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79화.
[S 아카데미 공시]
저녁 6시 30분을 기하여 공시 내용이 올라왔다.
김미연 부회장의 비서에게서 연락이 와 공시 내용을 미리 확인했고, 내가 알려 줘야 할 추가적인 내용을 전달하여 다시 한 번 수정한 뒤 올라온 공시.
증권 시장의 공시에 의심되는 테러범이 누구인지, 또는 이 사고가 정말로 사고인지 아니면 어딘가로부터 발생한 공격인지 알릴 수는 없었다.
공시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1) 기존 S 아카데미 김현진 대주주의 지분 전부를 유현덕 대표 소유로 이전.
2) 이로써 유현덕 30%, 한성 그룹 20%의 지분 구도가 되었지만, 곧바로 유현덕 소유 지분 6%를 한성 그룹에서 당일 종가 기준으로 양도 양수 계약 체결.
첫 번째 공시 내용은 대주주의 지분에 변동이 있을 경우 반드시 공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올린 것이니 별 의미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내용.
이미 당일 하한가를 기록한 S 아카데미.
그리고 하한가의 이유는 하나 가지고 있는 촬영실과 그 건물에 있던 폭발 사고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며칠 동안의 하한가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한성 그룹에서 종가 기준으로 지분을 양도받았단 것은 곧 그 이상의 가치라고 그룹 차원에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신호를 시장에 주려는 의도.
일단 내일이 되어야 이 움직임의 효과가 확인이 되겠지만, 급한 대로 할 수 있는 대처는 제대로 한 셈이었다.
“지금 확인했습니다, 부회장님. 이번에 주신 도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하긴요. 얼른 정상화시켜야죠. 앞으로 사업 확장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셔야 할 거고요. 그나저나 조규만 의원 건은 왜 갑자기 중지하신 거죠?
“그건……. 제가 직접 부회장님 다시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할 내용인 것 같습니다.”
-뭐죠? 호호. 궁금하네요. 언제 오시려고요?
지금 가고 있는 중이었다.
운전 중 전화? 아니, 그럴 리가.
내가 돈은 많지만 기사를 따로 두는 주제 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옆에 지원재 실장이 앉아서 운전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사 아니냐고?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파트너 관계랄까?
“지금 가는 중입니다. 한성 에듀 사무실로 가면 될까요?”
-네. 이거 퇴근이 늦어지겠군요.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지원재 실장과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조규만은 처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쩌면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텐데요.”
“본인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벌을 준답니까……. 저도 기회라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아까 전화 받고, 이야기 듣고 나서는 실장님도 기다려 보자고 하셨잖아요.”
“조규만 의원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김윤지 원장님이 가지고 계신 증거물은 경찰 입장에선 뺄 수가 없는 증거입니다. 경찰에 전부 제출하시고 차라리 그쪽에서 판단하게 놔두시는 건 어떨까 싶네요, 갑자기.”
“그렇게 하면……. 저도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복수를 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또 모르지만,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상황이 너무 급변했지 않은가?
조규만의 짓이 분명해 보였던 테러 행위.
그것 때문에 윤형진 형만 심하게 다쳤다.
다행히 김윤지가 병원에 있는 도중에 응급 치료가 잘 되고 깨어나 통화도 했으나, 어쨌든 사람이 다쳤다.
하지만 막판에 온 조규만의 연락은 다시 한 번 우리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 *
-유 대표. 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번 일만큼은 내가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저희에게는 증거도 있습니다만…….”
-무슨 증거 말인가? 누가 준 증거? 김현진이 자식이 준 것 말이야?
“네. 김현진 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네에게 나의 악행을 증명할 증거를 주었다고. 그렇게만 보기에는 그가 가져간 것이 너무 크지 않은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조규만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어떻게 들으면 아픈 사람이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듯한 소리.
평소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꼬장꼬장한 노인네 목소리인데.
“뭘 가져갔는데요?”
이럴 땐 그냥 모르는 척.
-지분을 그냥 자네에게 넘겨줬을 리는 없고, 그가 얼마나 받았는가?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조규만이지.
“그건 알 필요가 없으신 부분입니다만…….”
-내 돈인데 그걸 내가 알 필요가 없을까. 아무튼 그가 얼마나 가져갔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 일은 내가 한 일은 아니야. 검토는 한 적이 있지만 그건 김현진과 둘이서만 했던 일이고.
“지금 그걸 저보고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믿건 안 믿건 그건 자네 자유일세. 내가 자네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만, 이 정도 규모로 일을 벌이지는 않아. 이렇게 허술하게 말이지.
내가 죽을 뻔했던 일.
그날이 떠올랐다.
‘허술하게’ 라는 말이 귓가에 꽂혔다.
“저를 죽이려고 하셨던 거는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이미 시간이 지난 일이니. 자네가 원한다면 그 일에 대한 사실을 내가 직접 말해 줄 수도 있네. 하지만 오늘 일은 내가 아니야.
예상치 못한 대답.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말한 것인데 그의 반응은 나중에라도 이실직고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물론 그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지.
일단 지금 상황을 모면하려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조규만 같은 사람이 이렇게 허술하게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 상황에서 일을 꾸몄을까 하고.
처음에는 그의 불같은 성정이 만들어 낸 실수라 생각했다. 김윤지가 가지고 있는 사진들과 통장 내역이 그 증거였고.
하지만 김현진은 그러면 이 일에서 완전히 결백할 수 있을까.
미리 알고 있는 상황에서 돈까지 다 가져가고 난 뒤, 사고가 터지는 것을 막지 않고 증거만 던져 주었다.
이래서 못된 인간들과 상대하는 건 피곤한 일인가.
다들 거짓말쟁이들이라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면 가장 이득을 가지는 쪽은 누굴까. 나일까? 자네일까? 김미연일까? 아니면…….
“김현진…….”
-자네 능력을 믿으니 잘 판단해 주리라 생각하네. 내가 자네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사람은 아니야.
진심일지 아닐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믿고 싶었다.
나쁜 놈들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짓의 규모와 정도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규만이라는 악당은 악인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증거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주게.
“많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딱 사흘. 사흘 뒤에 경찰에 나를 넘겨도 원망하지는 않겠네.
“사흘. 그러면 그동안은 많이 바쁘시겠군요. 먼저 연락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네.
고맙다니.
그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인지 몰랐다.
아무튼 사흘이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리라 생각했다.
사흘이라…….
여기까지가 조규만과의 통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빗발치는 질문들.
오광필 할아버지와 이미도 원장, 그리고 지원재는 나와 생각이 같았다.
하지만 주현필과 김윤지는 절대로 기다리면 안 된다고 말했고.
주현필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고, 김윤지는 바로 얼마 전 조규만과의 일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기다려 보겠다고 선언했다.
“후……. 어쩔 수 없군요. 제가 김미연 부회장님 뵙기 전에 한 가지만 제안 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갑자기 지원재의……. 제안이라고?
무슨 제안을 갑자기 하려는 걸까?
“유 대표님, 잠시 미국에 다녀오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꾸 위험한 일만 계속되는 것 같아서요.”
“네?”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라 말문이 막혔다.
이런 판국에 갑자기 외국행이라니.
하지만 지원재의 표정은 진지했다.
“적이 너무 많습니다. 김미연 부회장님이 지금 도와주고 계시고, 그리고 주변에 유 대표님 도와주실 분들도 많긴 합니다만…….”
“다 놓고 도망가라고요?”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준서에게 넌지시 던져 놓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준서가 귀국 후 유 대표님 역할을 잠시 맡고, 대표님께서는 미국과 중국 쪽의 시장을 한 번 경험하고 오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너무 과열이 되어 있으면 가끔 식힐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준서?
준서가 내 역할을?
그라면 잘 해낼 수 있겠지.
여러모로 전생부터 나보다는 뛰어났던 친구였다.
지금 생애에서도 내가 이 위치에 있고 준서는 아직 배우는 입장인 것은 순전히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시점에 나온 이야기라 얼떨떨했다.
“어차피 이제 S 아카데미는 한성 에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김미연 부회장님께 제안한 내용에서 유 대표님께서 잠시 휴가 겸 연구 년을 가지는 거라고 여기시면 되지 않을까요. 이왕 지금 뵈러 가시는 것, 그렇게 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미국에서 모시는 건 제가 모시면 되고요.”
누가 누굴 모신다는 건지.
나에게 있어서 지원재는 이미 지금 생애의 형과 같은 존재였다.
그만큼 아직 친하다고 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그에게 받은 도움들은 굉장히 컸다.
“글쎄요……. 그건 생각을 조금.”
“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오늘 김미연 부회장님 만나실 때 그 부분을 열어 놓고 대화를 나누시면 좋을 것 같아서 미리 드린 말씀입니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거.”
멋쩍게 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 날에 내가 결정할 사안이 하나 늘어난 것 같아서 머리가 아팠다.
젠장, 나보고 어떻게 하란 거야, 이 많은 일들을.
정말 한 번 식히고 와야 할 때가 된 걸까?
* * *
“조규만 의원은 일단 두고 보자고요?”
김미연은 다시 한 번 놀란 눈으로 말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계획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했을 텐데, 갑자기 말을 바꾸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단순한 변덕 때문에 바꾼 건 아니었으니.
“네. 일단 사흘간 시간을 주기로 했습니다만, 부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사흘이라……. 그럼 그걸로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밝힐 자신이 있다던 가요?”
“일단 그렇게 말은 하더라고요. 가지고 있는 증거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 기다려 볼까 하고요. 조규만 의원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김현진 비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뭐, 우리야 결국 유 대표님 생각을 따르겠지만, 조사가 바로 시작되고 사건이 드러나지 않으면 생각보다 지금 현 상태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세하게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거다, 이 사람아.
아무튼 결론은 이미 내린 상태였기에 설득만 필요한 상황.
“500억 사재 출연이면 그래도 하락세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S 아카데미가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는 촬영실과 강의실 몇 개뿐이니까요.”
생각해보면 시총이 그 정도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리라.
보통은 부동산 자산 및 기타 투자 자산을 모두 포함해서도 그렇게 오르기 힘든 것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