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65화.
“그래서 여쭤봤던 겁니다. S 아카데미의 종착지를 어디라고 생각하시냐고요.”
종착지라.
사업에 종착지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냥 꾸준히 성장하고 유지하는 것.
물론 개인적으로는 돈을 충분히 벌고, S 아카데미와 맥스스쿨을 통해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전부 이룬다면, 그 뒤에는 방금 이재훈 전무가 말한 것처럼 사회적 기업? 돈을 벌기 위한 학원이 아니라 남을 위해 퍼 주는 학원 같은 것을 운영해 보고 싶기는 했다.
그런데 벌써라니…….
나는 전생에 학교 교사였다.
학원으로 가는 것,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두렵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학교라는 곳은 달랐다.
들어오는 돈에 큰 신경 쓸 필요 없이 단순하게 아이들만 생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곳.
다시 돌아온 뒤로는 돈을 벌려고 아예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본 적은 없었다.
조금 거짓말 같은가?
아주 진실만이 담겨 있지는 않을 수도.
그래도 거의 진심이다.
내가 학교에서 일을 하든, 사교육에서 일을 하든, 그 차이점은 내가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은 똑같다.
운이 좋고, 또 내가 기억하는 부분이 많아서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학생들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가르치는 나도 다르지 않다.
“S 아카데미를 무료화시킬 생각이신 건가요?”
“아뇨.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현재 S 아카데미 규모가 아깝죠. 유현덕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투자를 받으시는 조건으로 저희 쪽에서 준비 중인 새로운 온라인 교육 서비스에 이사로 들어와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이 서른도 채 되지 않아 이사라니…….
아니 사실 몇백억짜리 업체의 대표니깐 이사직은 이미 훌쩍 뛰어넘은 상황인가?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게 아니라 사실 방방 뛸 정도로 기회였다.
한성 그룹의 회장은 아마 이 온라인 교육 서비스를 저가나 무료로 운영할 생각을 했을 테고, 그것을 통해 사회 저소득층을 지원한다는 이미지를 쌓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업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먼저 시작한 나나 강재훈 전 맥스스쿨 대표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테고.
“그리고 저희 교육방송 인터뷰도 다음 달로 잡아 두려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말이죠. 하하. 유 대표님은 앞날이 창창해 보입니다.”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윤주환 사장도 덧붙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번 일은 엄청난 기회였다.
칸 아카데미와 유사한 시스템을 한성 그룹의 지원을 받고 만든다면, 분명 더 좋은 질의 강의를 사회 소외 계층에 제공할 수 있으리라.
내가 먼저 제안서를 들고 가도 될까 말까 한 일인데, 더군다나 엄청난 액수의 투자까지.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습니다만,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무님.”
“하하. 지금 당장 답을 달란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그 서비스 준비 중이라 바쁘거든요. 돈도 안 되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기다려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얼른 식사를 하셔야겠네요. 다 식겠습니다.”
“회가 식을 것이 뭐 있나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 * *
“계약서는 준비하셨겠죠, 미리?”
“화끈해 역시! 이래야 유현덕이지! 허허. 바로 내용 수정해서 도장 찍으시게.”
“먼저 영상 파일 파기해 주시고 각서부터 쓰시죠. 계약서 작성과 동시에 각서에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주현필이 내 어깨를 꽉 눌러 잡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겠지만 지금 그와 실랑이를 벌일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일이 꼬인 것, 확실하게 꼬아서 풀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지금 이 상황에서 조규만은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협상에서 정보량은 가장 중요한 열쇠고.
그가 지금 S 아카데미의 정확한 지분 구성을 파악하기 이전에 도장을 찍고 돈을 받고 넘기면, 그는 말 그대로 시세 차익만을 얻겠지.
이것만 하더라도 나에게 큰 손해이기는 하겠지만, 현재의 S 아카데미를 평생 운영할 생각은 없었다.
윤주환 사장, 그리고 이재훈 전무와의 만남 이후 나도 내 미래, 그리고 S 아카데미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조금 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현재에 안주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중요한 만남이었던 것 같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김윤지 원장님, 이쪽으로 오시죠. 그쪽에 더 이상 죄인처럼 앉아 계실 이유 없습니다.”
아직도 김윤지는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리라.
아마 그녀는 본인 때문에 내가 엄청나게 많이 양보한 것으로 느끼고 있을 테니.
양보는 크게 했지.
정말, 내가 S 아카데미의 현재 모습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리고 내 노력의 대가, 내가 받아야 할 대가의 30%를 충분한 보상 없이 조규만에게 넘기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괜찮다. 더 큰 것을 얻었으니.
“얼른 오세요!”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마시게, 유 선생. 그러면 내가 너무 나쁜 놈처럼 들리잖나.”
이 새끼야, 너는 진짜 나쁜 놈이다.
본인도 알면서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돈은 얻을 수 있겠으나, 고문을 두는 조건은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할 거야.
나는 대답 없이 손만 내밀었다.
“계약서 주시죠, 의원님.”
“이거, 참. 젊으니 곧 풀어지겠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젊으니 훨씬 오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지.
“여기 있네.”
“사인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돈은 언제 입금하시는 겁니까?”
“지금 해야지. 김 비서!”
“네, 의원님.”
“지금 바로 입금되지? 전화로?”
2000년대 중반. 당연히 모바일 뱅킹이 운영될 시기였다. 물론 전생처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네, 바로 입금시키겠습니다.”
“200억 바로 입금시켜.”
200억을 바로?
이 사람, 선거비용 없다고 강재훈 전 맥스스쿨 대표에게 성공 대입학원을 일부 주면서까지 선거에 나섰던 것 아니었나?
아니면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지저분한 방법으로 모은 돈일까.
“입금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유 대표님.”
그리고 나는 곧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주현필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아마 여기에서 나가면, 머리에 혹이 하나 또 생길 것 같다. 너무 크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김윤지 원장님, 괜찮아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서 있는 김윤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를 보질 못했다.
“직접 하신 말씀은 지키시는 분이기를 바랍니다, 조규만 의원님. 그리고 김윤지 원장님은 이제 저희 쪽에서 모시겠습니다. 절대로, 진짜 절대로 더 이상 건드리지 마십쇼.”
“내 외조카야, 이 사람아. 허허.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걱정 마시게. 앞으로 자주 보겠구먼.”
자주 보게 될 것이었다.
당장 그가 S 아카데미 지분의 40%가 한성 그룹에게 넘어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머리가 살짝 아팠지만 그 일은 벌어지고 나서 고민하자 생각했다.
* * *
“통장에 200억까지 찍힌 적은 아직 없는데…….”
“조용해. 너 또 네 마음대로 했어.”
신성 학원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의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다.
김윤지는 아직 회복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았고, 주현필은 아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으리라.
음, 이 사람에게 나는 이제 S 아카데미 지분을 30%밖에 안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동안 강의는 쉬게 될지도 모른다.
나중에 강의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지면 한 번 써먹을 방법이군.
“김윤지 원장님 구했잖아요. 그거면 됐지.”
아무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거 참 민망한 시간이 흘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혼나는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원래 이런 것 아니겠는가.
딱히 특별한 잘못이 없더라도 분위기상 혼나야 하는 그런…….
“김윤지 원장님?”
“네…….”
목소리에 힘이 아예 없구나.
아마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대화를 하려는 것도 그녀 기분 때문에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하겠지.
“신성 학원으로 일단 가시고, 한동안 성공 대입학원 강의는 휴강하시죠?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현덕 선생님,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응? 나보고 괜찮냐고?
“네? 네. 괜찮다니까요. 하하. 웃잖아요, 편하게. 김윤지 원장님만 조금 기분 풀리시면 됩니다. 여기 주현필 선생님은 원래 이런 분이시……. 으악!”
말이 끝나기도 관자놀이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주현필은 운전 중인데 어떻게…….
하지만 깜빡한 것은 차가 신호에 걸린 상황이었다는 것.
운전 중에는 적어도 때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전생에는 누구한테 맞고 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
그리고 그녀가 다시 나에게 다 죽어 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아, 그게 있었구나.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처음 만난 날 찍힌 영상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그걸 까맣게 잊고 그녀를 어쨌든 구하고 일을 해결하겠다는 생각만 했다.
처음 만난 날, 벌써 몇 년 전이기는 하지만, 그날 그녀와 내가 같은 방에서 있었지.
영상을 지우고, 아예 그 영상이 들어 있던 노트북까지 조규만에게 요구해 들고 왔다.
무슨 영상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잤다’고 했지.
자다니…….
“아, 아닙니다. 제가……. 제가 죄송하죠.”
내 목소리도 죽어 들었다.
그리고 얼굴도 화끈거렸는데, 갑자기 옆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주현필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채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나와 김윤지 모두 시선이 웃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차에 셋밖에 없는데 그중 둘은 완전히 풀이 죽은 상황이었고, 그러면 나머지 한 명, 주현필!
뭐지? 왜 웃지? 미쳤나, 이 사람이?
“미안해요, 김윤지 원장님.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다 웃어 놓고 뭘 또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라고 하는가.
그리고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저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요, 둘 다. 여자 입장에서는 굴욕적이고 정말 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성인이잖아요. 찍은 놈이 나쁜 놈이지 찍힌 사람은 피해자에요. 그런데 찍은 놈은 피해자가 힘들게 느끼길 원해서 찍은 건데, 계속 힘들어하면 그놈만 좋은 일 해 주는 거예요.”
주현필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그나저나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유현덕. 그래 놓고 기억 못한 건 너도 나쁜 놈인 거야.”
아, 진짜.
하긴, 내가 나쁘긴 했다.
그것도 모르고, 기억도 전혀 못하고 그녀에게 그날 무슨 일이 혹시 있지 않았느냐고 물어봤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만, 기억하고 있었다고?
“근데 왜 김윤지 원장님은 말씀을 안 해 주셨…….”
퍽!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다.
이거 까딱하다가는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운전자에게 맞아 죽은 최초의 인간이 될 수도 있겠다.
“넌 조용히 있어. 둘이 이야기가 조금 필요할 것 같으니, 학원 올라가서 일단은 유현덕 선생 강의실로 가 봐요. 그게 좋지 않겠어요?”
“네…….”
그녀가 좀 회복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런 일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너무 길지만 않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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