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70화.
“일은 하지 않겠지만 조언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연락 주십쇼. 요즘 집에서도 별로 할 일도 없고 하니.”
이렇게 말을 하는 강재훈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한때 전국의 사교육 업계를 호령하던 이 남자가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을 놓았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지원재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강재훈 대표가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사람을 추천하니 흥미가 갔다.
그리고 젊은 친구라고 하니 더욱 그랬고.
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젊음이란 게 원래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고, 젊은이들은 서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힘에 이끌려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지금 김윤지가 그리려고 하는 큰 그림도 젊은이들의 그 힘을 기반으로 한다면 분명 성공할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 * *
“지원재 실장이요?”
“네, 맥스스쿨 전 업무실장, 유 대표님과 함께 맥스스쿨을 무너뜨린 장본인.”
응? 이 여자, 좀 전에는 강재훈의 이름도 같이 언급한 것 같은데.
맥스스쿨의 강재훈 대표를 무너뜨렸다고 한다면 지원재의 배신을 아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강재훈의 이름만 거론한 것이 아니라 지원재 실장까지 이름을 말했을까.
“그건 맞긴 하지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속내가 궁금했다.
강재훈의 이름은 또 왜 나온 거지?
“표정을 보니 왜 이걸 물어본 건지 궁금해하는 것 같네요. 호호.”
그러니깐 빨리 본론으로 가 보자고.
“궁금하죠. 그들은 왜요?”
“사실 유 대표님 만나기 전에 강재훈 전 대표님을 먼저 뵙고 왔습니다. 제안도 그쪽에 먼저 드리려고 했고요. 유 대표님은 한창 S 아카데미로 바쁘시지만 그쪽은 쉬고 계시잖아요.”
“안녕하신가요, 강재훈 대표님은요?”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내가 부순 성이기는 했지만, 강재훈은 그 성을 만들고 성장시킨 성주.
업계 선배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한 번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은 가끔 했지만, 나는 나대로 바쁜데다 조규만 일까지 터지는 바람에 그 후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힘은 조금 빠지신 것 같지만 그래도 여유는 전보다 더 생기신 것 같더라고요.”
“그렇군요.”
“무슨 이런 걸 가지고 그런 표정을 지으셔요. 이 판은 원래 뺏고 빼앗기고 하는 판인데. 아무튼, 강재훈 전 대표님께서는 자세한 계획을 듣지도 않으셨어요. 지원재 실장을 추천하시더군요.”
지원재 실장을 추천했다면 나에게 굳이 이 일이 올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러면 지원재도 혹시 거절을 한 건가?
하긴, 그는 나와 손을 잡은 이후로 업계에서는 완전히 배신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한성 그룹을 등에 업는다면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제안에 쉽게 ‘오케이!’ 할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나도 그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지원재 실장과 통화를 했는데, 그는 유 대표님과 함께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오히려 제안을 해 오더군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참여하겠다고.”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왠지는 모르지만 지원재 실장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있는 그림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무튼 그가 나를 추천하는 바람에 이 한성 그룹 부회장 김미연이 나에게 제안을 해 왔던 것이었고.
“그리고 재미있는 제안 하나를 추가하더군요.”
“네?”
백수인 지원재가 대기업 부회장에게 제안을 추가했다고?
“지금 지원재 씨가 미국에서 준비하는 일, 그걸 이 사업에 포함하자고 말이죠.”
“지원재 실장님이 준비하는 일이요?”
“유 대표님은 모를 거라고 하더니만 진짜인 것 같네요. 호호. 온라인 교육 사업의 미국 시장 진출이죠, 뭐. 지원재 실장이나 유 대표님이나 다른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나에게는 말도 안 하고 그런 일을…….
하긴 그가 나에게 이런 일을 보고할 의무는 없다.
내가 그의 덕을 봤으니 도움을 줄 일이 있다면 도우려고 했는데, 미국에 간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자신의 사업을 하기 위해서?
“유현덕 대표에게 건넬 제안이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그런데 교육 복지라고 언급을 했더니만 곧바로 제안 하나 하겠다고 해서요. 그는 미국에 간 뒤 놀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S 아카데미나 맥스스쿨이 운영하는 사이트를 유지 관리할 업체를 몇 군데 선정한 상태라고 합니다.”
역시 지원재 실장.
나 스스로도 치밀하고 계획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한술 더 떴다.
사이트를 유지 관리할 업체를 찾았다고 한다면, 이제 강사만 확보되면 곧바로 미국에서도 사업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노하우는 국내시장에서 충분히 쌓은 상황이고,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만 한다면, 그 다음은 중국 시장이고.
“그러면 한성 그룹에서 그만한 돈을 투자한 거는…….”
“우리 그룹의 주력이 교육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장도 국내만이 아니고요. 해외에서 얻는 수익이 상당한 만큼 이미지 개선 사업도 국제적으로 하는 거죠. 어때요?”
이제야 왜 한성에서 나에게 그만한 돈을 쥐어 줬는지 이해가 됐다.
이재훈 전무가 말했던 교육 복지 사업은 결국 국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계획 중이었던 것.
칸 아카데미가 아직 뜰 시기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한발 먼저 무료 온라인 교육 사이트를 오픈하고 정착시킨다면 그것에서 오는 수익보다도 한성이라는 브랜드를 해외에 널리 알릴 기회가 된다.
“천억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군요.”
“그룹 차원의 이미지 재고 사업이니까요.”
“그럼 사업을 제대로 성공시켰을 때 제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목적과 계획을 알았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을 확인하고 끌어올리는 것이리라.
나름의 기회가 될 것 같기는 했다.
통장에 있는 천억 이상의 내 돈은 그대로 놔두고도.
그래도 이 사업이 나에게 주는 것이 있어야 제대로 참여를 하고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으니 확인해 두어야 한다.
“글쎄요. 내부 차원에서 해 드릴 수 있는 건 직함과 연봉 정도겠죠. 하지만…….”
“연봉은 괜찮습니다. 미국 시장이야 언젠가는 진출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거니까요. 중국 시장은 어떻습니까?”
“중국이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는 나라.
중국은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아직 그쪽에서도 온라인 교육 사업은 초기 단계.
아무것도 없이 무턱대고 진입할 수가 없지만, 만약 한성에서 준비하는 사업이 미국에서 성공한다면 충분히 경쟁력 있는 브랜드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사실 미국 시장 진출을 생각만 하고 세부적으로 계획하지 않던 이유는 미국이란 나라의 특성상 교육열이 동아시아권 국가보다 낮기 때문이었다.
문맹율도 상당히 높은 편이고.
따라서 각 가정마다 가지고 있는 돈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중 교육비로 투자하는 비율이 낮다는 의미.
시장의 성패를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성 그룹에서 준비한 이 계획은 괜찮은 것이, 이쪽에서 비용은 많이 소요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무료로 진행하는 것이기에 다수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사이트를 접하기만 해도 된다.
‘한성 그룹은 미국 학생들을 위해 이런 좋은 강의들을 무료로 공개합니다.’라는 이미지만 쌓으면 이미 성공한 것이고.
중국 시장은 말 그대로 돈이 되는 시장이다.
어마어마한 인구부터 동아시아 국가들 특유의 높은 교육열까지, 교육 사업 자체에서 벌 수 있는 돈은 그쪽이 훨씬 크다.
문제는 업체 선정부터 강사 수급까지 전부 중국어를 기반으로 해야 했기에 아직 영어권 국가보다는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
하지만 한성의 도움을 받는다면…….
“네. 미국은 한성 그룹의 계획대로 진행하고, 대신 중국 시장 진출은 S 아카데미, 또는 S 아카데미와 맥스스쿨이 먼저 진출하는 것으로요.”
“벌써……. 중국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놀란 눈빛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그리고 일개 업체 대표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니.
사실 200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기만 해도 중국에 진출하는 중소규모 업체들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지금도 그쪽의 싼 인건비를 활용하기 위해 공장을 건설한 대기업들도 꽤 되고.
하지만 교육 사업은 아직 국내에서도 태동기였기에 전무했다.
“가장 큰 시장이 중국인걸요.”
“유 대표님은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호호. 중국 시장은 아직 이쪽에서는 시기상조라고 여기고 있는데도.”
“어차피 중국에서 무료 강의 사이트의 효과는 별로 없을 겁니다. 미국과는 다르게 아직 한국 제품이라고 하면 기술력만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으니까요. 좋은 제품은 높은 돈을 주고라도 사는 사람들이고요. 저희가 먼저 들어가는 것, 어떻습니까?”
똑똑.
절묘한 시점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재훈 전무였다.
아쉽기도 했지만 이런 제안을 선뜻 그녀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들어오셨어요, 전무님. 앉으세요. 여기 유 대표님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네, 부회장님. 무슨 대화를 그리 길게 하시나 궁금했습니다.”
“나쁘지 않아요. 호호. 우리 계획에 제안 하나를 덧붙이셨어요.”
“제안이요?”
이재훈 전무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나는 그냥 멀뚱멀뚱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내 입장에서는 김미연 부회장이 내 회사의 상급자가 아니니깐 편하게 대한다고 대한 것인데, 이재훈 전무는 나와는 다른 입장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훨씬 어려운 사람이겠지.
아마 ‘무슨 제안을 감히 부회장님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중국 시장은 S 아카데미가 먼저 진출하는 제안.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셔요? 뭐, 특별히 나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긴장했던 그의 표정이 바로 풀렸다.
“저희가 S 아카데미 지분 40%를 가지고 있습니다. 웃돈 얹어 주고 보유한 거니 그쪽은 유 대표 뜻대로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괜히 제가 긴장을 다 했네요.”
“유 대표님도 긴장을 하셔요? 전혀 안 그래 보이시는데? 호호.”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건 아닌지 이제야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쩌리.
사업이란 것이 참 웃기다.
돈이 없을 때는, 그러니깐 전생에는 수중에 십억만 있으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그것의 백배가 통장에 찍혀 있자 멈출 수가 없다.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아무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