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69화.
“그냥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실제로.”
이렇게 말하면서 싱긋 웃는다.
대기업 회장 딸이라면 연예인도 많이 보고 유명 인사도 많이 볼 텐데, 굳이 왜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싶었다는 건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내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겠거니 생각하면 되니깐.
그나저나 확실히 돈이 많은 집 딸이라 그런지 입고 있는 풍채부터가 달랐다.
아니, 달라 보였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뿐인데도 귀티가 흐른다.
몸에 걸친 옷이며 장신구들은 얼마나 할까.
사람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웃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각은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마치 날아 들어오는 것과 같으니 어쩌겠는가.
아무튼 이런 사람을 만날 일이 언제 또 있으려나.
“생각보다는 별로 말씀이 없으시네요. 호호. 이번에 저희 그룹 교육 복지 사업에 도움을 주신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처음 온 겁니다. 아직 이재훈 전무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다는 곳은 보지도 못했네요.”
“차차 보면 되죠. 차차 알아 가면 되고요.”
이번에는 앞에 놓여 있는 잔으로 손을 가져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비싼 잔 같았고.
이런 거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되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보다.
돈도 많은데 얼굴도 예쁘구나 하고 생각했으니.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 느낌의 김윤지나 이미도 원장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방금 전 나에게 어떤 차를 마시겠냐고 물어봤던 안내원이 찻잔을 쟁반 위에 올려 들고 들어왔다.
가만히 앉아서 받기 어색해서 일어나서 찻잔을 들려는데……
“그냥 앉아 계시면 됩니다. 세팅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찻잔 하나 놓는 데 세팅이 필요한가.
“아뇨, 괜찮습니다. 하하.”
어색함 속에 얼른 받아 들고 다시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여자가 부럽기는 하나 막상 생각해 보면 편하지는 않은 생활이겠지.
이것저것 보는 눈들도 많을 테고.
문득 내가 잠시 들렀던 전생의 그 소년이 떠올랐다.
그 친구도 이 정도 삶을 가졌을까?
음, 아마도 아니겠지.
괜찮게 살았던 것 같긴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뭐, 아쉬운 삶은 아니었으리라.
얼핏 본 그 주사기, 나에게 큰 충격을 준 그 물건을 떠올리면 해 보고 싶은 것들 전부 하고 살았던 것 같으니깐 말이다.
“영상으로 봤던 것보다 미남이신데요?”
이 여자, 뭐라고 하는 건가, 지금.
“네? 영상 화질이 썩 좋지는 않잖습니까.”
“넉살도 좋으시고. S 아카데미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어쩌다가 유료 강의 시장을 그렇게 크게 벌일 생각을 하셨어요?”
바로 일 이야기로 넘어가는 건가?
아니면 그냥 단순한 호기심일까.
일반인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니 이거 자꾸 머리만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봐야 아직 20대 초반일 텐데.
“글쎄요. 음, 학원에서 일을 하다 보니, 가르칠 수 있는 학생들 숫자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수강을 원하는 학생들을 전부 받을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인터넷에 무료로 강의를 조금 올렸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하는 학원들이 전무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조회수가 잘 나와서 이걸로 공간 제약 없이 사업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기억하는가? 내가 신성 학원에 처음 면접을 보고, 그리고 입시 설명회 제안을 하고, 비율제 제안을 할 때 발휘했던 휘황찬란한 언변을.
최근 들어 그걸 다시 할 일은 별로 없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말씀도 잘하시네? 호호. 그렇게 해서 돈은 크게 벌었고, 우리가 하려는 일은 뭔지 아시나요?”
“자세히는 아직 모릅니다만, 사회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무료, 또는 싼 가격의 온라인 교육 사업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리고 이게 성공하면 기존에 있는 온라인 교육 업체들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겠죠. S 아카데미나, 맥스스쿨 같은?”
“그래서 양쪽 모두에 관련이 되어 있는 저에게 이재훈 전무님을 통해 연락을 주신 거고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뭐, 큰 영향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성 그룹 같은 대기업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질 좋은 강의를 무료로 풀어 버리면 우리나 맥스스쿨에 좋지는 않겠지.
같은 상품을 팔면서 한쪽에서는 ‘돈을 받고’ 파는데 비해 다른 한쪽에서는 ‘공짜’로 풀어 버릴 테니깐.
그래도 살아남을 방법은 없는 건 아니었다.
대기업의 교육 시장 진출은 항상 위험 요소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니.
게다가 사실 전생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회복지를 위해 강의를 무료로 푸는 건 한성 그룹이 먼저가 아니라 교육방송이 먼저다.
물론 강의 중 일부는 유료화시켜 수익을 추구하긴 했으나, 그래도 국가 차원에서 진행한 사업 치고는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고.
그렇다고 해서 학원들과 온라인 교육 업체들이 망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강의의 질에 대한 비교 우위를 내세워 수능 시장에서 대등하게 경쟁했고, 더 나아가 공무원 시험 시장, 그리고 전문대학원 시험 시장까지 진출을 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지금도 사실 교육방송에서 이미 이런 일을 진행 중이었고.
이걸 그녀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럼 도대체 왜 한성 그룹 독자적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 그 답을 주려고 나를 부른 것이 아닐까.
내가 물어봐야겠지?
“경쟁해서 한쪽이 무너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가격으로만 놓고 보면 싸움을 걸 수조차 없겠지만, 그래도 기존 학원이 가지는 노하우나 사업력은 강하니까요. 그래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하나 질문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세요.”
“한성 그룹은 단순히 기업 이미지 재고를 위해 이런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가요?”
내가 ‘규모’라고 표현을 한 것은 한성 그룹이 S 아카데미의 지분 40%를 시가의 다섯 배나 더 들여 확보하며 들인 자금이 대략 천억이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사이트 하나 운영하는 것, 아무리 강사비가 비싸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나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쏟아붓느라 아슬아슬하게 버틴 수준이었지만, 한성 그룹은 초반부터 다 쏟아붓고도 체력이 한참 남아 있을 수 있을 테니.
S 아카데미의 노하우를 전수받고 나를 이 사업에 참여시키는 조건만으로 천억을 투자한 셈이었다.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사업인데.
“호호. 수지가 맞지 않죠? 대표님께 천억이란 돈을 들였으니.”
“네,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김미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의미일까.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천억은 당신에게는 엄청 큰돈이겠지만 우린 아니야.’ 이런 의미?
설마 그랬을까, 정말로.
아니겠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가려고 나를 불렀을 리가.
그리고 잠시 웃으며 가만히 있던 그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 나왔다.
“강재훈 맥스스쿨 전 대표, 그리고 지원재 씨, 아시죠?”
* * *
“어쩌다가 대표님께서 그런 젊은 친구에게 당하신 거예요?”
“그러게 말입니다. 부회장님도 누군지는 아신다면서요. 강의 보신 적 있으시다고…….”
“그거야 공짜니깐 봤던 거죠. 강의하는 거야 뭐,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그걸 인터넷에 올려서 홍보로 써먹은 건 그때만 하더라도 굉장히 드문 일이잖아요.”
강재훈 맥스스쿨 전 대표.
그의 직함에 ‘전’ 자가 붙은 것은 이제 대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S 아카데미 유현덕, 그리고 숨겨 둔 딸이었던 이미도에게 모든 것을 뺏기고 지금은 그냥 지분만 조금 가지고 있는 상황.
아내 유미진과 아들 강민호의 지분까지 합친다면 그래도 꽤 되는 상황이겠지만, 그들은 기업 공개 후 주가가 폭등하자 아주 약간을 남기고는 모두 현금화시켰다.
그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맥스스쿨 지분은 고작 10% 남짓.
그런데 지금 이 카페에서 그는 국내 10대 재벌 중 하나인 한성 그룹 부회장과 함께 앉아 있다.
이들 둘의 인연은 사실 유현덕이 S 아카데미를 시작하기 전, 유현덕이 인터넷에 무료로 강의 동영상을 올려놓은 것을 본 김미연이 맥스스쿨 온라인 강의를 수강하면서부터다.
왜 유현덕 강의로 처음 인터넷 강의를 접한 사람이 맥스스쿨 강좌를 돈을 내고 들었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온라인 교육’ 하면 맥스스쿨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사업적 능력도 있는 사람인가 보네요, 그 친구는.”
“있다마다요. 한 번 된통 당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드네요.”
“그래서, 대표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저요? 글쎄요. 강제로 이렇게 된 것이 조금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시대가 흐르니 젊은 친구들이 밀고 올라온 것인데. 그냥 흐르는 것을 구경이나 하려고요. 허허.”
의외로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만한 사업체를 운영하며, 그만한 수입을 얻던 사람이라면 욕심도 엄청날 텐데 여기에서 멈추다니.
그가 기운 없이 말하는 모습에 다른 생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셔요. 그래도 국내 최대 온라인 교육 사이트를 시작하고 운영한 분이시면서.”
“저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허허. 내 밑에서 일하던 친구 하나가 있어요. 거의 유 대표만큼 아주 똘똘한 젊은인데, 그 친구도 유 대표 손을 들어 준 것 같더군요. 이래서 노인들은 때가 되면 알아서 물러나야 하나 봅니다.”
“젊은이요? 누군데요?”
사실 그녀가 이미 무너진 강재훈을 만난 것은 옛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옛정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고.
강재훈이 맥스스쿨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업계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견고한 성을 쌓고 퓨처 금융투자 외에는 어떤 외부 투자도 받지 않으며 성장을 하고 있던 맥스스쿨이었기에 그의 운영 능력은 이미 공인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한성 그룹이 준비 중인 교육 복지 사업(이라고 하면서 결국 그룹 이미지 재고 목적이지만)을 주관하여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해당 업계에 경험이 풍부한 조언자가 필요했다.
갈 곳 없어진 강재훈은 이에 딱 적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날 만난 그는 욕심이 없어 보였다.
사업에는 욕심이 필요한데 욕심이 사라지면 제대로 된 사업을 진행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강재훈 또한 그녀가 갑자기 자신에게 연락을 해 만나자고 한 이유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은퇴 후 유유자적.
그가 꿈꾸던 삶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가질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분하고 다시 맥스스쿨을 찾아오고 싶었지만, 일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뜩이나 가족들이 말썽이었는데, 그나마 딸인 이미도가 콧대 높은 맥스스쿨 강사진을 잘 다독이며 이끌고 있다는 소식도 나쁘지 않았고.
김윤지의 비서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일선에서 다시 뛰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그녀의 도움을 받는다면야 S 아카데미나 맥스스쿨 급 사업을 곧바로 시작할 수 있겠지만, 이제 조금은 지친 기분이 들었다.
“지원재 실장이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걸로 알고 있고요.”
비슷한 시기에 사교육에서 성공한 강재훈과 조규만.
하지만 그들 둘의 성품은 너무도 달랐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법적인 일도 서슴없이 행할 수 있는 조규만에 비하면 강재훈은 순수한 사업가였다.
유현덕에게 당한 것이 뼈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 방식으로 당한 것은 아니기에 인정한 그는, 지원재의 미래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배반한 이유로 업계에서는 배신자로 찍힌 지원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인물을 자신 밑에서 키워 냈다는 알 수 없는 자부심도 생겼고.
“혹시 연락처 아시나요? 참, 강재훈 대표님께서는 그럼 저희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으시는 거죠?”
“허허. 뭔지는 모르지만 이제 조금 쉬려고 합니다. 구경하는 재미도 조금 생겼고요. 유현덕 그 친구도 이제 내가 아니라 국회의원이 된 조규만과 싸워야 할 테니까요. 어떻게 이겨 나가나 궁금합니다. 지원재 실장 연락처는 저도 알아봐야 합니다. 그 일 후로 연락을 주고받은 일이 없어서.”
“부탁 좀 드릴게요. 저희야 경험 많으신 대표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좋겠지만, 거절을 하시면 뭐.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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