? S 아카데미로 추천해야겠어요. 호호.”
“누구요?”
“우지훈 선생.”
이 무슨 뜬금없는 대화의 전개란 말인가.
우지훈 이야기를 할 때는 맥스스쿨 지분 문제로 이야기를 돌리더니 갑자기 또 다시 우지훈을 데리고 가라는…….
그녀의 요즘 의식의 흐름이 이런 식인가, 아니면 원래 이런 식으로 계속 해 왔던 건가?
그래도 내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는 100%인데, 갑자기 그것조차 불안해지네.
“예? 왜요? 데리고 계시면 든든할 것 같은데…….”
“내가 감당하기가 조금 어려워서. 저런 캐릭터는 주변에 유현덕 선생 하나로 충분해요. 둘, 셋 있으면 골치만 아파지지.”
“제가 원장님 힘들게 한 적 있습니까, 언제. 서운하게 왜 그러셔요.”
“호호.”
하지만 불안할 건 없으리라.
어찌 보면 그녀는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려고 부른 것일지도 몰랐다.
나도 그냥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이런 여유. 이것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5년 넘는 시간 동안 급히 달려오기만 한 시간들.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기만 했던 것인지.
어쩌면 우리는 주변의 소소한 즐거움들은 전부 보지 못하고 멀리 있는 신기루 같은 목적지만 보면서 달렸던 것이 아닐까.
조규만의 죽음 이후 일에 집중을 해 온 며칠.
그리고 이미도 원장의 갑작스런 부름과 새로운 만남들.
모처럼 머리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사실 요 며칠 동안도 머리에 뭔가 가득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앞에 있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이미도 원장과 교육방송과의 재협의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원재 실장이었다.
“방금 전 필요했던 사람인데 상황이 다 끝나고 연락이 오네요. 하하. 잠깐만 받을게요.”
그녀에게 이렇게 양해를 구하고는 휴대폰을 받았다.
“네, 실장님. 건물은 잘 보고 오셨습니까?”
-대표님, 건물은 보고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어둡거나 우울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찰서 탁민호 경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규만 의원 자살 사건과 관련해서 한 번 뵙고 싶다고요.
* * *
조규만과 관련된 일은 김윤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둘의 관계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그의 빈소를 지킨 혈육이니.
일반적인 외삼촌과 외조카의 관계는 아니었지.
무슨 사정인지는 그녀가 말을 전혀 하지 않기에 모르지만, 왠지 느낌상 양아버지와 수양딸 관계였을까?
물론 그런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협박의 재료로 그녀를 이용한 조규만이기는 했지만.
“무슨 일인지는 알아?”
경찰서로 가는 내 차 안에서 김윤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생각해 보면 나와 그녀도 참 타이밍 좋지 않게 만나기 시작했네.
잠시 동안의 행복, 그리고 계속 터지는 일들로 인한 불편함.
내가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뜻대로 되기만 한다면야 무슨 재미가 있으랴.
그냥 이렇게 생각해야지.
“모르겠어요. 일단 이야기를 해 보고 싶대서 누나한테 연락하고 온 거에요.”
“고생이네, 네가. 집안일인데 미안하고.”
이게 어떻게 집안일인가. 조규만이 이제까지 나에게 한 일들이 적지 않은데.
그래도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그녀가 받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근래 들어 그녀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졌다.
뭔가 반전의 계기가 필요한데.
여행이라도 가자고 해 볼까?
대화가 많지 않았기에 나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경찰서에 도착했다.
입초에는 전경 두 명이 서 있다가 내 차를 보고 곧바로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