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75화.
기업 공개에는 사이트 관리 업체 인원과 홍보실 인원까지 전부 들어가 있어 100여 명 정도 되는 인원으로 나온다.
한성 그룹 김미연 부회장과 이재훈 전무도 처음 S 아카데미에 견학차 왔을 때 놀라 했다.
주가 총액으로 따지는 시총이 어마어마한 금액을 예상하고 있는데, 회사는 무슨 구멍가게 수준이었으니.
사실 매출액이 백억씩 나오는 회사 규모라고 절대로 볼 수 없었다.
이게 사실 이 규모로 이런 사업을 하는 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인데, 이유는 강사들 수급이 어려워 많은 강의를 올릴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이렇게 운영을 지속하면서 수익을 계속 늘릴 수 있던 것은 이미도 원장과 김윤지, 그리고 오광필 할아버지까지 S 아카데미의 사업에 전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강사 수급 부분을 말이다.
“네, 대표님. 다름이 아니라 연락이 와서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편하게 말을 해도 되는데 계약서 쓰고 나서는 계속 이렇게 극존칭을 쓰기에 내가 오히려 불편했다.
그래도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고 우기니…….
“연락이요?”
“네. 조규만 의원에게서 연락이…….”
조규만이라.
이건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가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한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이쪽 일에는 관심을 끊은 것 같았던 그였다.
김윤지에게 가끔 근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 또한 지난 번 사고 이후로 이제는 그와 완전히 연을 끊은 상태이기에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괜히 그때의 좋지 않은 기분만 떠올릴까 싶어 그것은 그대로 놔뒀던 상태.
그러고 보니 들어온 지원재의 한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직접 전화를 하시지 왜 실장님께…….”
지원재 실장이 수신 부분을 손으로 감쌌다.
우리의 대화가 들리지 않게 하려는 동작이었다.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아 보입니다.”
“상태가 좋지 않아요?”
“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계속 화를 내면서 대표님 바꾸라고 하기에…….”
“알겠어요. 긴장 좀 빡 하고선…….”
휴대폰을 건네받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여보세…….”
-야! 유 대표!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예의 없는 어르신을 봤나.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통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규만 의원님.”
-김현진이, 네가 꼬드겨서 도망갔잖아!
“김현진이요?”
순간 머리에 누구의 이름인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그의 이름에 지원재가 입모양으로 ‘비서’라는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계속 몰랐을 수도 있었으리라.
조규만은 도망간 자신의 비서를 나에게서 찾고 있었다.
김현진 비서가 도망갔다고?
왜?
* * *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뭘 원하시나요, 김 비서님?”
-제 이름으로 S 아카데미에 들어가 있는 지분, 전부 현금화시켜 주십쇼.
“그건 제가 S 아카데미 관계자가 아니라서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냥 시장에 내놓으시면 될 것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대주주 지분은 1년간 보호되어 있어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각서든 계약서든 쓸 테니 내일까지 입금 부탁드립니다.
김윤지는 그의 마지막 말에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S 아카데미 지분이라.
유현덕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일단 뭘 가지고 이 사람이 이런 요구를 하는 건지 알아봐야겠지.
이렇게 언젠가 터지기를 기대하고 낚싯대를 던져 놓은 것인데, 생각보다 빨리 터진 것 같다.
하긴, 조규만의 비서로 있다 보면 온갖 죄악에 빠지는 기분이 들긴 할 것이다.
자신도 당시에는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지역 중소규모 학원가의 고름을 짜는 데 일조하지 않았던가.
-원장님!
“유현덕 대표에게 이 제의를 전달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거래는 서로 오가는 것이 있어야 성립하겠죠?”
-지금 S 아카데미 주가가 계속 상한가입니다. 조규만 의원님께서 투자하실 때의 세 배를 넘는 상황이고요. 저는 딱 투자 금액만 받겠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악을 하나씩 속에 품고 있는 걸까.’
이것이 그의 말을 들은 그녀의 머릿속에 처음 떠 오른 생각이었다.
S 아카데미의 지분 30%, 당시 150억에서 200억 사이 금액.
이건 김현진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아니었다.
깨끗하든 지저분하든 조규만이 모종의 방법으로 김현진에게 맡기고, 그것을 투자금으로 활용한 것.
남에게 자신 대신 이런 거액을 거래한 것도 잘못이겠지만, 이 사람은 그 돈을 날름 꿀꺽하려고 하다니.
피해자가 자신이 죽이도록 미워하게 된 조규만이란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기에는 자신이 일조한 부분도 컸고.
“150억 전부 말씀이신가요? 어차피 차명 거래인데 그거 안 드려도 관계없을 것 같은데요? 다른 것 뭐 없나요?”
그녀가 기다리는 건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다.
150억?
누구에게는 평생 보지도 못할 금액이겠지만 조규만은 국회의원이었다.
수천 억, 수조 원을 주무르는 대기업 일가에게 적어도 한 방 정도는 날릴 수 있는 힘을 가진 국회의원.
만약 이 제안을 유현덕이 받아들인다면, 그는 다시 유현덕에게 복수를 하려고 할 것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았다.
무너뜨리려면 한 번에 확실하게 무너뜨려야 하는 것.
특히나 조규만 같은 사람은.
-의원님을 확실히 보낼 수 있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하는 것이고요.
그녀는 바로 이것을 기다렸던 것이었다.
“그게 뭐죠?”
-자세한 사항은 당장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내일 입금되면 곧바로 연락드려서 알려드리죠. 단, 내일 3시 전까지 입금해 주셔야 합니다.
바로 알려 주면 이자의 입장도 난처해질 수 있겠지.
다행히 내일은 주말이다.
학원 강의는 있지만 그래도 일찍 끝나는 날.
유현덕에게는 이 전화를 끊고 알려 주면 좋을까?
아니면 입금 처리까지는 자신이 직접 하고 나서 나중에 알려 주면 될까.
이것을 바라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막상 일이 시작되고 나니 고민이 많은 그녀였다.
* * *
“응? 김윤지 원장님?”
“왜 또 원장님이래? 호호. 말 편하게 하기로 했잖아요?”
“아, 맞다. 누나 웬일이셔요, 이 시간에?”
반가웠다.
반가운데 반가움을 내색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최근 들어 낮에 그녀를 만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바로 어제도 이 시간쯤 만났으니.
근데 방금 조규만의 전화를 받고 끊었는데, 마치 그녀가 알고 있었단 것처럼 시간대가 오묘했다.
“강의 없을 때는 아무 때나 오라면서? 표정이 별로 안 좋네? S 아카데미 기업 공개 완전 성공적이잖아. 근데도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뇨, 그건 아닌데. 방금 조규만에게서 전화가 왔거든요. 끊자마자 누나가 들어오니 신기해서요.”
“외삼촌?”
역시나 조규만 이름이 나오니 그녀의 표정도 좋지 않네.
뭐, 어쩌랴.
그녀에게는 가족이지만 원수 같은 사람일 텐데.
“네. 엄청 화가 나서 전화가 왔는데 통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화가 났어? 뭐라고 하든데?”
“무슨……. 누구더라? 그, 김현진 비서 있잖아요? 조규만 에게 딱 붙어 다니는. 그 사람이 사라졌다고. 참, 나.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네. 왜 자기 사람이 도망갔는데 그걸 나한테서 찾는 건지.”
“그래?”
말은 저리 하면서도 놀라지는 않는 그녀.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맞나?
아무튼 내가 볼 때는 그런 것 같은데.
조규만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반응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원수처럼 이름만 들어도 싫어할 때가 있고, 때때로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으니.
“네. 김현진 비서랑 연락한 적도 없는데요, 그 후로는.”
“그 후라니?”
“누나 붙잡혔을 때 말이에요.”
그녀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구하는 말을 한 것도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평소의 그녀였다면 대화가 잘 끊이지 않게 계속 말을 하는 편인데.
“현덕 쌤, 혹시 돈 좀 있어? 지금 당장 이체해 줄 수 있는 돈?”
“예? 돈이요? 돈은 왜요?”
“아니 그냥 좀 급히 필요한 일이 있어서.”
뭐지?
왜 돈을 달라고 하지?
성공 대입학원 보유 현금도 꽤 크다.
몇십억에서 몇백억이 있을 수도 있는데.
“얼마나요?”
“백억.”
헐,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그녀가 황급히 말을 했다.
“바로 돌려줄게. 별일 아니야.”
백억을 빌리는데 별일이 아니라니.
이 무슨 막말을…….
“무슨 일이에요, 누나?”
“지금 말을 바로 하기가 조금 그래. 있어, 없어?”
“있죠. 있기야 한데. 괜찮은 거예요?”
맥스 때 내가 그녀에게 빌렸던 돈.
물론 그건 전부 갚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에게 보여 주었던 호의를 내가 돌려줄 차례인가?
그런데 그때는 계획을 그녀와 공유했잖은가.
이번에 그녀는 어디에 쓸 지도 말을 하지 않고 돈을 빌리는…….
“괜찮아. 나쁜 일 아니니깐 좀 빌려줘, 지금.”
참……. 내가 이만 한 돈을 턱 빌려줄 리가…….
있지.
그녀에게는 큰 빚이 있었다.
그리고 돌려준다는 말이 거짓일 리도 없고.
“알겠어요. 가뜩이나 지금 쌓여 있는 것 어디에다가 넣어 두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오케이! 지금 바로 좀 부탁할게.”
* * *
“자, 이제 알려 줄 것을 알려 주셔야죠?”
-절반밖에 안 들어왔잖습니까. 나머지 입금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거래가 왜 이래요? 김 비서님이 지분을 넘겨주시는 조건인데 아직 그게 진행되지 않잖아요.”
-그건 지금 각서, 양도 양수 계약서 들고 찾아가는 중입니다. 조규만 의원님 사람들이 성공 대입학원과 신성 학원 주변에 깔려 있을지 몰라 제 방식대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콜 불러서 배송 중이에요.
이런 거래를 이리 서둘러서 해도 되는지.
하지만 지금은 일단 김현진이 이토록 마음을 돌리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알겠어요. 알려 주실 내용 확인되면 바로 입금해 드리죠. 지금 은행에도 전화 연결되어 있습니다.”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확인을 하는 걸까?
김윤지는 답답하기도 했지만 마구 흥분되기도 했다.
드디어 조규만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이게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자에게 피눈물을 흘리도록 할 기회라는 생각.
사실 모든 정황이 그녀의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분명했다
이렇게 무턱대고 진행할 일이 아닌데.
-김윤지 원장님.
잠시 동안의 정적을 찢고 김현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라 정확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드디어 뭔가를 말하려고 마음먹었다고 생각했다.
단호한 목소리. 아니, 적어도 단호하게 들리는 목소리.
-10분 이내로 원장님께 퀵 배달 올라갈 겁니다. 받으시고 나서 곧바로 유현덕 대표님께 전화로 확인하세요.
그녀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유현덕에게 이제 와서 확인하고 말고 할 부분은 없는데.
지분을 모종의 방법으로 그에게 직접 넘겨준다는 것인가?
아니면 혹시…….
“유현덕……. 무슨 일이에요, 김 비서님. 유현덕 대표에게 확인을 하라니요?”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다.
지난 번, 유현덕이 길가에서 기습을 당할 때의 그 기분.
불안했다.
-이만 끊겠습니다. 퀵 내용 확인 및 유 대표님과 통화 뒤 나머지 금액 송금 부탁드립니다. 한 입으로 두말하실 분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송금 버튼을 손에다 댔다 뗐다 하며 기다리는 동안, 그녀에게 닥쳐온 불안감은 떠나지를 않았다.
잠시 뒤, 퀵 배달 아저씨가 들어와 김윤지를 찾았다.
보통 인수 명부에 사인을 받아 가는데 이날은 그런 것이 따로 없었다.
“요 바로 앞에서 받아서 올려다 드린 건데요, 뭐.”
근처에 김현진이 있다는 의미였다.
아직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배송된 것은 서류 봉투 하나.
조심스레 커터로 윗부분을 잘라 내니 안쪽에 서류 몇 장이랑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꺼내고 나서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건물을 뛰어 나가며 유현덕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현덕아! 지금 빨리 건물 비워! 그곳에서 나와!”
-응? 누나? 무슨 일인데요?
그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도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전화라서 온전히 이 긴장을 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뭔가 잘못됐나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빨리! 지금 다 내보내고 너도 빨리…….”
-네? 왜요? 저 지금 강의 준비 중…….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굉음이 휴대폰의 스피커를 통해 들리고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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