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68화.
주현필이야 그런 부분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는 않는 사람이니 별 반응이 없었지만, 유환 선생님은 내가 통화하는 것을 듣고 한 번 말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솔로 지옥을 탈출한 건가, 유현덕 대표님?”
“무슨 소립니까, 유환 선생님. 선생님이야 말로 어서 짝을 만나셔야죠. 이러다 40대로 넘어가십니다.”
이런 사이였지 우리는.
그리고 기분 좋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울리는 휴대폰.
기분 나쁜 이름이 떠 있었다.
“네, 의원님.”
그래도 예의는 차려야지.
속이는 건 속이는 거고, 굳이 불필요한 감정을 더 늘릴 필요는 없으니깐.
-유 대표. 나 조규만이네.
“네, 말씀하십쇼.”
-내가 오늘 듣자 하니,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확인 하나 해 보려고 전화를 했어.
이상한 소문이 아니라 사실일 거다.
자신 외에 다른 투자자가 있다는 소식이겠지.
게다가 구워삶기 어려운 대기업이 그 투자자일 거고.
“소문이요? 어떤 소문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S 아카데미 투자자 현황이 어떻게 되는가?
그는 나에게 이걸 먼저 물어봤어야 했다.
물론 이제까지 다른 누군가의 투자를 받아오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상황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니.
시계를 보니 그래도 30분 정도 더 통화할 시간은 남아 있었다.
기분 좋게 한성으로 가려고 했건만, 그건 포기해야 하겠네.
“원래는 비공개입니다만…….”
-이봐. 나도 투자자야. 누가 최대 주주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감사 요청도 내가 직접 할 수 있어, 이제는.
“의원님 30%, 제가 30%, 그리고 남은 40%는 한성 그룹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성? 한성이 언제 끼어들어 온 건가?
이게 그가 들은 소문이었겠지.
나는 그 소문을 사실이라고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그나저나 예상했던 그의 반응보다는 차분한데.
“한성의 투자 제의는 한 달 쯤 전이었습니다. 조건이 워낙 좋아서 40% 바로 넘기는 것에 사인했고요. 끼어들어 온 것은 의원님이십니다.”
-그럼 미리 말을 해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제안이었던 고문 선임 부분은 어떻게 되는 건가?
“물어보지 않으셨잖아요. 그리고 그 제안은 제가 받아들였잖습니까. 의원님 고문으로 선임하는 부분과 연봉까지.”
조규만은 아무 일도 안 하고 고문으로서 또한 1억씩을 받게 된다.
참 뻔뻔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이 판에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내 영향력은 보장해 주는 거지?
“의원님께서 보유하신 지분만큼의 영향력이죠, 정확히 말씀드리자면요.”
-한성은?
“한성은 전적으로 저와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렇구먼.
이 사람 머리도 지금 복잡할 것이다.
아마도, 내 생각이긴 하다만 그는 아마 S 아카데미를 자신 마음대로 움직이려 했겠지.
30%의 지분으로 시세 차익을 얻음과 동시에 운영권까지.
하지만 운영권은 한성에서 나에게 일임했다.
내 지분율을 빼고라도 이길 수 있는 상태였고.
-딴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기업 공개를 취소한다거나 하는…….
“그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혹여라도 이견이 생긴다면 정식으로 주주간의 총회를 통해 처리하면 되니 말이죠.”
-음……. 아무튼 나에게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것은 실망이네, 유 대표.
의외로 고분고분 상황을 인정하는 모습인 걸?
막 욕을 던지고 할 줄 알았는데.
하긴, 지금 그가 나에게 욕을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분을 많이 챙겨 드리지 않았습니까, 의원님.”
내 저 말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었다.
‘그냥 시세 차익으로 만족하시죠.’
-한성이 끼어들지 않았나! 아무튼, 내가 지켜봄세.
통화가 끝날 무렵에야 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도 화가 나고 있겠지.
화가 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원래 나쁜 놈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 본인은 그걸 철석같이 믿고 움직인다.
“문제는 없을 겁니다. 기업 공개 준비되면 바로 연락드리죠.”
그때까지 그는 그냥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한성을 찔러 볼 것이고, 그들이 어느 정도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공은 내 손을 떠난 상황이고, 이제 한성에서 어떻게 국회의원을 다루는지 궁금하군.
조규만이 아무리 국회의원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상대하는 건 아마 나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아무튼 다행은 다행이었다.
그가 난리를 쳤다면 조금 피곤해지리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도 꿀릴 것이 없으니 전처럼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냥 목소리 자체가 짜증나서 그렇지.
* * *
“전무님!”
“어이고, 유 대표님 오셨습니까.”
신기하게도 한성 그룹이 준비 중인 온라인 교육 사이트를 운영하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S 아카데미가 있는 지역이었다.
이재훈 전무는 지난번에도 나에게 최대한 편의를 봐준다고 했는데 그게 이유였을까?
그는 밝은 표정으로 건물 앞까지 나와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왜 나와 계셨어요? 제가 사무실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우리가 도움을 받는 입장인 걸요. 어서 올라가시죠.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기다리는 분이요?”
누굴까?
오늘 약속이야 며칠 전에 잡기는 했지만, 이재훈 전무 외에 누군가를 또 만난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의 사무실은 전해들은 대로 맨 꼭대기 층.
아주 큰 건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성 그룹 이름을 달고 있는 건물이라 신성 학원이나 성공 대입학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마 맥스스쿨 본사 정도 되려나?
여기는 한성 그룹 본사가 아니니 본사 건물은 얼마나 더 클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꼭대기 층인 14층에 도착했다.
띵.
“어서 오십쇼.”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는 어디나 똑같구나.
그런데 문이 열리고 보이는 풍경은 1층 로비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였다.
붉은 카펫이 복도 전체에 깔려 있어 얼핏 보면 호텔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일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예쁘게 생긴 안내원이 인사를 하는 것도.
“허허. 여기가 제 사무실이 있고, 중요한 분이 유 대표를 기다리고 계시는 곳입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급변한 장면에 그대로 굳어 버린 내 모습을 보고 이재훈 전무가 웃으며 말했다.
“아, 네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유현덕 대표님.”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
이거 확실히 서비스가 차원이 다르구나.
사실 이재훈 전무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유명한 대기업 전무도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자, 어서 가시죠. 이쪽입니다. 미스 연, 차 좀 부탁해요. 부회장님께는 당연히 차 갖다 드렸겠죠?”
미스 연?
좀 오글거리는 호칭이긴 했다.
그래도 참, 뭔가 우리랑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뭐? 부회장?
한성 그룹 부회장을 말하는 건가?
부회장은 또 누구야…….
“네, 10분 전에 가져다 드렸습니다. 차는 커피와 녹차가 있습니다만, 어떤 걸로 갖다 드릴까요?”
이재훈 전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가 대답하길 기다리고 있었고.
이 말을 듣기 전 까지는 말이다.
“유현덕 대표님?”
“네? 저요? 전무님은요?”
“하하. 나는 차 안 마십니다. 유현덕 대표님한테 물어본 거예요.”
‘그렇구나.’ 하면서 미스 연이라는 안내원을 봤는데 웃고 있었다.
아니, 웃음을 참고 있는 건가?
근데 진짜 그런 거였다면 정말 완벽하게 참는 거였겠지.
민망했다.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서울 가서 지하철 처음 타 볼 때 이런 느낌이려나?
“아, 저, 저는 커피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멍청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는 진짜 멍청해질 것 같아서.
이재훈 전무는 한바탕 웃더니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회장님이요? 부회장님이 저를 왜?”
“가 보시면 압니다. 저도 왜 갑자기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제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문이 중간에 하나도 없었다.
복도의 길이가 꽤 되는데 정말 이 정도로 문이 없으니 이상했다.
푯말을 보니 여긴 이재훈 전무의 방인데, 그는 문 앞에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노크를 했다.
똑똑.
“부회장님, 유현덕 대표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대답 대신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들어오시죠.”
이번에는 건장하게 생긴 미남형의 남자가 보였다.
이재훈 전무는 그의 어깨를 한 번 손으로 건드리더니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고, 나는 쫄래쫄래 따라 들어갔다.
쫄래쫄래라니.
하지만 정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내부는 엄청나게 넓었다. 복도에 문이 없던 것은 이 방이 워낙 크기 때문이었다.
대충 보더라도 성공 대입학원 강의실 한 개 반 정도 합친 크기?
그 강의실이 80명 정도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규모이니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되는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크기의 개인 사무실.
하지만 내부는 의외로 깔끔했다.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것도 없고, 그냥 넓은 책상에 큰 의자 하나, 그 뒤로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거대한 책장.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은 복도에서는 책상 앞으로 반쯤 열린 문에 가려 보지 못했던 거대한 티 테이블과 소파였다.
그리고 정말 나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상당한 미인.
너무 젊어 보여 안내원인가 생각을 했는데, 안내원이 전무가 들어오는데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을 리가 없잖은가.
거기에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티 테이블 중앙. 다른 소파들은 붙어 있는데 혼자만 똑 떨어진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유현덕 대표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재훈 전무님.”
“아닙니다, 부회장님. 저는 그럼 조금 이따 부르시면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그리고 이재훈 전무가 거의 90도로 그 젊은 여성에게 인사를 하더니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거대한 크기의 사무실에 나와 그녀만 남아 있었다.
“이리 오셔요. 얼굴을 직접 한 번 뵙고 싶었네요.”
“아, 안녕하십니까. 유현덕이라고 합니다.”
“호호. 알고 있습니다. 영상으로는 많이 뵀는걸요. 어서 앉으셔요.”
영상으로 봤다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김미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악수를 하고는 자리에 앉기까지는 했는데, 정신이 없었다.
한성 그룹 부회장이라면, 그리고 이 나이에 그런 위치라면 아마 회장 가족일 것이다.
그리고 회장 가족 중에 이 나이, 에이, 내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는가.
국내 대기업들의 가족 관계에는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유현덕 선생님께서 올려놓으신 강의들 보면서 공부했어요. 그리고 나름 결과도 있었고요. 아버지가 붙여 주신 과외 선생님들보다 훨씬 효과가 있던걸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버님이라시면…….”
“김승주 회장님이 저희 아버지세요.”
역시, 그러면 그녀가 바로 이재훈 전무가 말했던 그룹 회장의 딸이었구나.
“아,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저를…….”
“그냥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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